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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6:39:09

서울의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서울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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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의 진행 과정
2.1. 배경2.2. 시작2.3. 진행2.4. 학살극의 마무리2.5. 이후2.6. 다른 병원에서는?
3. 전쟁범죄4. 학살의 주축에 대한 추측들5. 미디어에서의 등장
5.1. 만화5.2. 소설5.3. 수기5.4. 영화
6. 여담7.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contents.dt.co.kr/2010060402019957753009.jpg
2010년 6월 4일 거행된 희생자 추모식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처음 서울을 점령한 직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現 서울대학교병원)에 난입하여 벌인 대규모 학살 사건. 서울지역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 사건의 일부다.

2. 사건의 진행 과정

2.1. 배경

개전 직후 서부전선 일대의 교전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된 대한민국 국군 부상병 다수는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서울 시내의 여러 병원에 분산 후송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심한 부상을 입은 중상자였다.

그러나 개전 3일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자 서울에 남아 있던 대다수 민간인들은 아비규환에 빠져 피난길에 올랐으나[1] 환자가 있는 병원 근무자들이나 경비병들은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급하게 서울을 빼앗기는 상황이라 체계적인 후송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병원을 빠져나갈 수 없었던 부상병들과 경비병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의료진, 그리고 일반 환자들과 가족 병수발을 위해 남아있던 민간인들이 다수 서울대 병원에 남아 있었다.

2.2. 시작

6월 28일 아침 조선인민군 육군 제9 땅크여단[2] 소속으로 추정되는 병력들이 서울대병원까지 들이닥쳤다. 당시 병원 내부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환자들로 만원이었으며 병원 경비를 위해 남아있던 대한민국 육군 보병 1개 소대와 움직일 수 있는 전상병 80여명이 소대장의 지휘하에 뒷산에서 응전하였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국방부 블로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전투를 지휘한 소대장남씨 육군 소위, 선임하사민씨 성을 가진 중사였다고 한다.

저항하는 국군을 전멸시킨 북한군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병력을 산개시켜 병원을 둘러쌌다. 이제 병동 안에는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부상병들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비무장의 의료진과 민간인 환자들, 그리고 환자 가족들만이 남아 있었다.

2.3. 진행

병원을 점령한 직후 한 육군 중좌가 "원쑤놈들의 앞잡이들이 여기 누워있다!"며 선동을 시작했고 이내 한국군 부상자를 몰살시키기 위한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병동을 순회하며 침대와 바닥에 누운 환자들에게 총을 갈기고 총 맞고도 죽지 않은 이들은 총검으로 확실히 죽였으나 이게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는지 나중에는 환자들을 침대 밖으로 끌어내어 병실 구석으로 몰아넣고 한꺼번에 총을 쏴 죽였다. 학살의 소음이 울리자 다른 병동에 남아 있던 환자들은 급히 대피 시도를 했지만 죄다 북한 육군 경계병들에게 걸려 참혹한 꼴을 당했고 일부는 살해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권총을 가지고 있던 장교들은 병실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살되거나 자살하기도 했으며 북한군은 심지어 위문차 남아 있던 환자의 가족들까지도 살해했다.

이 학살의 명분은 일단은 한국군 응징이었으나 사실 군인이나 민간인이나 환자복을 입은 채로는 별로 구분이 가지 않아서 민간인들도 다수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나 명단은 당시 상황이 상황인지라 남아 있지 않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국군 부상병이 있는 곳이 아닌 정신병동까지 들이닥쳐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도 죽였다는 것이다. 아마 언뜻 보기에 몸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환자복을 입고 있으니 옷을 갈아입고 숨은 국군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세 시간 동안 부상병을 찾아내어 죽이고 나서도 아직 놓친 부상병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병원 안을 샅샅이 뒤져 부상병들을 찾아낸 다음 밖으로 끌어내어 한꺼번에 총을 쏘아 죽이고 생존자를 총검으로 확인사살했는데 이때도 일반 환자나 가족 등 민간인이 다수 살해당했다. 이렇게 죽이고 나서도 병원 안에 남아 있는 '거수자'들을 악착같이 잡아내서는 보일러실로 끌어가 10석탄 더미에 생매장했다.

2.4. 학살극의 마무리

학살을 당한 시체들은 한여름인데도 병원 마당에 쌓인 채로 20일 동안 방치되어 병원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더 이상 못 견디게 된 북한군이 시체들을 병원 앞 큰길인 창경궁 앞 길에 시체를 쌓은 뒤 기름을 붓고 불로 태웠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들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측의 기록에는 부상병 100여 명으로 되어 있고 서울대병원에서 세운 추모비에는 1,000여 명으로 되어 있다. 편차가 아주 크지만 이는 전시에 제대로 기록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다.

2.5. 이후

환자들이 죽은 뒤 병원은 북한군 부상병들의 후송 기지로 쓰였고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된 뒤에야 끔찍한 참상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게다가 밀려나기 직전에 또 한차례 학살을 벌인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두 번째 학살극은 대한민국을 위해 협박하는 북한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한 자나 북한 정부에 부정적인 민간인과 언론인 등이 그 대상이었다. 숫자는 무려 백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 군의관, 의무병 상당수가 북한에 납치되어 북한군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저항하던 일부는 본보기로 광장에서 서울 시민들을 겁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참혹히 살해당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북한의 후방 군 병원에 동원한다는 명목으로 북한으로 끌려갔고 이 과정에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의료진을 총살하는 등의 만행이 이어졌다고 한다. #

2.6. 다른 병원에서는?

돈의문(서대문)의 적십자병원에도 한국군 부상병이 대량 수용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서울대병원처럼 곧바로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았고 한국군 경비병도 없어서 인민군이 느긋하게 병원을 점령한 다음 "동무들은 죄가 없다. 치료가 끝나면 다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장교가 나서서 안심을 시키고 남아있던 한국군 군의관에게 계속 부상병들을 돌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장 그날 오후에 북한군 부상병에게 침대를 비워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여기 그대로 있으면 학살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직감한 일부 장병이 탈출을 시도해 성공했다.[3] 이때 이미 군의관은 구금되어 있었으며 이 병사들이 탈출한 후에 병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다. 남아 있던 부상병들은 전원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곳 외에도 서울 시내 여러 병원들과 환자를 수용하고 있던 교회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살이 벌어졌다는 증언이 있으나 정확한 희생자들의 명단과 숫자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후 전주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학살극이 있었다.

3. 전쟁범죄

1949년 8월 12일 제네바 회의에서 채택된 1949년 제네바 협약에서는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 제12조에 "군대의 구성원과 기타의 자로서 부상자 또는 병자인 자는 모든 경우에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들은 성별, 인종, 국적, 종교, 정견(政見) 또는 기타의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없이 인도적으로 대우 또는 간호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그들의 신체에 대한 폭행은 엄중히 금지한다. 특히 그들은 살해되고 몰살되거나 고문 또는 생물학적 실험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일 이게 정상적인 전쟁이었다면 북한군은 포로로 잡은 부상병들을 보호하고 치료가 계속 진행되도록 보장했어야 하지만 애초에 적화통일을 성공하면 어차피 체제에 위협이 될 반공주의자들을 죽여 버릴 작정이었던 북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포로들을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전향시키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차버린 셈이다.[4]

저항 불능의 환자들을 유린한 정황만으로도 잔혹하지만 북한군은 이에 대해서 전혀 반성하지 않고 현재도 군인들에게 제네바 협약 같은 것은 일제강점기일본군인 양 '군인을 겁쟁이로 만든다!'며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다으며 이 사건 이후에도 붙잡은 포로를 학살하거나 자기네 병사로 강제로 편입시키는 짓을 일상적으로 저질렀다. 끝까지 그토록 그리워하던 집과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대한민국의 미귀환 국군포로가 수만 명에 달하는 것도 북한이 이른바 해방전사라고 하여 자기들 멋대로 북한군에 편입시켜 놓고 휴전 때까지도 이들은 이제 포로가 아니라고 주장한 탓이 크다. 이후에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적대계급잔여분자 문서를 참고할 것.

이런 식의 잔혹행위를 북한군이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었던 데는 의정부 축선을 통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력이 소련군 출신이 주축이 된 3사단, 4사단, 9전차여단이었던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의도적으로 서울 점령이라는 공을 몰아주기 위하여 이들을 서울 공격의 주공으로 삼았다. 3사단은 병사는 북한에서 징집한 신병들이었으나 장교는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었으며 4사단은 1개 연대가 중공군 출신 연대(18연대), 나머지 병사들은 조선로동당원이었고 군관은 소련군 출신자가 많았다. 9전차는 소련에서 전차병 교육을 받고 돌아온 이들이 핵심이었고 소련과의 연대를 원하던 김일성이 이들을 무슨 소련 근위대 정도로 공을 세우게 해 선전용으로 사용할 작정이었으므로 더더욱 잔혹행위가 윗선에서부터 권장되었다.[5]

애초에 공산군측 전체가 미쳐 돌아가는 형세였는데 중공군삼대기율 팔항주의라는 구호가 있었으나 이는 군법으로 시행된 국공내전 때부터 사실 잘 지켜지지 않았고 국민당군을 상대로 학살이나 마을 주민 하나를 통째로 총칼로 협박해 총알받이로 국민당군이 형성해둔 화망에 걸어가게 한 뒤 이를 왜곡하여 선전에 써먹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중공군은 포로를 상대로 심리전을 벌여서 이미 중국 심리학자들의 조언대로 사상전향서와 인간 내면의 인지부조화를 이용해 포로를 상대로 사상전향서를 안 쓰면 밥을 안 주고 구타하는 식으로 학대하곤 했다. 민가에서 사용하는 소를 강제로 잡아서 먹고 쓸 수도 없는 군표를 대충 만들어서 땡치는 일이 많아 민심이 크게 악화되곤 했다.

4. 학살의 주축에 대한 추측들

서울 점령의 선두에 선 세 부대 중에서 직접 이 사건을 일으킨 부대가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국방부 블로그에 올라온 "울프독의 War History" 포스팅에 따르면 학살의 범인은 9전차여단으로 추정되는데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해당 필자가 당시의 정황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추측한 것이다. 개연성은 충분히 있으니 관련된 포스팅을 각각 읽고 타당성을 추측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1부, 2부, 3부, 4부, 5부로 이루어져 있다.

위 연작 포스팅의 논지를 요약하자면 9전차여단은 소련에서 훈련받은 이들이 주축인 데다 여단장 류경수부터가 김일성 직속 항일빨치산 출신의 무지하고 잔인한 인간이라 거리낌 없이 국군 부상병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105사단(9여단)은 낙동강까지 내려가면서도 수시로 포로 학살을 저질렀는데도 류경수는 포로 학살을 금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위 블로그 운영자는 3사단의 경우는 실제 미군 포로를 학살한 사례가 있으나 그 사건은 사단 차원이 아니고 일선 지휘관이 임의로 저지른 짓이었으며 3사단장 리영호는 그래도 미군 포로를 학살한 사건이 공론화된 후 포로 학살 금지 명령을 내릴 정도로 기본적인 군인의 소양은 있었다고 평가한다. 4사단 같은 경우 다수의 소련계 장교가 있다고 해도 사단장 리권무부터가 중공군 출신으로 포로에 대한 우대가 습관화된 사람이었고 4사단처럼 중공군 출신이 주력이 된 부대가 서울대병원을 접수했다면 적어도 그 부대가 병원을 관리하는 동안은 어떤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위 블로그의 추측이다.

당시 공산군이 승승장구하던 때임을 생각해보면 크게 불합리한 추측은 아니다. 물론 그 부대가 남진하고 다른 부대가 이어받는 순간... 이하생략.

당시 간호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동원되어 서울대병원에서 부상자 치료를 했던 박명자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군이 사이드카를 타고 도착했다고 한다.
“... 6월28일 아침 9시경. 洛山(낙산·현재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뒤편의 산)과 창경궁 쪽에서 총과 포 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귀 떨어지겠네』라고 혼자말이 나왔다. 이때 선배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인민군이 왔대. 빨리 숨자’ 수술실 바닥에는 철판이 있었다. 철판을 들면 지하실이 나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 지하실로 숨었다. 그렇게 숨죽이며 있으려니 벽돌이 빠진 틈새로 오토바이 소리가 나더니 『빵 빵』하는 총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사이카를 타고 온 인민군이 국군 보초병을 총격한 소리였다. 인민군이 서울대병원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지하실에 숨어 있던 우리들은 끌려 나왔다. 끌고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를 지하실로 들어가게 한 의사였다. 그는 인민군 군의관으로 온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수술 가운데 모자를 쓰고 따발총을 멘 인민군 군의관 또한 전쟁이 나기 전 越北(월북)했다는 서울대 의대 교수였다. 해방 직후 의과대생의 40% 가량이 左翼(좌익)이었다는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6]

당시 북한군은 기계화장비 부족으로 모터찌클(사이드카)을 많이 사용했으며 105여단은 예하 303기동정찰대대에 모터사이클 2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7] 다른 부대들은 연락이나 지휘용으로 소수 보유했을 뿐이므로 105여단이 병원을 점령했다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5. 미디어에서의 등장

5.1. 만화

1981년에 계림출판사에서 간행한 반공윤리학습극화 『한국전쟁』 4권, <한강 방어선> 30~32p에서 총 9컷으로 묘사된다. 경비대와 북한군의 교전은 묘사되지 않으며 병원을 점령한 북한군이 따발총으로 환자와 의료진을 몰살시키고 자기네 부상병을 집어넣는 이야기만 나온다.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명시된 병원은 서울대병원, 서대문 적십자병원, 그리고 "시내에 산재한 큰 병원"이라고 언급된다.

2016년 서울북부보훈지청에서 이 사건을 다룬 짤막한 웹툰을 제작해 인터넷 등을 통해 배포했다. 서울북부보훈지청 페이스북 페이지 및 네이버 웹툰에서 확인 가능하다. 서울대학교병원의 비극

5.2. 소설

젊은 느티나무로 유명한 작가 강신재의 장편소설 임진강의 민들레에서 여주인공 이화의 남친이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다. 땅에 파묻혔는데 간신히 살아나와서 여친의 집에 숨어서 산다. 당시의 참극을 그린 거의 유일한 소설.

5.3. 수기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의 1950년 6월 30일자 일기 말미에도 이 학살 사건이 등장한다.
창경원 담모퉁이를 돌아 대학병원 영안전(靈安殿) 근처를 지나노라니 행인들이 웅기중기 모여 서서 철망 너머로 무엇을 들여다보면서 수군수군하고 있기에 호기심에 끌려서 그 옆으로 가 보니 거적으로 아무렇게나 덮어둔 시체를 보고 그러는 것이고 그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수군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인민군이 들어와서 대학병원에 들어 있는 국군 부상자들을 끌어내어 총살해버린 것이라 하니 설마 그럴 리가 있을 것 같지 않고 지나가는 풍설이라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조선 사람의 명예를 위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김성칠의 바람과 달리 학살은 사실이었다.

5.4. 영화

임권택 감독이 1973년에 연출한 영화 <증언>에 잠깐 나온다. 북한군이 병원에 와서 의사건 간호사건 환자건 쏴죽이는 장면이 한 5분 남짓 나왔다. 북한 장교가 여기 환자놈들을 죄다 죽여라 명령하는데 어느 의사가 어찌 북한군 총기를 빼앗아 그 장교를 쏴죽이지만 곧바로 다른 북한군에게 벌집이 되어 사살당한다. 겨우 병원을 빠져나온 주인공과 친구가 "미쳤군. 병원까지 이렇게 만들다니..." 이러면서 부대로 복귀한다.

6. 여담

1950년 6월 28일.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속에 편히 쉬어야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본래는 추모비만 남아 있었으나 이곳을 우연히 지나는 한 시민이 이 비석을 보고 애통하게 여긴 나머지 자신의 사비를 들여 매년 제사를 지내 왔다가 종로구 보훈단체에서 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와 별개로 매년 6월 5일에는 서울대학교 병원 주관으로 별도의 위령제가 개최되고 있었는데 2014년부터 별도 추모행사로 통합되어 매년 6월 28일을 전후해 개최되고 있다.

7. 관련 문서



[1] 그러나 일찍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를 믿고 있다가 뒤늦게 피난을 시도한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예고 없는 한강 인도교 폭파로 한강을 건널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2]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 7월 5일 이후 105 땅크사단으로 개칭됨. 대부분의 자료에는 이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음.[3] 국방부에서 출간한 구판 한국전쟁사에 이때 탈출한 병사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때 병원 간호사 가운데 일부가 '우리가 죽는다'면서 탈출을 제지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4] 하지만 설령 그랬다고 해도 북한에서 적대계급잔여분자, 운이 좋아야 겨우 복잡한 군중이 될 수 있으니 역시 부정적인 결과로 예상할 수 있다.[5] 결국 서울이 함락되자 3사단, 4사단, 9여단은 각각 '근위 서울' 칭호를 받고 9여단은 사단으로 승격되었다.[6] 원 글은 월간조선 1999년 6월 기사로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북한군과 입원부상병 사이의 처절한 전투상황에 대해서도 서술되어 있다. http://www.bobaedream.co.kr/board/bulletin/view.php?code=army&No=20971[7] 개전 시점에서 북한군 전체의 모터사이클 보유대수는 560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