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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9 19:06:59

샤를 루이 오귀스트 푸케



파일:Charles_Louis_Auguste_Fouquet.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

1. 개요

Charles Louis Auguste Fouquet

프랑스 부르봉 왕조군인, 정치인. 벨 아일의 공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엔 프랑스군원수였고 7년 전쟁 시기엔 전쟁 장관을 역임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그림 벨 아일 공작은 루이 14세 시절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 푸케의 손자이며, 벨 아일 후작 루이 푸케와 캐서린 아그네스 드 레비의 아들이다. 그는 할아버지 니콜라 푸케가 루이 14세에 의해 탐욕스러운 간신[1][2]으로 낙인찍힘으로서 가문의 명예가 훼손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1708년 드래곤 연대의 대령이 되어 여러 차례 공적을 세워 여단장까지 올랐다. 1715년 전쟁이 종결된 후 외교 협상에 참여한 그는 1721년 앙리에타 프랑수아즈와 결혼했다.

1727년, 그림 벨 아일 공작은 트루아-에베셰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732년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했고, 1736년 전쟁에 이은 외교협상에 참여하여 프랑스가 로렌 지역을 합병하는 데 기여했다. 1740년, 그림 벨 아일 공작은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프랑스군 원수로 승진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림 벨 아일 공작은 프랑스가 개입하여 바이에른의 국왕 카를 7세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와 함께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하여 프라하를 점령하고 카를 6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얼마 후 오스트리아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면서 프랑스군은 패주했고, 급기야 오스트리아군이 라인강 인근까지 도달해 프랑스를 위협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그림 벨 아일 공작의 위상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급기야 1744년, 그는 플랑드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후 1년간 영국에서 억류되어야 했다.

1745년 영국에서 석방되어 프랑스로 귀환한 그림 벨 아일 공작은 1746년 알프스 궁격 일대의 피드몽트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안티베스와 니스를 점령했지만 아스시에타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의 동생 체발리에 드 그림 벨 아일까지 잃는 비극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의 프로방스 침공을 격퇴하고 적을 롬바르디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1748년, 그림 벨 아일 공작은 후작에서 공작으로 승격되었고 프랑스 대신에 지명되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56년 5월 16일, 그림 벨 아일 공작은 국무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758년 5월 3일에는 전쟁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난 전쟁에서 장교들의 질이 불충분하다는 걸 통감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해 전문 장교들을 길려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국왕 루이 15세도 개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그의 개혁은 난항을 겪었다. 게다가 1758년 6월 23일 크레펠트 전투에서 그의 외아들 콩테 드 기수스가 전사하고 프랑스군이 패배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또한 1757년부터 1759년까지 영국 본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침공 작전을 수립했지만 이를 간파한 영국 해군에 의해 라구스 해전, 키브롱 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궤멸되자 포기했다.

1760년, 그림 벨 아일 공작은 더이상의 전쟁은 프랑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친구 생제르맹 백작 루이 클로드를 헤이그로 파견해 프랑스가 단독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할 수 있도록 주선하게 했다. 그러나 프랑스 외무장관 쇼아줄 공작은 이에 강하게 반대하고 생제르맹 백작을 국가 이반죄로 몰아 처벌하려 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사사건건 발목이 잡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그는 1761년 2월 26일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향년 76세.
[1] 보르비콩트 성을 지어 1661년 8월 17일 성을 방문한 루이 14세가 성이 너무 아름답다는 이유로 질투심에 사로잡혀 니콜라에게 무기징역 형을 선고한 일화로 유명하다.영상 군주 국가에서 절대권력자 왕에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가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다. 더구나 상대는 "짐이 곧 국가다"를 외친 바로 그 태양왕(Le Roi Soleil)이었으므로 니콜라 푸케는 제대로 된 변호도 못하고 바로 몰락했다.. 이후 루이 14세는 보르비콩트 성의 건축가 3명(Le Vaux, Le Brun, Le Notre)을 그대로 고용해 베르사유 궁전을 짓게 했는데 반드시 모든 면에서 보르비콩트보다 더 아름다워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2] 웃픈 사실은 정작 니콜라는 루이 14세를 위해 이 성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이 14세가 방문하면 언제든 머물 수 있도록 왕의 방(Chambre du Roi)도 다른 귀족들 성에 비할 수 없이 화려하게 지었건만 정작 루이 14세는 단 한차례도 이 방을 사용한 적이 없고, 되려 이런 화려한 성을 짓는데 필히 공금을 횡령했고, 왕에게 불충했단 죄목만 추가했다.(...) 다만 루이 14세도 양심은 있었던지 재무장관이란 관직 삭탈만 했지, 후작이란 작위는 남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