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전경 | 내부 전경 |
기본 정보 | |
위치 | 이탈리아 베네치아 |
종교 | 가톨릭 |
홈페이지 | 공식 홈페이지 |
지위 | 준대성전(Minor basilica), 주교좌성당(Cathedral) |
건축 정보 | |
축성 | 1650년 10월 8일 |
양식 | 비잔틴, 고딕 |
건축 내역 | |
전체 길이 | 76.5m |
전체 너비 | 62.5m |
외부 높이[1] | 43.0m |
이탈리아어 | Basilica Cattedrale Patriarcale di San Marco |
영어 | Patriarchal Cathedral Basilica of Saint M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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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위치한 동로마 건축 양식의 가톨릭 성당으로 복음사가 마르코에게 봉헌되었고, 베네치아 총대주교좌가 있는 곳이자 세계적인 관광명소이다. 산마르코 광장 동쪽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에 있는 두칼레 궁전과 연결되어 있다. 금박 모자이크로 벽면이 가득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황금의 교회(Chiesa d'Oro)'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과거 베네치아 전성기의 가공할 재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2. 역사
2.1. 창건
현재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은 성 마르코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원래는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테오도로에게 봉헌된 성당은 9세기 초 지금의 산마르코 대성당 부근에 세워졌다. 828년 베네치아 상인들은 당시 아바스 왕조 치하 알렉산드리아에 매장되어 있던 성 마르코의 유해를 도굴하였는데, 이슬람교도가 혐오하는 돼지고기 속에 유골을 숨겨 발각되지 않았다. 성 마르코의 유해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베네치아로 옮겨지면서 베네치아 도제는 성 마르코를 베네치아의 새로운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이에 따라 마르코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한 새로운 성당의 건축이 결정되었다. 참고로, 베네치아에서의 안장 당시 유해 근처에서 맡아졌다고 기록된 특이하고 강한 향, 대성당 모자이크의 유골이 아닌 비교적 온전한 시신 형태의 유해 묘사 (이는 유해 이동과 안장을 묘사한 후대의 기록화들에도 나타나며, 종교화적 허용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유해를 침수 피해 방지를 위해 오늘날의 위치인 주제대(high altar)로 재안치하는 과정에서 유해를 직접 목격한 Leonardo Conte Manin의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에 따르면, 유해는 본래 미라화된 상태로 존재하다 베네치아로의 안장 이후 세월과 환경에 의해 점차 유골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2]국제적인 무역항이라서 해외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베네치아는 새 성당의 구조를 당시 일반적인 라틴 십자가 평면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사도 대성당[3]을 모방하여 그리스식 십자가 평면으로 결정하고 거대한 돔 5개를 십자가 가운데에 하나, 십자가의 4개 곁가지에 각 하나씩 배치하였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건설은 832년에 마무리되었으나 976년에 일어난 폭동으로 소실되고 978년에 재건된 후, 1063~1094년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베네치아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아니라 도제의 개인 성당으로 사용되었던 산마르코 대성당은 1807년에 이르러서야 주교좌 성당으로 바뀌었다.
2.2. 베네치아 부의 상징
오랜 세월에 걸쳐 대성당이 건설되는 동안 나르텍스와 정면이 새로 추가되고 납을 입힌 목조 돔 지붕이 올라갔지만 무엇보다도 내부와 외부의 모자이크가 대성당의 백미를 장식했다. 약 8,000㎡에 달하는 공간에 황금과 청동, 유리, 기타 값비싼 광석을 사용해 눈부시게 빛나는 모자이크는 비잔틴과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예수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2.3. 전리품 혹은 약탈품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함락시킨 십자군은 막대한 재화와 보물들을 약탈했고, 약탈품들은 베네치아로 흘러들어왔다. 이때 유입된 유물의 일부가 산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대성당의 내부에 깔린 대리석 판석들도 하기아 소피아에서 이때 뜯어온 것들이다. 이때문에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대리석 판석들과 조각상들이 대성당 자체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경우가 많다.콰드리가(La Quadriga) | |
청동으로 제작된 4마리의 말 조각상이다. '콰드리가(quadriga)'란 고대 로마 시대에 전차경주 때 사용된 4두 2륜 전차를 뜻하는 단어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콰드리가는 원래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때 그리스의 히오스 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져온 것으로, 수도의 대전차경기장 히포드로무스(hippodromus)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약탈당해 베네치아로 옮겨졌으며, 1254년부터는 산마르코 대성당의 정면 위쪽 테라스에 놓여 '산마르코의 말(Cavalli di San Marco)'로 둔갑했다. 6백년 가까이 산마르코 광장을 내려다 보던 콰드리가는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해 파리로 옮겨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8년 자신이 그동안 거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루브르 궁전의 안뜰인 카루젤 광장 중앙에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을 세웠는데,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약탈한 콰드리가를 이 개선문 윗부분에 올려놓았다. 나폴레옹이 패망한 후 1815년에 베네치아로 돌아온 콰드리가는 다시금 대성당을 장식해 1980년대 초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가속화 된 대기오염으로 인해 청동이 부식되는 등 손상이 심해지자 유물 보호를 위해 복제품(왼쪽 사진)으로 교체하고 진품(오른쪽 사진)은 산마르코 대성당 내부 2층의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콰드리가 진품이 전시된 곳 성당 2층에서는 황금빛 프레스코화를 굉장히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 |
사두정의 네 황제들(The Tetrarchs) | |
이집트산 자주색 반암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293년부터 313년까지 이어진 제1차 사두정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와 부제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묘사한 것이다. 원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필라델피온 궁전에 있었으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약탈해왔다. 약탈당할 때 발 한 쪽이 깨져 사라졌는데, 20세기에 들어와 기적적으로 튀르키예에서 사라졌던 그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에 베네치아에서 발 조각을 돌려(?)달라고 하자 튀르키예에서는 발 조각만이라도 갖고 있겠다며 베네치아의 요구를 거부해 현재 튀르키예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
팔라 도로(Pala d'Oro) | |
높이 2.21m, 너비 3.34m인 팔라 도로는 이탈리아어로 '황금 장막'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제단의 장식으로 전면에 거는 안테펜디움(Antependium)이었지만 현재는 산마르코 대성당의 내진에 봉안되어 있다. 팔라 도로는 위쪽과 아래쪽이 결합된 형태인데, 976년 프에트로 1세 오로세올로의 명령으로 동로마 제국에서 온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로 아래쪽 부분은 1102년 제34대 도제 오르델라포 팔리에르(Ordelaffo Falier)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방에 주문한 것으로 복음사가 마르코의 일생, 베네치아 도제의 초상화, 옥좌에 앉은 전능하신 그리스도(Pantocrator) 등의 형상이 법랑으로 묘사되어 있다. 위쪽 부분은 대천사 미카엘 등을 묘사했는데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약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43년 제54대 도제 안드레아 단돌로(Andrea Dandolo)는 아래쪽과 위쪽 두 부분을 하나로 합쳐 고딕 양식의 황금 골조를 바탕으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진주, 자수정 등의 보석 1,927개를 박아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안드레아 단돌로는 화가 파올로 베네치아노(Paolo Veneziano)에게 팔라 도로를 가리는 제단화 패널을 그리도록 명령해 교회의 전례가 거행될 때만 패널을 열어서 대중이 팔라 도로를 볼 수 있게 했다. 파올로 베네치아노가 그렸던 제단화는 15세기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교체되었고, 오늘날에는 항상 열어놓고 있어서 전례가 없더라도 언제나 팔라 도로를 구경할 수 있다. |
3. 건축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비잔틴 양식의 성당이지만 외관이 상대적으로 수수했던 탓에 13세기에는 새로운 배랑(Narthex)이 지어지면서 화려한 고딕 풍의 정면으로 탈바꿈하였으며 기존의 돔 위에 높은 목조 돔을 추가로 건설하여 화려하게 만들었다. 내부의 인테리어 장식은 시대에 따라 계속 추가되었지만 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된 비잔틴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구조도 크게 변한 것은 없다. 벽돌이 기본 재료지만 마감재로 덮여있어 보이진 않는다. 중앙에 큰 돔을 가진 하기아 소피아와 달리 산마르코의 평면은 각 부분에 비슷한 크기의 4개의 돔을 가진 그리스 십자가의 형태다.3.1. 나르텍스
3.2. 중앙 건물
사진 | 설명 |
성령강림 돔(La Cupola della Pentecoste) 성령강림 돔은 예수의 승천 후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진 사건을 나타낸다. 돔의 중앙부 옥좌에 있는 비둘기로부터 뻗어나오는 성령을 받은 12사도들은 세계 각지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복음이 전파될 지역들은 돔 아래쪽 창문들 사이에 인물 한쌍씩 총 16쌍으로 그려져 있다. 의인화되어 나타난 지역과 민족은 사도행전 2장[4]에 묘사된 대로 파르티아(PARTHI)·메디아(MEDI)·엘람(ELAMIT)·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유대(IVDEA)·카파도키아(CAPPADOCIA)·폰토스(PONTVM)·아시아(ASIATICI)·프리기아(FRIGIA)·팜필리아(PAPHILIAM)·이집트(EGIPTVM)·리비아(LIBIAM)·로마(ROMANI)·유대인(IVDEI)·크레타(CRETES)·아랍(ARABE)이다. | |
주님 승천 돔(La Cupola dell'Ascensione) | |
남쪽 교차랑 | |
북쪽 교차랑 | |
내진 |
3.3. 보물실
4. 기타
- 성당과 베네치아, 그리고 성 마르코와의 흥미로운 관계가 하나 있는데, 먼저 베네치아는 총대주교좌가 명예상, 명목상 존재한다. 실제로 추기경과 동급의 대주교좌이다. 이런 이유를 전부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한데, 이 베네치아 총대주교는 원래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였는데 거긴 고대도시로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들어오면서 파괴되고 지금은 만명도 채 안사는 작은 마을로 전락했다.[5] 그러다보니 일대에서 가장 큰 베네치아에 총대주교좌가 넘어온 것인데, 이 총대주교좌가 위치한 성당이 바로 이 산마르코 대성당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베네치아는 랑고바드르족에게 파괴된 아퀼레이아 유민들이 석호로 피신하여 세운 도시고, 로마제국 시기 아퀼레이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한 사람이 성 마르코이다. 또한 성 마르코는 베네치아 상인들이 그의 유골을 훔쳤던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총대주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그가 세운 교회의 성도들의 후손들이 그의 유해를 모시고 와서 대성당을 짓고, 또 그가 세운 교회의 성직자들이
자칭해서 시작되었지만총대주교로명목상인정받고 그 대성당에 자리한 것이다. 베네치아인들이 어디까지 알고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돌고 돌아 성 마르코의 유해와 그의 후계자가 모두 한데 모인 셈.[6] - ARIA에서는 미즈나시 아카리만이 알고 있는, 산마르코 광장이 잘 내려다 보이는 비밀장소가 있는 곳으로 나온다.
- 극장판 유희왕 시공을 초월한 우정에서는 산마르코 광장과 함께 유우키 쥬다이가 패러독스와 싸우는 격전지로 등장한다.
- 어쌔신 크리드 2의 지역에 베네치아가 나오는 만큼 당연히 등장한다. 두체의 집무실인 두칼레 궁전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만큼 항상 경계 태세 상태이며, 지붕에는 암살자의 무덤 중 하나가 숨겨져 있다.
- 장국의 알타이르에서는 베네딕크 공화국에 위치한 물의 신전으로 나온다.
- 문명 4의 모드 Rise of Mankind - A New Dawn에서는 보유한 모든 도시에 무료 시장을 건설하는 미친 효과로 등장한다.
- 탤런트 서유정이 문화재인 성당 앞 사자상 앞에 올라탄 후 인증샷을 올려 논란이 된 적 있다.
- 한국어로 안내되는 '오디오 가이드 수신기'가 5유로에 대여 가능하다. (2021년 기준)
[1] 돔 한정[2]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몇몇 고고학적 발굴 및 역사적인 정황을 근거로 이 유해가 사실 성 마르코의 이름 아래 보존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생애의 무덤 항목 참조.[3]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하기아 소피아 다음으로 큰 성당이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테오도라 여제에 이르는 황제와 황후 26명이 안장된 황실 영묘이기도 했다. 산마르코 대성당의 모체가 된 성 사도 대성당은 1453년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된 직후, 오스만이 파티흐 모스크를 건설하면서 모스크로 향하는 길을 내기 위해 파괴되었다.[4]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사도행전 2장 1-12절)[5] 로마제국 당시에는 로마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였다고 한다.[6] 참고로 로마만이 베드로의 유해와 베드로의 후계인 총대주교좌(교황)이 한 장소에 있다. 정교회의 최고수장이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조차도 초대 총대주교로 보는 안드레아의 유해가 그리스에 있다. 물론 성 마르코를 진짜 초대 총대주교로 보는 알렉산드리아에 유해가 원래 있었긴 했다. 물론 역사가 어떻게 흘렀을지는 모르지만. 어찌됐건 베네치아에서 다시 갖춰진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