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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5:33:59

사카구치 히로노부

사카구치 히로노부
[ruby(坂口, ruby=さかぐち)][ruby(博信, ruby=ひろのぶ)] | Hironobu Sakaguchi
파일:1200px-Hironobu_Sakaguchi_-_Tokyo_Game_Show_2006.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62년 11월 25일 ([age(1962-11-25)]세)
이바라키현 히타치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요코하마국립대학 공학부 전자정보공학부 (졸업)
직업 게임 개발자, 게임 제작자, 게임 프로듀서,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소속 스퀘어(불명~불명)
미스트워커(불명~)
가족 딸 사카구치 아야

1. 개요2. 스퀘어 시절3. 스퀘어 퇴사 이후4. 작품 특징5. 제작한 작품(일부)
5.1. 스퀘어5.2. 미스트워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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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로 유명한 전직 스퀘어의 개발자. 속칭 '파이널 판타지의 아버지'.

스퀘어의 부사장이자 스퀘어 LA(스퀘어 USA)의 사장이기도 했다.

2. 스퀘어 시절

학생 시절엔 밴드 활동을 했으며 음악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엔 파칭코[1], 밴드를 하면서 거의 놀면서 지냈고 요코하마국립대학에도 그냥 가보고 싶어서 간 것이라고 한다. 공부하러 간 게 아니라 대학 때도 거의 놀러다녔다고 한다.

친구 타나카 히로미치와 함께 스퀘어의 황금기를 이룬 인물이다. 이 둘은 대학 동창이기도 하다. 서로 "아 이놈은 공부하기 싫은 놈이구나."라는 느낌이 와서 친해졌다고 한다.[2] 타나카 히로미치가 위저드리를 시켜줘서 해봤는데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게 있구나 라는 충격을 받고 이런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울티마 시리즈도 좋아했다고 한다.

요코하마국립대학 공학부 전자정보공학부에 재학 중, 일을 배울 겸 비정규직으로 덴유샤(電友社)라는 전선(전깃줄) 제조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 회사의 소프트웨어 개발부에서 컴퓨터 어드벤처 게임을 만든다며 사카구치에게 시나리오를 쓰라고 명령해 엉겁결에 동창이자 회사 동료인 타나카 히로미치와 함께 게임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이 덴유샤 소프트웨어 개발부의 부서명이 스퀘어였으며 게임 제작 회사인 스퀘어(현 스퀘어 에닉스)의 전신이다. 이 게임이 스퀘어 최초의 게임인 'WILL - Death Trap'이다.

원래 평범한 회사원을 지망하던 사카구치였으나 의외로 소프트웨어 제작이 적성에 맞았던지 속편인 WILL - Death Trap 2, 세 번째 어드벤처 게임인 알파의 개발에도 참여해 시나리오를 썼다.

당시 일본 컴퓨터 게임은 어드벤처 게임과 단순한 슈팅 게임 위주였고 사카구치도 그런 쪽 일에 손을 댔지만[3] 에닉스가 스케일이 큰 롤플레잉 게임드래곤 퀘스트를 출시하자 사카구치가 그것을 하고 감명을 받아 드래곤 퀘스트를 능가하는 RPG를 제작하겠다고 표명했으며 그 결과가 바로 파이널 판타지였다. 다만 똑같은 게임을 내면 성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기본은 드래곤 퀘스트와 같지만 기본 외에는 전부 다르게 만든다."라는 컨셉을 내었다.

사카구치는 파이널 판타지부터 파이널 판타지 V까지 실무 게임 개발진을 총괄하는 직책인 디렉터의 자리에서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리고 파이널 판타지 IV를 발매한 이후 스퀘어의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중에서는 1, 3, 5가 특히 사카구치 자신의 색이 강하다고 한다. 2는 카와즈 아키토시, 4는 토키타 타카시, 6, 7은 키타세 요시노리 색이 강한 작품이라고 한다.

파이널 판타지 V를 출시한 이후에는 실무 개발진인 디렉터에서는 물러나고 보다 고위직인 프로듀서로 전향해서 직접적인 게임 개발에서는 손을 떼 게임 개발진 구성과 운영, 기획, 관리를 맡게 된다. 우선은 로맨싱 사가 2에서 서브 프로듀서[4]로 제작에 참가한 뒤, 파이널 판타지 VI, 파이널 판타지 VII, 파이널 판타지 택틱스, 슈퍼 마리오 RPG, 패러사이트 이브에서 메인 프로듀서를 맡는다. 프로듀서는 게임 개발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는 건 아니지만 게임 개발진을 구성하고 게임 개발을 관리하는 고위직인 만큼 인재를 보는 눈이나 스케줄을 짜는 능력과 같은 역량을 필요로 하는데 사카구치는 디렉팅뿐만 아니라 프로듀싱에도 재능이 있었던 건지 그가 프로듀싱을 맡은 작품들도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명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사카구치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을 맡은 작품들은 상술한 작품들이 전부지만, 총괄 프로듀서라는 직책으로 스퀘어의 게임 대부분 감수에 관여하기도 했다. 총괄 프로듀서라는 직책은 보통은 사장이 이름을 올리는 직책으로, 사장급의 인사이기에 게임 개발에 실질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거의 없는 직책이지만 부하 직원들이 대체 무슨 게임을 만들고 있고 그게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최소최저한의 감수'만큼은 하는 직책이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직책이다. 최소최저한의 감수인지라 그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어찌 되었든 당시 스퀘어 게임들의 '최종 감수'를 사카구치가 담당했다는 것.

파이널 판타지 7 이후의 작품은 직접 손대진 않았지만 프로젝트의 컨셉이나 인선을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퇴사 후에도 그가 손댄 작품이 나왔다. 11을 온라인 게임으로 하자고 한 것도 사카구치였고, 12 디렉터로 마츠노 야스미를 임명한 것도 사카구치였다. 다만 게임 내용엔 딱히 손댄 게 없었으며 그때 자신은 파이널 판타지: 더 스피릿 위딘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8 이후의 작품은 사카구치 작품을 오마주한 9을 제외하면 사카구치 특유의 작품색이 약하다. 정리하면 사카구치가 직접 제작한 것은 7, 간접적으로 손댄 건 12가 마지막이다.

크로노 트리거를 출시할 때쯤에는 스퀘어 LA(스퀘어 USA의 전신)을 설립하고 사장직에 취임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사카구치는 2001년에 개봉한 영화 파이널 판타지: 더 스피릿 위딘의 감독을 맡은 것으로 인해 몰락했다. 제작비 170억 엔에 극장 수입 50억 엔이라는, 이 영화의 초대형 쪽박으로 인해 스퀘어 수뇌부가 물갈이되는 참사가 일어났고 사카구치도 이로 인해 책임을 지고 스퀘어를 퇴직하게 된다. 이 때문에 스즈키 유, 빌 로퍼, 리처드 개리엇 등과 함께 게임계의 먹튀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3. 스퀘어 퇴사 이후

스퀘어 퇴사 이후에는 미스트워커라는 개발사를 창립해 프로듀서로서 게임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사카구치가 디렉터를 맡아 직접 게임을 개발한 작품은 '라스트 스토리'가 유일하며, 그 외의 작품은 프로듀서 겸 시나리오 라이터[5]로 게임 개발에 관여했다. 상술한 것처럼 프로듀서는 디렉터하고는 달리 직접 게임을 개발하는 실무진은 아니지만 게임 개발진을 구성하고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책임자이다.

처음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세컨드 파티 정도 되는 위치에서 Xbox 360용 타이틀을 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카구치에게 블루 드래곤과 로스트 오디세이라는 두 대작의 제작비를 지원했다. 블루 드래곤과 로스트 오디세이는 강수진 등의 유명 성우를 기용한 완벽한 한글화로 많은 유저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나마 블루 드래곤은 여러 스핀오프 작품이 출시될 정도로 어느 정도는 흥행했지만 두 작품 다 과거 스퀘어의 명작들이나 마이크로소프트가 기대한 만큼의 좋은 결과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Xbox 360용으로 멀쩡하게 개발 중이던 '크라이온'이란 타이틀이 개발 중지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MS와 결별했다는 루머도 들려오는 등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에는 닌텐도 기종으로 블루 드래곤의 스핀오프작을 포함해 여러 작품을 제작했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가 사카구치가 디렉터로서 오랜만에 복귀에 라스트 스토리란 게임을 제작했다. 사카구치가 거의 20년 만에 디렉터로서 직접 게임을 제작하거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음악을 전담했던 거장 우에마츠 노부오가 게임 작곡을 맡는 등 개발진 구성에서부터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게임 발매 뒤 평가도 꽤 괜찮은 편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판매량은 대실패였다.[6]

그 후, 사카구치는 2019년 Apple WWDC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 Apple의 지원 아래 새 게임을 개발하고 있다고 발표했고, 2021년 4월에 Apple Arcade 독점으로 판타지안을 출시했다. 파이널 판타지 VI를 다시 해보면서 파이널 판타지 VI 같은 작품을 다시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개발을 시작했다고 하며, 지속된 실패 때문인지 이번에도 실패하면 차라리 접겠다란 일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7][8] 그리고 어마어마한 돈을 쥐고 있는 Apple의 엄청난 지원으로 우에마츠 노부오가 다시 OST를 담당했고, 100명이 넘어가는 디오라마 장인들을 불러내 150개가 넘는 초대형 디오라마들을 제작해 전 스테이지를 구현하는 등 엄청난 스케일의 게임을 선보여 화제가 되었고 두 파트로 계획되어 한 파트만 출시했음에도 IGN에서 9점, 메타크리틱에서 80점을 기록하며 호평을 받는 데 성공해 슬럼프를 극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작품 활동과 별개로, 본인이 스퀘어 에닉스의 작품과 의외의 인연이 생기게 되었는데, 바로 온라인 게임인 파이널 판타지 14에 푹 빠지게 된 것. 사카구치가 담당했던 파이널 판타지 구작들을 포함한 타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가 워낙 잘 되어있기도 해서 그런지 자기만의 대형 하우징을 지을 정도로 신나게 잘 노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14의 디렉터인 요시다 나오키와도 친분을 쌓게 된다. 덕분에 스퀘니 측이랑 스무스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2024년에는 십수 년 만에 스퀘어 에닉스와 협력해서 완전판인 판타지안 네오 디멘션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요시다 나오키가 스퀘어로 돌아오지 않겠냐고 권유해서 스퀘어와 다시 협력하게 되었다고 한다. 판타지안으로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판타지안의 반응도 좋고 새로운 구상도 떠올라 신작을 제작 중이라고 한다.

4. 작품 특징

인재를 보는 눈이 뛰어났다고 하며 신인이나 무경력자라도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면 중책을 맡겼다. 그래서 자신의 주전공과 다른 분야에 투입된 스태프가 많았다. 우에마츠 노부오[9], 이시이 코이치, 카와즈 아키토시, 키타세 요시노리[10], 노무라 테츠야[11], 토키타 타카시[12], 이토 히로유키[13], 타카하시 테츠야, 시부야 카즈코(渋谷員子)[14]가 대표적이다. 사카구치가 있던 당시의 파이널 판타지는 중핵 스태프가 전부 20 ~ 30대였다.[15] 시부야 카즈코 말로는 사카구치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뽑아서 파이널 판타지 팀에는 게임을 잘 모르거나,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신 사카구치가 게임광이라 게임으로서의 재미를 체크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유명 JRPG 제작자에 비해 유독 후계자라 할만한 인물이 많은 편이며 그가 손을 떼어도 파이널 판타지의 품질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때는 신인이 많았는데 일본 게임업계가 너무 늙었다."라고 하며 경력자 위주로 쓰는 업계를 비판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 탓에 미스트 워커 설립 직후엔 이 스태프가 다 빠지면서 게임 퀄이 확 나빠졌었다. 그나마 미스트 워커에서도 신인을 꾸준히 키워서 퀄이 많이 복원되었다.

직접 글을 많이 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스토리에 꽤 관여했다고 한다. 타나카 히로미치도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서 사카구치의 주 업무는 시나리오 체크였다."라고 증언했다. 예로 파이널 판타지 6도 티나 브랜포드로크 콜 스토리는 사카구치가 썼다고 한다.[16] 다만 혼자 다 만들면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다른 스태프가 내놓는 의견도 적극 채용한다고 한다. 사카구치의 문체는 장난기와 유머러스한 면이 있는데 특히 그가 깊이 관여했던 캐릭터인 바츠 클라우저, 로크 콜의 성격에서 드러난다. 파이널 판타지 7도 한동안 키타세 요시노리노무라 테츠야 주도로 후속 작품, 스핀오프가 나오면서 진지한 작품이란 이미지가 강해졌지만 원작은 사카구치도 손을 대 꽤 유머러스한 이벤트가 있었다.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이를 다시 살려냈다. [17] 스스로도 세계관을 창조해내는 작업에 특히 달성감을 느낀다고 한다.

게임을 만들 때 그래픽 퀄리티와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이는 "글로는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호리이 유지 씨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판타지는 환상적이기만 하면 뭘 해도 된다고 했으며 당시 판타지에선 잘 시도되지 않았던 스팀펑크, SF와 판타지의 융합을 시도했다. 다만 이것도 전부 본인 아이디어는 아니고 키타세 요시노리의 제안을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스태프가 내놓는 새로운 시도와 아이디어를 막지 않고 오히려 권장했다고 한다. [18]

지구 환경 보호에도 관심이 깊으며 가이아 가설에 근거해 환경 보호를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파이널 판타지에도 은유적으로 그러한 표현이 들어가며[19] 파이널 판타지 7은 아예 대놓고 그런 주장을 하는 작품이다.

어머니는 파이널 판타지 3 제작 때 화재 사고로 죽었으며 이것이 트라우마라고 한다. 그래서 그가 만든 작품은 [20] 재앙이나 공포가 화재로 표현되는 장면이 많다. 영혼과 환생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어 파이널 판타지에도 그러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많다. 예로 죽은 동료도 영혼이나 소환수 같은 것으로 남아 계속 플레이어 파티를 돕는다.

자신의 작품의 테마는 '생명'이라고 한다. 비록 사카구치는 퇴임했지만 사카구치의 제자인 키타세 요시노리, 노무라 테츠야, 이토 히로유키도 이런 사상에 동의한다고 하며 계속 생명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사카구치도 "후배들이 이 시리즈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잘 만들어주고 있다."라고 하며 자신도 이 시리즈를 계속 즐겨한다고 한다.

게임에 음성을 넣지 않을 때가 많다. 게임에 음성을 넣을 수 없던 시대에 게임을 만들어 그런 게 익숙해졌고 음성이 없는 편이 몰입감이 있고 플레이 템포를 플레이어가 조절하기 좋다고 한다. 10도 음성을 넣을 때 사카구치가 반대했었다고 한다.사카구치가 음성을 넣어서 만든 게임들은 흥행 실패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판타지안은 음성을 안 넣었다고 한다. 다만 판타지안 네오 디멘션을 만들면서 요시다 나오키가 "이제 게임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되었다."라고 주장해 다시 음성을 넣었으며 앞으로는 이를 따를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게임의 리메이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 시간과 자원으로 신작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파이널 판타지는 리메이크가 많지만 그건 후배들의 의향이 더 많이 개입되었다. 그래서 미스트 워커 개발 게임은 요시다 나오키가 대신 리메이크 작업을 해 주겠다고 해서 리메이크가 성사된 판타지안 네오 디멘션을 제외하면 현행 기종으로 즐길 수 있는 법이 없다.

타나카 히로미치 말로는 사카구치는 다른 사람이 안 말리면 자기 게임에 꼭 할아버지 캐릭터를 넣는다고 한다. 왜 그렇게 할아버지 캐릭터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5. 제작한 작품(일부)

5.1. 스퀘어

5.2. 미스트워커

6. 기타



[1] 당시엔 기계식이라 무조건 따는 방법이 있어 그걸 할 수 있던 사카구치는 돈이 넘치는 학생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2] 타나카 말로는 대학 때 사카구치는 아프로 머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3] 그 시류에 편승해서 만든게 데스트랩 시리즈알파다.[4] 메인 프로듀서는 미즈노 테츠오.[5] 사실 스퀘어 시절에도 어느 정도 시나리오에 조예가 있다는 모습을 보여줬다. 스토리에서 큰 호평을 받은 파이널 판타지 VII패러사이트 이브의 시나리오 원안을 제작한 게 바로 사카구치이기 때문. 사실 디렉터라는 직책이 원래부터 게임 개발진을 총괄하는 직책이다 보니 시나리오 라이터에게 어떤 시나리오를 쓰라고 지시하거나 작업해온 시나리오를 뜯어고치는 역할도 맡고 있어서 디렉터에게 시나리오에 대한 감이 전혀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된다. 참고로 사카구치의 후임으로 파이널 판타지를 담당하게 된 키타세 요시노리파이널 판타지 VI에서 메인 시나리오 라이터를 맡고 이후 작품에서도 가끔 서브 시나리오 라이터를 맡는 등 시나리오에 대한 조예를 보여줬다.[6] 참고로 6년 뒤, 세가가 이 라스트 스토리와 매우 유사한 게임인 푸른 혁명의 발큐리아를 만들었는데, 사카구치의 라스트 스토리가 대실패를 했다면 이보다 나은 게임을 만들어도 성공할까 어떨까 애매한 마당에 6년이나 지났으면서 오히려 라스트 스토리보다도 못한 희대의 쿠소게로 나왔다. 서로 회사도 개발자도 다르지만 비슷한 두 개의 게임이 전부 다 실패했기 때문에 당분간 라스트 스토리 같은 게임은 보기 힘들 듯.[7] 재미있는 것은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도 이번에도 실패하면 게임 개발자 일을 포기할 각오로 만들었다고 하며, 이름도 그런 이유로 파이널 판타지로 정해진 것이었다.[8] 다만 이번에도 디렉터는 아니고 프로듀서 겸 시나리오 라이터로 제작에 참가했기 때문에 사카구치 본인이 직접 게임 개발을 지휘한 건 아니다. 프로듀서가 된 이후 (파이널 판타지 VI을 포함해서) 사카구치가 직접 현장에서 게임을 제작한 건 라스트 스토리가 유일하다.[9] 한량으로 지내던 우에마츠를 능력만 보고 채용했다.[10] 키타세는 게임 제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영화학도였는데 그가 보낸 단편 영상을 보고 재능이 있다고 판단해 채용하고 중책을 맡겼다.[11] 노무라는 원래 그래픽 담당이었는데 사카구치는 노무라가 스토리도 잘 쓴다는 걸 알고 스토리도 맡겼다.[12] 토키타도 그래픽 쪽 스태프였으나 스토리를 담당하게 되었다.[13] 원래 효과음, 디버그 담당이었는데 파이널 판타지 4의 ATB 시스템, 파이널 판타지 5의 어빌리티 시스템을 고안했고 사카구치가 이를 승인했다. 사카구치 말로는 이토는 알고보니 시스템 고안의 천재였다고 한다.[14] 1 ~ 6의 도트 그래픽 담당. 게임에 대해 전혀 모르고 도트를 찍어본 적도 없지만 재능만 보고 채용했다고 한다.[15] 사카구치가 파이널 판타지를 처음 만들기로 했을 때 나이가 24세였다. 다른 스태프는 우에마츠 노부오를 제외하면 그거보다 어렸다.[16] 다른 캐릭터는 각자 담당자가 있었다.[17] 7 리메이크 스태프가 제작 전에 원작을 다시 해봤는데"어? 이렇게 유머러스한 이벤트가 많았던가? 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이를 반영하게 되었다고 한다.[18] 노무라 테츠야는 "파이널 판타지에서 꼭 지켜야 하는 게 뭡니까?"라고 사카구치에게 물었을 때 "인터페이스랑 대사창만 파란색이면 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것 말곤 다 해도 된다는 것이다.[19] 인간이 크리스탈을 파괴하거나 크리스탈의 힘을 남용해서 땅이 썩고 물과 공기가 더러워졌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환경오염을 은유한 것이다.[20] 어머니가 죽은 뒤 나온 4부터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21] 그래서 대담 방송 같은 걸 할 때는 영상 통화로 참가할 때가 많다. 하와이에서 영상 통화하는 것이다.[22] 농담이 아니고 진짜 자기장이 달라서 다른 나라 브라운관 TV 같은 건 하와이에서는 자기장에 망가지므로 전용 제품을 써야한다고 한다.[23] 산죠 리쿠 말로는 토리시마는 파이널 판타지는 너무 어려워서 하다가 중간에 접은 일이 많았으며 평소 "파이널 판타지는 너무 어려워서 히트할 수 없다!"라고 하고 다녔다고 한다. 산죠는 오히려 그래서 더 재밌다고 했으며 "토리시마 씨 실력으로는 파이널 판타지 3 마지막 던전은 못 깰 것 같군요."라고 도발했더니 억지로 3를 다 깨고 와서 파이널 판타지 3 욕을 했다고 한다. "이 망할 던전은 왜 세이브 포인트가 없냐!"라고 했다고 한다.[24] 첫 대면 때 대뜸"사카구치 군 반갑네. 지금부터 내가 파이널 판타지 3의 어디가 틀려먹었는지 말해주겠네."라고 장황한 비판을 해서 사카구치는 "하아? 뭐야 이 아저씨?"라고 생각했다고 한다.[25] 파이널 판타지 4는 캐릭터의 대사와 행동이 풍부해졌다. 그리고 시리즈 중에서도 어려운 작품이긴 하지만 세이브 포인트를 이곳저곳 넣어놔서 리트라이하기 좋게 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