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미 히피아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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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팀 | ||||
| 클럽 | ||||
| 37대 | 35대 | |||
| 핀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
| 야리 리트마넨 (1996~2008) | ▶ | 사미 히피아 (2008~2010) | ▶ | 페트리 파사넨 (2010~2011) |
| 리버풀 FC 주장 | ||||
| 제이미 레드냅 (1999~2001) | ▶ | 사미 히피아 (2001~2003) | ▶ | 스티븐 제라드 (2003~2015) |
| 바이어 04 레버쿠젠 주장 | ||||
| 베른트 슈나이더 (2008~2009) | ▶ | 사미 히피아 (2009~2011) | ▶ | 지몬 롤페스 (2011~2015) |
| 사미 히피아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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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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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팀 | ||||
| | 1999-00 · 2001-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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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미 히피아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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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란드의 前 축구 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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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eee><colcolor=#000> 이름 | 사미 히피아 Sami Hyypiä | |
| 본명 | <colbgcolor=#fff,#191919>사미 투오마스 휘피에 Sami Tuomas Hyypiä | |
| 출생 | 1973년 10월 7일 ([age(1973-10-07)]세) | |
| 핀란드 포르보 | ||
| 국적 | | |
| 신체 | 키 195cm | |
| 직업 |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 |
| 소속 | <colbgcolor=#eee><colcolor=#000> 선수 | 쿠산코스켄 쿠무 (1977~1988 / 유스) 팔로 페이코트 (1989) 쿠산코스켄 쿠무 (1990~1991) 뮐뤼코스켄 팔로−47 (1992~1995) 빌럼 II (1995~1999) 리버풀 FC (1999~2009)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9~2011) |
| 감독 | 핀란드 대표팀 (2011~2012 / 코치) 바이어 04 레버쿠젠 (2012~2014)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2014) FC 취리히 (2015~2016) FC 하카 (2020 / 코치) | |
| 국가대표 | 105경기 5골[1] (핀란드 / 1992~2010) | |
1. 개요
핀란드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이었다.2. 클럽 경력
2.1. 경력 초기
1992년, 베이카우스리가의 뮈파에 데뷔하면서 어린 나이에 주전 자리를 확보하였으며, 2번의 컵 우승에 공헌하는 등 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1995년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빌럼 II로 이적해 네 시즌 동안 주전으로 뛰면서 훌륭한 활약으로 빌럼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2. 리버풀 FC
이후 1999년 여름, 이적료 260만 파운드에 리버풀로 이적했다. 처음에는 다소 무명의 커리어에 의해 큰 기대를 받지 못했지만 이후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 잡으며 팀의 주축으로 떠올랐다. 1999-00 시즌 스위스 출신의 스테판 앙쇼와 함께 당대 리그 최고의 통곡의 벽을 이루며 절륜한 센터백 파트너십을 형성했다. 시즌 종료 후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2000-01 시즌에는 FA컵, UEFA컵, UEFA 슈퍼컵 우승을 견인하며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2000-01 ESM 올해의 팀과 2001 UEFA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등 유럽 내 최고 수준의 센터백 중 하나로 성장했다. 해당 시즌부터 부상으로 빠져있던 제이미 레드냅을 대신해 로비 파울러와 함께 팀의 주장 완장을 찼다. 시즌이 끝난 뒤 핀란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2001-02 시즌에는 팀과 함께 FA 커뮤니티 실드를 우승했고, 이후 팀의 정식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꾸준하게 활약을 펼치면서 2002년과 2003년에도 핀란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2003년 스티븐 제라드에게 주장직을 넘겼다.
2002-03 시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에서 루드 반 니스텔루이의 유니폼을 잡아당겼다는 판정에 의해 리버풀 커리어 내 유일한 레드카드를 받았다.
2004-05 시즌부터는 라파 베니테스 감독이 이전까지 좌우 풀백 유틸리티 자원으로 주로 활용되던 제이미 캐러거를 센터백으로 기용하면서 새로운 센터백 파트너십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 FC, 첼시 FC 등을 꺾고 결승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캐러거와 구축한 단단한 수비 라인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8강 1차전 유벤투스를 만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공중볼로 압도함과 동시에 득점까지 기록하면서 팀의 4강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결국 해당 시즌 팀과 함께 이스탄불의 기적을 완성하며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2005-06 시즌에는 부주장직까지 캐러거에게 넘겨주었다.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캐러거와 리그 최소 실점을 이끌었다. 이후 2006년 FA컵 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에서 실축했지만 결국 대회 우승을 이뤘다. 2006-07 시즌에는 다소 전성기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계속해서 수비진의 주축으로 뛰며 리그 최소 실점 2위 기록을 만들었다.
2007년에는 기량이 다소 떨어지면서 다른 팀과의 이적설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계약 기간까지 리버풀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2007년 8월 25일, 선덜랜드 AFC와의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3일 후 챔피언스 리그 툴루즈 FC 전에 곧장 출전하여 주장 완장을 차고 득점까지 올리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2008년 4월, 1년 연장 계약을 체결하면서 2009년 여름까지 팀에 남게 되었다. 남은 계약 기간 동안 다니엘 아게르, 마르틴 슈크르텔 등의 젊은 센터백들에게 튜터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마지막 경기에서 눈물을 흘리는 히피아 | |
리버풀에서 10번째 시즌인 2008-09 시즌을 끝으로 리버풀을 떠나게 되었다. 토트넘과의 시즌 최종전에서 스티븐 제라드와 84 교체되어 투입되며 팬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홈 팬들도 해당 경기 'SAMI'라는 카드섹션을 펼치며 레전드와의 이별을 기념했다. 리버풀에서 이 시즌에 잠깐 뛰다 친정팀 토트넘으로 돌아간 토트넘 주장 로비 킨 역시 존경을 표하며 마지막 경기를 축하했다.
리버풀에서 10년 동안 464경기에 출전해 35골을 넣으며 10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인상적인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3.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9년 여름, 독일 분데스리가의 바이어 레버쿠젠과 계약했다. 그리고 36살의 노장에도 불구하고 절륜한 수비력으로 후배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었고, 키커가 선정한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2010-11 시즌 중 은퇴를 발표하면서 시즌이 끝나고 레버쿠젠의 코칭 스태프에 합류한다고 밝혔으며, 2011년 5월 2일, 프로 경력을 마무리했다.
3. 국가대표 경력
핀란드 연령대 대표부터 시작하여 U-21 시절 3년간 27경기 3골을 기록하며 핵심 선수로 활약해왔다. 이후 1992년 11월 7일, 튀니지와의 친선 경기를 통해 19살에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고, 곧 핵심 멤버로 거듭났다.그가 전성기였을 당시, 자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스타 야리 리트마넨를 필두로 안티 니에미, 요나탄 요한손[2] 등 유럽 빅리그에서 굵직하게 활약했던 선수들이 있었으나 대한민국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 만큼 힘들다는 월드컵 및 유로 유럽 지역예선에서 번번히 고배를 마시며 2010년 국가대표에서 은퇴할 때까지 단 한번도 국제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의 명성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3]
또한, A매치 100경기 이상 출장자로 핀란드 대표 소속으로 센추리 클럽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4. 지도자 경력
2012년부터 2014년까지[4]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감독을 맡았으나, 2014년 4월 5일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되었다. 4위까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할 수 있고[5] 5~7위는 유로파 리그로 밀려나는데 5, 6위와의 차이가 적어서 챔스 진출권이 위험하긴 했다. 게다가 챔스에서의 성적이 워낙 안 좋았다. 단적인 예로 챔스 예선에서 맨유한테 2경기 총합 9:2라는 경악스런 점수차로 관광당했는데 문제는 퍼거슨 시절의 맨유가 아닌 모예스 감독의 그 암울한 맨유한테 졌던 게 큰 문제. 구사일생으로 16강을 가긴 했으나 이번엔 파리 생제르맹을 만나서 2경기 총 스코어 1:6이라는 졸전 끝에 떨어졌다. 게다가 전술도 매우 단조롭고 별 특징이 없었던 것도 원인이라면 원인. 시즌 내내 주야장천 433만 써먹었다. 사미 휘피애의 해임 후 로저 슈미트가 레버쿠젠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2014년 6월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18경기에서 1승만 기록하는 최악의 성적 부진으로 팀을 강등권으로 밀어넣고 시즌 도중에 경질되었다.2015년 8월 21일, 스위스 슈퍼 리그의 취리히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2016년 5월 12일, 취리히가 3경기를 남겨둔 채 꼴찌에 머물자 잘렸다. 결국 취리히는 26년 만에 강등되었다.
5. 플레이 스타일
193cm의 큰 신장과 단단한 체격으로 압도적인 고공 장악력을 자랑했던 센터백이다. 이에 붙은 별명이 핀란드의 빙벽. 좋은 피지컬을 가진만큼 공중볼 상황에서의 볼 처리와 대처 능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키가 큰 타켓형 공격수들을 번번히 압도하며 이름을 날렸다. 헤더를 통해 수비 상황에서 공중볼을 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공권을 살려 세트 피스 상황에서 득점을 곧잘 해내기도 했다.[6] 이에 비교적 신장이 작은 편인 제이미 캐러거와의 파트너십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중반 리버풀 수비진은 높이에서 상당한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제공권 뿐 아니라 태클과 대인 방어 실력도 뛰어났으며, 이에 상대 공격수들과의 힘싸움에서 쉽게 지지 않는 선수였다. 또한 박스 안에서 자리를 잡고 들어오는 볼 투입을 차단하는 센스와 노련함까지 더해져, 공중전과 몸싸움으로 유명했던 2000년대 초반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최고의 센터백 중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전방으로 뿌려주는 전진 패스의 퀄리티도 준수했으며, 프리미어 리그로 입성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주장 완장을 차기 시작했을만큼 경기장 안팎에서의 리더쉽도 뛰어난 선수였다. 이에 스티븐 제라드 이전에 리버풀 FC의 위대한 주장 계보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교적 느린 속도가 약점으로 지적받았으나, 압도적인 피지컬과 뛰어난 판단력, 정확한 위치 선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단점이 크게 드러나는 유형의 선수는 아니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뮐뤼코스켄 팔로−47 (1992~1995)
- 핀란드컵: 1992, 1995
- 리버풀 FC (1999~2009)
- FA컵: 2000-01, 2005-06
- 풋볼 리그컵: 2000-01, 2002-03
- FA 커뮤니티 실드: 2001, 2006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4-05
- UEFA컵: 2000-01
- UEFA 슈퍼컵: 2001, 2005
- 핀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 노르딕 풋볼 챔피언십: 2000-01
6.2. 개인 수상
- UEFA 올해의 팀: 2001
- PFA 올해의 팀: 1999-00, 2001-02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9년 11월
- VDV 11: 2009-10
- 키커 올해의 팀: 2009-10
- ESM 올해의 팀: 2000-01
- 리버풀 올해의 선수: 2001-02
- 핀란드 올해의 스포츠 인물: 2001
- 핀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99, 2000, 2001, 2002, 2003, 2005, 2006, 2008, 2009, 2010
- UEFA 어워드 100-캡: 2010
- IFFHS 올타임 핀란드 드림팀: 2021
6.3. 수훈
- 핀란드 라이온 기사: 2022
7. 여담
-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 시절 손흥민을 직접 함부르크 SV로부터 영입했고 항상 손흥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손흥민이 부진할 때도 끝없이 믿어주며 출전을 시켰었던 감독이다. 결국 손흥민도 부진을 극복한 후 자신을 믿어준 히피아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신태용,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와 더불어 든든한 힘이 되어준 감독들 중 한 명이다. 2018년 방한 후 인터뷰에서도 손흥민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손흥민이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으로 군면제가 된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2018년 9월 LFC world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루이스 가르시아, 제이슨 맥아티어와 함께 방한했다. 팬들과의 만남 등 다양한 행사에 참여했다.
- 1999년 11월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수비수로서 최초로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핀란드 빙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 굉장히 노안이다. 리버풀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던 2009년 기준으로 36세인데 짙은 이마주름과 팔자주름, 백발이 연상되는 밝은 금발의 머리라 현역 때도 감독같은 포스를 풍겼다.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마치 할아버지와 손주같은 분위기가 난다.
- 은퇴한지 무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한 스키 리조트에서 자신의 리버풀 시절 유니폼를 입고있는 팬을 목격했다. 이에 놀라고 감격한 히피아가 맥주를 들고 그 팬에게 접근, 그 이상으로 놀라고 흥분한 팬과 몇 시간이나 같이 수다를 떨었다고 한다.
- 사미 히피아가 리버풀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이면서 레전드급의 대우를 받고 있다보니, 핀란드 현지에서도 리버풀 FC를 응원하는 팬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사실, 한국에서도 박지성이 활약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하는 팬들이 정말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다.
- 2022년 6월, 핀란드 라이온 기사 작위를 받았다. #
[1] 핀란드 국가대표팀 역대 출장 3위[2] 1975년생 축구 선수로, 과거 스코틀랜드 1부리그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오랜기간 주전으로 뛰어 온 미드필더였다.[3] 이후 UEFA 유로 2020이 돼서야 핀란드 대표팀은 처음으로 국제 메이저 대회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다.[4] 2012-13 시즌에는 자샤 레반도프스키와 함께 공동 감독을 맡았고 2013-14 시즌에 단독으로 감독을 맡았다. 레반도프스키는 히피아가 경질되고 남은 시즌을 감독 대행으로 돌아와 다시 레버쿠젠을 맡았다.[5] 단, 4위는 최종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해야 진출 가능하다.[6] 대표적인 골이 2005년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유벤투스를 무너뜨린 선제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