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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00:10:55

부산 도시철도 1호선/역사

1. 개관2. 상세
2.1. 계획2.2. 1~3단계 공사와 개통2.3. 4단계 연장(신평 - 서대신)2.4. 5단계 연장(다대포해수욕장 - 신평)

1. 개관

파일:his_humetro_01_02.jpg파일:his_humetro_01_11.jpg
1981년 6월 23일 1단계 구간(노포동역~범내골역) 착공 1983년 7월 28일 2단계 구간(범내골역~중앙동역) 착공
당시 1985년 개통을 앞둔 부산지하철 1호선 시운전 영상 당시 1차 구간 개통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의 영상
파일:his_humetro_01_06.jpg파일:his_humetro_01_10.jpg파일:his_humetro_01_12.jpg
1985년 7월 19일 1단계 구간(범어사역~범내골역, 15.0km) 개통, 부산도시철도 최초 개통 1986년 12월 19일 범어사역~노포동역 1.2km 개통
파일:his_humetro_01_13.jpg
1987년 5월 15일 2단계 구간(범내골역~중앙동역, 5.4km) 개통[1]
파일:서대신역 1990년.jpg파일:his_humetro_02_05.jpg
1990년 2월 28일 3단계 잔여구간(토성동역~서대신동역, 1.9km) 개통 1990년 7월 24일 4단계 구간(서대신동역~신평역) 착공
파일:신평역 1994년.png파일:his_humetro_02_12.jpg파일:괴정역 승강장 1994년.jpg
1994년 6월 23일 4단계 구간(서대신동역~신평역, 6.4km) 개통
파일:his_humetro_03_11.jpg파일:external/imgnews.naver.net/PYH2017042040400005100_P2_20170420160406499.jpg
2009년 11월 20일 5단계 구간(신평역~다대포해수욕장역) 착공[2] 2017년 4월 20일 5단계 구간(신평역~다대포해수욕장역, 7.6km) 개통

2. 상세

2.1. 계획

파일:1970_BUSAN_RAILWAY_PLAN.png파일:his_humetro_01_25.jpg
1971년 부산지하철 건설 기본 계획안 1978년 부산지하철 건설 수정 계획안

1968년 일제강점기로부터 내려온 부산전차가 폐선된 후 부산의 대중교통은 버스가 유일하였다. 이 시기 부산은 직할시 승격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에 따라 교통정체와 대중교통 혼잡을 심하게 겪었고, 부산시 교통관련 공무원들은 새로운 대중교통으로 도시철도가 매우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도시철도 건설 반대가 너무 심했으며 심지어 당시 부산시장도 엄청난 예산 때문에 공사를 강하게 반대했었고, 서울 지하철을 뚫을 때도 그렇고 지하철 건설이 아닌 주요 간선도로 확장이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회의와 설득 끝에 부산시장의 최종 승인을 받아 1977년 지하철 건설을 확정지었다. 이 때 확정된 1호선은 구서IC공설운동장 간 22.5km 구간으로 부산전차의 노선과 유사했으며 노선 계획은 1979년 확정되었다. 범어사역 - 범내골역(1단계), 범내골역 - 중앙동역(2단계), 중앙동역 - 서대신동역(3단계) 구간으로 나뉘어 각각 1980년, 1983년, 1984년 착공되었다.

차량기지 부지는 당초 구서IC 인근으로 계획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노포동으로 확정되어 노선을 구서IC에서 더 나아가 노포동 차량기지까지 건설하기로 확정하였다. 확정과 동시에 중장기 계획으로 울산까지 연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노포차량기지에 연장선을 위해 공간을 남겨두고 있었다. 또한 차량기지가 들어설 노포동 지역 주민의 요구로 차량기지 옆에 노포동역을 추가하기로 하였다.

구체적인 노선을 결정할 때 동래, 남포동 인근의 노선과 관련해 실무진 간의 논쟁이 있었다. 바다간척해서 만든 매립지에 위치한 중앙동역, 남포동역의 공사 당시 시공법을 두고 연약지반 매립지라서 공사를 못하니 국제시장 앞 대청로 쪽으로 우회하자는 쪽과 황금노선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쪽으로 갈려 의견 충돌이 있었다. 결국 지중연속벽공법으로 중앙동역, 남포동역을 경유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동래 구간은 1971년 노선 선정 당시 중앙대로를 따라 구서동까지 가려고 했으나, 동래구청[3]온천장 일대 주민과 상인들이 서로 자기네 동네에 지하철을 놓으려고 갈등이 심했다. 당시 동래의 중심지는 동래교차로 수안역 일대였으며 동래구청과 동래시장이 있어 이 곳을 중심으로 상업지구가 형성되어 있어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였다. 이러한 이유로 1호선은 반드시 동래구청 앞으로 지나가서 부곡동으로 빠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온천장 주민들은 동래온천 발전을 이유로 온천장을 지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양측 주민의 의견을 반영해 중간지점인 온천천 고가 건설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1호선이 지상으로 다니게 되면서 소음 문제로 온천천 일대 주민들의 극심한 반발이 발생하였고 일부는 중앙대로를 따라 지하화를 요구하였으나 설득 끝에 고가 건설을 최종 확정하였다.

전동차는 스웨덴에서 제작과 반입을 하려고 추진하였으나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제가 좋을 것이라고 제언하여 현재와 같이 결정되었다. 더군다나 건설 과정에서 일본 측의 건설 관련 기술협력 및 차관이 투입된 것도 일본제 전동차가 도입되는데 한몫 하였다. 변전설비는 스웨덴, 역무자동화 설비는 프랑스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전동차 차량 규격과 차체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정부와 전동차 생산업체에서는 부산 지하철 전동차는 서울 지하철과 같은 대형 규격과 강철제 차체로 똑같이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부산시에서는 부산의 지형과 당시 350만 인구에 맞게 규격을 중형으로 축소해야 하고, 바다와 인접한 지역임을 감안하여 염분에 강한 스테인리스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스테인리스로 된 중형 전동차를 도입하였다.[4]

서울처럼 1호선 공사 당시 시내를 중심으로 지하상가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부전지하상가, 광복지하상가, 남포지하상가 등이 1호선과 함께 계획되었다.

2.2. 1~3단계 공사와 개통

1980년 착공했지만, 공사에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1단계 구간인 범어사↔범내골 구간은 신속하고 저렴하게 공사할 수 있는 고가구간(동래↔구서동)과 함께 부전역~양정역 구간을 제외하고는 공사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1985년 개통되었다. 다만 서면역 공사 당시 서면로터리를 다 헤집어야 했던 이유로 중앙 광장에 설치된 부산탑을 해체하였는데, 부산탑 철거 때문에 1호선 건설 당시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철거가 강행되었다. 부전역~양정역 구간 중 송공삼거리 일대는 지반이 약해 1983년 11월에 지반붕괴로 인해 터널천장이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1단계 구간이 개통된 직후 1호선을 구경하러 수많은 시민들이 몰렸으나, 도심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2단계 개통이 되기 전까지 약 2년 간 이용수요가 저조하였다. 그 이유는 1980년대 부산시내는 중앙동역 ~ 남포동역 일대 였으며 이 곳을 중심으로 관공서[5], 기업, 상권 등이 밀집해 있었다. 또한 인근으로 경부선, 경전선이 출발하는 부산역부산진역이 있었는데 1단계 구간은 이 곳을 모두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이 지난 1987년 1호선 2단계 개통 이후에는 수요가 대폭 늘어났으며 출퇴근 시간 차량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2단계와 3단계는 난관이 많았다. 부산진역자갈치역 구간은 매립지에 건설을 해야하는 까닭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특히 난공사구간으로 예상되었던 중앙동역 ~ 남포동역 인근이 문제가 되었다. 다른 구간과 달리 바닷가가 바로 앞에 있다보니 지반이 약해 바닷물이 수시로 들어와서 애를 많이 먹었다.[6] 결국 1985년 12월 23일 1호선 중앙동역 공사현장에서 지반붕괴로 인해 인근 건물 1동이 아예 증발해 버리고[7] 차량 2대가 약 40m 땅속으로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하여 사망자 3명, 중상자 4명이 발생하고 1억 5천만 원[8]이 넘는 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붕괴현장에 바닷물까지 차올라서 복구에도 무진장 애를 먹었다.[9]

동대신동역서대신동역 구간의 선형을 두고 주민 간의 갈등이 있었다. 당초 부산전차의 기종점이었던 구덕운동장까지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계획을 변경하여 사하구까지 노선을 연장시켰는데 주택가를 통과해 서대신동(서대신교차로)에 이르는 선형으로 갈 수밖에 없어[10] 지하철이 통과할 예정인 주택가 인근 주민이 소음과 진동 등의 이유로 반발했고 공사 중단 가처분신청이 인용되어 1985년부터 1987년까지 공사가 중단되었다. 1년여에 이르는 법정싸움 끝에 부산시가 주민들을 상대로 승소하여 원안대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1987년 2단계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3단계 구간은 본래 1988년 6월 말 완공, 그 해 11월 초 한 번에 개통되어야 했으나 서대신↔동대신 구간의 공사 중단으로 인해 구간을 분할하여 1988년 중앙동역에서 토성동역까지의 구간이 개통되었고, 1990년 나머지 구간이 개통되었다. 공사 중단으로 홍역을 치른 서대신↔동대신 구간은 제한속도 25km/h 이하로 서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토성↔서대신 구간을 착공할 때 중간에 위치한 구덕운동장 연계를 위해 토성역은 현 위치에 만들고, 보수동 연계를 위해 흑교사거리에 역을 하나 세우고 동대교차로에 동대신역을 만들고, 그대로 보수대로를 따라 구덕운동장 앞쪽에 역을 만들고 그대로 망양로를 따라 서대신교차로 방면으로 이으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선형을 정하면 역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하며 빙 둘러가는데다 굴곡 구간이 많이 발생하며 결정적으로 보수대로는 하천을 복개한 도로라 교각 바로 아래에 보수천이 흐르고 있어 사실상 하천 바닥에 건설해야 된다. 지금도 하천 아래로 길을 뚫을 때 신경쓸 곳이 많은데 당시에는 그 문제가 더 크게 다가온 것. 결국 관련 기술이 부족한 까닭에 최종적으로 구덕운동장 연계는 하지 않게 되었다.

2.3. 4단계 연장(신평 - 서대신)

지하철 계획 초창기의 1호선 남쪽 종점은 공설운동장이었으며 화명동 ~ 사상 ~ 하단 ~ 공설운동장 구간으로 다른 지하철 노선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후 계획이 변경되어 화명동 ~ 공설운동장 구간 중 하단 ~ 공설운동장 구간을 1호선으로 대체하고 신평역까지 연장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낙동대로를 따라 괴정동, 하단동, 신평동까지 연장하는 계획을 수립하여 1990년 실시설계를 마치고 1990년 7월 착공하였으며, 이 구간은 1994년 개통하였다. 구한말 박기종이 시도했던 부하선 노선 계획을 부산시청이 승계한 것이다.

또한 당시 노포차량사업소는 연장으로 인해 증가하는 지하철 차량을 수용하기에는 공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신평동 을숙도 일대 섬 주민 임시이주단지 부지에 차량기지를 계획했고, 신평 - 서대신 연장구간 개통과 함께 신평차량사업소가 운영을 개시했다.

아울러 승객이 크게 증가해 차내 혼잡이 심화됨에 따라 1994년 차량을 6량 1편성에서 8량 1편성으로 증결했다.

2.4. 5단계 연장(다대포해수욕장 - 신평)

1호선이 1994년 사하구까지 닿기는 했으나 사하구 북부만을 지나고 장림동다대포 지역은 여전히 지하철이 들어오지 않아 대중교통을 버스에 의존했다. 이곳은 다른 부산의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산이 많아 도로 개설에 한계가 많았고, 원도심이나 서면 등 외지로 나가는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이에 따라 부산시에서는 다대포 구간에 대해 경전철 계획을 세워놨다. 그러나 주민들은 환승 필요하고 수송능력도 떨어지는 경전철 대신 1호선 연장을 바라고 있었고, 당시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조경태가 이를 밀어붙였다. 결국 2005년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조사에서 B/C 0.89-0.93[11], AHP 0.502로 경전철 대신 1호선 연장을 2005년 확정짓는다.
2005년 부산지하철 1호선 연장(다대포해수욕장) 예비타당성조사

당시 조경태 의원은 PK 지역에서 드문 민주당계(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서, 부산의 지지기반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참여정부로부터 쉽게 지지를 얻었다.[12] 이후 2~3년간 측량과 예산 배정으로 씨름하다 2009년 11월 20일 착공식을 시작으로 공사를 시작하였다.

5단계 구간 중 신평역 ~ 장림역 일대는 과거 갯벌을 매립한 매립지였다. 이 때문에 공사가 시작된 이후 총 35곳에서 지반침하가 발생했었다. 기사 건물균열이 발생한 구간은 동매역 8곳, 장림역 9곳, 신장림역 4곳, 다대포항역 14곳이 발생했다. 기사

연장사업으로 6개 역이 신설되었으며, 연장거리는 7.98km. 2017년 무사히 완공되어 개통되었다.
예정대로 4월 20일 국제신문 채널에 다대구간 개통 행사 영상이 올라왔다. 다대구간 개통 행사 후 16시부터 개통이 되어 운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매역 ~ 다대포해수욕장역에 비치되어 있는 발매기는 부산 도시철도 4호선의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교통카드 보충, 승차권 발매, 우대권 인식, 거스름돈 기능이 통합된 발매기와 교통카드 구입/보충 전용 단말기가 비치되어 있다. 여기에 개선된 UI, 스마트폰처럼 스크린을 확대/축소할 수 있는 핀치 투 줌(Pinch to zoom) 기능이 추가되어 있다. 다만 4호선의 발매기는 승차권/우대권만 발매하는 기기와 구간 정산기 겸 교통카드 보충기가 있으며 다대포 구간에 비치된 단말기의 UI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한 4호선에 이어 FM 라디오 중계기가 설치되었으나 지상역인 신평역보다도 수신 상태가 불량하다. 부산불교방송(89.9), KBS부산 FM(92.7), KBS부산 1라디오(103.7), KNN 러브FM(105.7)이 그나마 잡히며 나머지는 거의 또는 전혀 수신할 수 없다. 지상파 3사의 DMB 중계기도 설치되어 있으나 2020년 이후 출시된 스마트폰에서는 DMB 기능이 없으며 기기 교체 주기를 고려하면 2024년 시점에서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노포동 ⇔ 다대포해수욕장 간의 지하철 소요시간은 60분이다. 지상구간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GPS를 통한 위치파악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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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좌측에 두 번째로 서있는 안경 안쓴 사람은 한보그룹정태수 회장이다.[2] 참고로 왼쪽 여자아이의 왼쪽에 있는 사람은 조경태 국회의원(사하구 을), 오른쪽 여자아이의 왼쪽에 있는 사람은 허남식 당시 부산광역시장.[3]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4] 현재 1호선 구형 전동차는 본래 도입시 설계수명을 넘은 채(단, 6개월마다 중검수에 통과하여야 함) 운행되고 있으며, 보존이 확정된 101편성을 제외한 102~105편성의 경우 고철로 매각되었는데, 예상가보다 24%나 비싸게 매각될 정도로 튼튼했다.[5] 부산광역시청, 부산광역시경찰청, 법원 등[6] 실제로 3미터 정도만 파고 내려가도 다음 날에 바닷물이 차올라서 그 자리에 바닷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7] 그 외에 현장 주변 건물 10여 동 역시 지반이 조금 내려앉았다.[8] 1980년대 중반에는 서울 시내 부촌의 고급 주택이 아닌 이상 매매 가격이 1억이 넘는 집이 흔치 않았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이다.[9] 당시 부산MBC에서 무너지는 순간을 담아 특종으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영상 18:17 당시 부산MBC는 중앙동에 있었으며 사고현장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특종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영상 링크는 1991년 12월 MBC 본사에서 방영한 "MBC 30주년 특별방송" 중에 나온 것이다.[10] 도로 구조상 도로를 그대로 따라서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11] 당시 다대포 연장안 운영의 필요인력을 부산시에서는 130명, 기획재정부에서는 193명으로 산출했으며 전자의 B/C는 0.93, 후자의 B/C는 0.89로 나왔다.[12]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한나라당 최거훈 후보가 슬로건을 이걸로 내걸었으나 이미 예산배정과 측량이 끝나서 정보 공개만 앞둔 상황에서 그런 슬로건이 나와 심각한 뒷북이었다. 당시 민주당이 전국 곳곳에서 죽을 쑤는 와중에도 조경태는 지하철 연장을 무기로 한나라당과 표싸움에서 간신히 이겼다. 하지만 조경태는 결국 친문계와 끊임없이 반목하다 결국 새누리당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