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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열(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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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정도전의 등장인물. 배역은 송금식. 원나라에 정착한 고려인 후손으로[1] 1351년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돌아갈 때 따라가 고려로 귀화했다.

2. 작중 행적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상대하는 배극렴을 돕는 원군으로 처음 극에 등장하며, 아지발도가 일부러 유인하기 위해 도망가거나 잡아들인 백성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아지발도를 공격하자는 행동을 보이지만 이성계는 유인책임을 간파해서 공격하지 않았다. 왜구에 대해 적극 공격을 하지 않고 먼저 움직이길 기다리는 이성계의 작전에 불만을 품고, 이지란과 말다툼까지 하지만, 황산 대첩에서 이성계가 적들이 밀집한 황산으로 스스로가 격전을 벌이고 아지발도도 그 쪽으로 이동하자 원군으로 나서고, 전투가 끝난 후에는 부하가 가져온 물은 이지란에게 먼저 권하면서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한 모습을 보인다. 도당에 들어간 후 최영을 주축으로 하는 무장 세력의 일파로 활동한다.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이성계에게 크게 감화해서 그의 사람이 되어가는 배극렴과 달리, 변안열은 정치적인 줄타기를 반복하며 시류에 편승한다. 이인임을 마땅찮게 생각하면서도 필요악으로 여기는 최영의 정치관을 그대로 따라간다. 이인임의 실각 이후 22화에서 윤소종이 최영에게 이인임 사면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지목할때 '대감께 불경을 저질렀으니 혼쭐을 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후일 김저정득후의 이성계 암살 미수 사건과 우왕 복위 사건 때 변안열을 탄핵하여 처형으로까지 몰아넣은 사람이 바로 윤소종으로 그와의 악연이 여기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요동정벌에서는 조민수의 좌군에 편입되어 그와 행동을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조민수의 동아줄 제안을 듣는 모습이나 그 이후 행동을 보면 사실상 조민수 라인으로 갈아탄 듯. 조민수가 몰락한 후에는 이색과 행동을 같이 하고 있다. 32화에서 최영이 처형장에서 자신의 결백을 당당히 주장하자, 조금 착잡해진 채 그의 처형을 지시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최영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33화에선 이숭인, 하륜 등이 옥에 갇히자 대왕대비 안씨를 찾아가 이성계 일파에 저항할 뜻을 밝힌다. 이후 곽충보로부터 우왕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강화도로 간다. 그러나 우왕은 김저정득후에게만 이성계의 암살을 지시했고 변안열은 부른 적이 없어서 어리둥절해 한다. 모든 게 우왕에게 김저와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 암살 밀명을 받았지만 바로 이성계에게 밀고하고, 이 기회에 계속 줄을 바꿔타며 이성계에게 대항하는 변안열도 제거하려고 짠 곽충보의 함정이었던 것. 우왕이 김저와 정득후에게 이성계를 죽이라 명했다고 사실을 밝히자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한다. 결국 이성계와 이지란이 강화도까지 내려오고 그들에 의해 우왕이 보는 앞에서 잡혀가면서 퇴장한다. 이 내용이 5월 3일에 방송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전쟁기념관은 5월의 호국인물로 변안열을 선정하였다.#. 35화에서 처형을 당하는 내레이션으로 완전한 퇴장.

3. 기타

황산 대첩이 끝나고 배극렴과는 달리 이성계와의 사이가 소원한 편. 그도 그럴 것이 실제 역사에서 조선 건국을 두고 이성계, 배극렴 등과 갈등하였고, 1389년 이성계의 생일때 이방원이 고려를 추종하는 이들을 떠보기 위해 하여가로 의중을 떠볼때 불굴가로 응답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굽힐 수 없음을 보였다.[2] 이후 김저의 우왕 복위 사건때 이색, 우현보와 같이 연루되어 억울하게 순절하였고 조선 개국후 개국 이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초반에는 배극렴과 콤비처럼 나란히 나오는 일이 많았으나, 창왕 즉위 이후 배극렴은 이성계 편에 붙고 변안열은 고려 왕실에 충성을 지키면서 더 이상 같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정도전 갤러리에선 변레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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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집안 내력이 복잡해 중국인(한족)으로 볼 여지도 있고 고려인 후손으로 볼 여지도 있다. 본래 남송이 망할 때 고려에 귀순한 변려(邊呂, 황주 변씨 시조)라는 사람의 후손(...이라고 해도 시기적으로 먼 후손은 아닐 듯.) 변순이라는 사람이 원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당시 고려인들이 원나라로 건너가 벼슬살이를 하는 경우가 꽤 많았으니 변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손자가 변안열인데 그 역시 원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갔다가 귀화하여 원주 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즉, 그의 집안은 불과 몇 세대 사이에 남송→고려→원→고려를 오간 복잡한 내력을 지니고 있는 셈.[2] 우리가 잘 아는 단심가도 사실은 이때 정몽주가 응답으로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