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0000><colcolor=#fff> 박천돈 朴天敦 | |
| 출생 | 1950년 6월 13일 (호적상 1953년)[1] |
|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
| 사망 | 2025년 1월 8일 (향년 74세) |
| 직업 | 기업인 |
| 소속 | ㈜천일 창업자 · 전 대표이사 |
| 학력 | 삽교국민학교 삽교중학교 선린상업고등학교 |
| 배우자 | 김영자 |
| 자녀 | 1남 (박상원) |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천일 회장, 박천돈 회장으로도 불린다.1970년에 국내 조명업계에 투신한 1.5세대 조명인으로, 조명업 외에 천일솔라파크 등 태양광발전소와 천일에너지 등 집단에너지 사업에 뛰어들며 조명업계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사업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CEO로 평가되고 있다.체육시설 조명 분야에서 국내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기록했으며, 부산 신항만·평창 동계올림픽·인천 아시아드 주경기장 등 국내 주요 인프라 조명 사업을 이끌었다. 2025년 1월 8일 별세했으며, 이듬해 1주기를 기념해 그의 생애를 회고하는 『박천돈 회고록』이 출간됐다.2. 생애
2.1. 유년기
1950년 6월 13일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두리 374번지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전쟁 직후 시골에서는 출생신고가 수년씩 밀리는 일이 흔했고, 박천돈 역시 3년이 지난 뒤에야 출생신고가 이루어져 호적에는 1953년으로 올랐다.태어난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둘째 형 박영돈이 북한 의용군에 자원 입대해 월북하는 아픔을 겪었다. 1962년 초등학교 5학년 재학 중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럼에도 슬픔에 잠기기보다 리더십과 언변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삽교중학교 선도부장을 맡았고, 교내 웅변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동창들 사이에서 "크면 대통령 될 줄 알았다"는 농담이 회자될 정도였다.2.2. 상경과 조명업 입문
중학교 졸업 후 서울 용산구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상경했다. 1969년 구로동 소재 조명사(이후 성광조명으로 사명 변경)에 입사하면서 조명업과 인연을 맺었다. 생산부에 배치돼 가로등 본체 제작부터 조립까지 전 공정을 익혔고, 이후 자재부·영업부를 거치며 사업 전반을 파악했다.1974년 육군 제32사단에 입소해 군 복무를 마치고 1977년 병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당시 을지로 부근에 있던 신아전기라는 회사에서 잠시 근무하다 1978년 성광조명에 재입사, 본격 영업 활동을 시작했다.당시 그의 영업 방식은 특이했다. 부지런히 발로 뛰어 현장 정보를 입수해 계약을 따내고, 한번 설치한 등기구 조명이라면 AS까지 직접 도맡아 진행했다. 차 안에는 온갖 서류와 부품, 장비로 가득했고 직함은 사장이 아닌 부장이었다. 이 경험이 훗날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경영 철학의 뿌리가 됐다.2.3. 창업: 화성조명 직매장
1978년~1979년 무렵 S조명사 재직 중 김영자와 선을 보게 됐고 1980년에 결혼식을 올렸다.1982년 1월 4일, 혹한의 아침에 청계천변 동일벨트 골목의 다섯 평 남짓한 점포에 '화성조명 직매장'을 창업했다. 창업의 계기는 재직 중이던 S조명사의 부도였다. 당시 A건설의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S조명사가 갑자기 부도에 직면했고, 발주사 측이 당시 영업자였던 박천돈에게 직접 시공을 제안했다."선수금을 드릴 테니, 박 부장이 직접 시공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책상 네 대가 전부인 점포에서 시작한 이 화성조명 직매장이 훗날 천일전기공업, 그리고 ㈜천일로 이어지는 천일그룹의 모태가 됐다.2.4. ㈜천일로의 성장
창업 초기부터 1군 건설사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수주를 늘렸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 납품 자재에 불량 문제가 터지는 위기도 있었으나, 전량 재제작 납품으로 정면 돌파하면서 오히려 A건설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1990년대 초에는 연 매출이 60억 원 안팎으로 성장했으나, 거래처 어음이 연달아 부도나는 사태를 겪으며 천일이 크게 흔들리는 위기가 찾아왔다. 업계에서는 국내 조명 회사 중 부도 어음을 가장 많이 맞은 곳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2002년 이용우(현 천일 부사장)가 합류하면서 도약의 계기가 마련됐다. 이후 천일의 매출은 50억→100억→150억→200억 원대로 계단식 성장을 이어갔다.2004년 김재성(현 천일 생산본부 상무)을 영입해 외부 하청 중심이던 생산 체계를 직영으로 전환했다. 기술 내재화로 납기 대응력과 원가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 이후 대형 프로젝트 수주의 핵심 기반이 됐다.2011년 10월 1일 법인사업자 전환과 함께 상호를 '㈜천일'로 변경했다. 천일 직원의 80% 이상이 장기근속자라는 점이 주목받아 2013년 SBS BiZ에 강소기업으로 소개됐다.1992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필립스 본사 기술연구소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파트너십이 시작됐고, 2011년 공식 LED 도로 조명 파트너십 계약 체결로 이어졌다.2.5. 에너지 사업 다각화
2008년 전라북도 부안군에 1.75메가와트급 태양광발전소 '천일솔라파크 제1·2발전소'를 준공했다. 당시 국내 태양광 시장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 선제적으로 진입한 것이다.2010년 ㈜천일에너지와 포천팩토리를 설립해 바이오매스 우드칩 생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500억 원 규모의 공사 끝에 2014년~2015년 무렵 준공됐으며, 천일에너지는 이후 천일그룹의 주요 계열사로 자리잡았다.2.6. 말년과 별세
2021년 담도암 진단을 받았다. 담관에서 발생하는 흔치 않은 암으로, 발견 당시 이미 간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여덟 시간이 넘는 대수술로 간의 상당 부분을 절제했고, 이후 항암치료 대신 식단과 생활습관 관리로 대응했다. 평생 즐기던 술을 진단 당일로 단번에 끊었다.2023년 1월 1일 ㈜천일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아들 박상원에게 경영을 공식 승계했다.2025년 1월 초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서울 문래동 병원에 입원 후 서울아산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뇌혈관이 파열되며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가족이 모두 병실에 모인 가운데 2025년 1월 8일 오후 11시 별세했다.빈소에는 각계 인사 1,500여 명이 방문했으며 근조 화환만 500여 개가 들어왔다.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졌고 고향인 충남 예산 삽교읍의 가족 묘지에 안장됐다.3. 주요 프로젝트
-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 납품 (1980년대)
- 구의·신월·아차산 야구장 조명 (2007)
- 부산 신항만 1-1구역 조명 (2008~2013)
- 평창 동계올림픽 기반시설 조명 1차 (2009)
- 인천 아시아드 주경기장 조명 (2014)
- 진천 국가대표종합훈련원 실내외 조명 (2017)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반시설 조명 2차 (2018)
4. 경영 철학
현장 중심주의. 박천돈 회장이 천일 직원들에게 강조한 핵심은 '현장'이었다. "구두 뒤축이 닳을 때까지 다녀라.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로 이를 압축했다.지시 5%, 확인 95%. ㈜천일의 사훈이자 평생 그가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지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고 빈틈을 채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앉아만 있지 말고 행동으로 일하라는 뜻이기도 하다.사람 중심주의. '사람이 전부다'를 입버릇처럼 했다. 아무리 큰 실수를 해도 직원을 해고한 적이 없었으며, "내가 왜 사장이냐, 부장이지"라고 말하는 등 직원들과 동등하게 실무를 보고 거래처 사람들과 돈독하게 지내며 천일을 지속적으로 성장시킨 오너였다.납세와 애국의 의무. 2001년과 2010년 두 차례 모범납세자 국세청장 표창을 받았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자 곧 애국이라는 소신을 가졌다. 이것이 그의 평생 염원이던 '선한 기업 만들기'의 기본이기도 했다.5. 어록
"구두 뒤축이 닳을 때까지 다녀라. 현장에 답이 있다."
"지시 5%, 확인 95%."
"내가 왜 사장이냐, 부장이지."
"가족만큼이나 나무를 사랑한다."
"애향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쌓아온 기록은 여기서 멈추지만, 그 빛이 남긴 자취는 오래 기억되리라 믿는다. 이것이 내 마지막 지시 5%이니, 확인 95%는 이제 여러분의 몫이다."
— 박천돈 회고록 마지막 문장
— 박천돈 회고록 마지막 문장
6. 수상 및 활동
- 2001년 모범납세자 국세청장 표창
- 2010년 모범납세자 국세청장 표창
- 2012년 5월 대한민국 중소기업인대회 지식경제부장관 표창
- 2012년 11월 삽교 명예읍장 취임 (약 9년 재임)
- 2019년 1월 한국조명·전기설비학회 대외협력이사 취임
- 2019년 10월 한국전기문화대상 모범중소기업인 표창
7. 저서
| <colbgcolor=#000><colcolor=#fff> 박천돈 회고록 | |
| 부제 | 대한민국 조명 산업 선구자의 경영 성공 신화 |
| 출판사 | 배움터 |
| 발행일 | 2026년 5월 26일 |
| 쪽수 | 316쪽 |
| ISBN | 9788989383369 |
| 가격 | 18,000원 |
* 1장: 기울어가는 집에 빛으로 태어나다
* 2장: 새로운 빛, 조명을 만나다
* 3장: 아웃도어 조명으로 성장 가도를 달리다
* 4장: 에너지 사업 확장과 변화하는 조명 시장
* 5장: 영원한 빛, 그 속으로
8. 여담
- 기존 나무위키에 출생연도가 1951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박천돈 회고록에 따르면 실제 생년은 1950년이고 호적 등재 연도는 1953년이다. 전쟁 직후 시골에서는 출생신고가 수년씩 밀리는 일이 흔했기 때문.
- 이름 '천돈(天敦)'은 '하늘처럼 크고 바르고 성실하다'는 뜻이며, 천일(天一)은 '하늘 아래 유일무이한 기업'을 의미한다.
- 아내 김영자의 고향이 강원도 평창이다.
- 담도암 선고를 받던 날, 평생 즐기던 술을 그날로 단번에 끊었다. 이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 고향 삽교읍 묘지 주변에 소나무를 직접 심고 벌초하며 평소에도 가꿨다. 그곳에 영면했다.
- 막내 손녀 박혜율은 당시 너무 어려 장례식장에 오지 못했다. 훗날 혜율은 "할아버지는 왜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내려오질 않아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 손자 박서준은 "할아버지가 식물인간이더라도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SBS BiZ에서 2013년 천일 직원의 80% 이상이 장기근속자인 강소기업으로 소개됐다.
[1] 한국전쟁 직후 시골에서는 출생신고가 수년씩 밀리는 일이 흔했다. 실제 생년은 1950년이나 호적에는 1953년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