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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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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민보호연대 대표 겸 국민우선당 창당준비위원장:
박진재(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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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1. 개요

朴晋材
? ~ 1207년(희종 3)

고려의 인물. 최충헌, 최충수의 조카.

2. 생애

1196년에 대정을 지내면서 최충헌이 이의민 일파를 죽일 때 최충헌, 최충수, 노석숭과 함께 했으며, 최충헌이 정권을 잡자 별장이 되었다. 1197년에는 최충수최충헌에게 명종을 폐위시키자고 제안하면서 사공 왕진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으나, 최충헌은 왕민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면서 박진재가 중재해 왕민을 임금으로 세울 것으로 결정했다.

명종이 폐위되고 신종이 즉위하자 형부시랑이 되었으며,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던 일로 인해 최충헌이 최충수와 대립하면서 최충헌의 부하들이 박진재와 의논하라고 했다. 박진재는 김약진, 노석숭과 함께 최충헌의 부름을 받자 박진재는 최충헌을 도울 것이라 했다. 최충헌이 최충수를 공격하자 박진재는 김약진, 노석숭과 함께 각자의 군사를 거느리고 최충수를 공격했다.

1202년에 최충헌의 사위 임효명이 과거에 급제하고 합문지후가 되자 축하 연회를 열었으며,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김척후가 토벌하러 가면서 박진재는 최충헌, 최이와 함께 길가의 누대에 올라가 군대를 사열하고 병력을 동원해 무력을 시위했다.

1203년에 상서좌승이 되었고 1207년에는 익명으로 누군가가 박진재가 최충헌을 제거하려고 모의한다는 방이 붙어 최충헌과 사이가 벌어졌으며, 이 때 박진재가 대장군이 되자 문객의 수가 최충헌과 맞먹었고 모두 용감하고 날쌨다. 박진재는 문객 중 관직에 임명된 사람이 적은 것을 한탄하면서 항상 원망하고 불평했으며, 술을 마시면 최충헌의 단점을 말했다.

최충헌이 없다면 국권을 자신이 혼자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최충헌을 없애고자 외삼촌이 임금을 임금으로 알지 않는다는 헛소문을 퍼뜨렸고, 문객들에게는 '어찌 갑자기 영화가 찾아오지 않겠는가?'고 말하곤 했다. 이에 최충헌은 박진재가 자신을 반드시 해칠 것으로 여겨 그를 불러 어찌 자신을 해치려고 하느냐고 했으며, 좌우에 명령하자 박진재는 포박되어 다리의 힘줄을 끊기고, 백령진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에 병으로 죽었다.[1][2]

이후, 박진재의 문객들중 용맹한 자들은 먼 곳의 바닷섬들로 나누어 유배를 보냈다고 고려사 등의 정사들에서 전한다.

3. 대중매체


[1] 다만, 최충헌이 조카인 박진재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는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시대 정사(正史)들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들에만 나오고, 최충헌 당시의 기록들이나 최충헌 묘지명에는 나오지 않는다. 특히나 최충헌 묘지명에는 그의 동생인 최충수와 조카 박진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전혀 없다. 고려사 등의 고려시대 정사들이 경대승두경승을 제외한 모든 무신집권자들을 반역자 편에 넣을 정도로 부정적인 것이나,[2] 또 고려사 등의 정사들에서 박진재보다 더 질적으로 안 좋게 최충헌을 노린 만적 일행,이광실,왕준명 일행(고려 희종의 최충헌 암살시도에 가담한 일행.),기인보들이 고문,처형,효수,연좌제를 당하지 않고, 본인들만 유배를 간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외조카인 박진재에게 이렇게 잔인한 형벌을 정말로 가했는지 의문이 드는 면은 없잖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