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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9:46:08

박중국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가, 외교관.

2. 생애

1928년 1월 7일에 평안북도 후창, 혹은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서 유학한 이후 귀국하여 중앙보안간부학교를 다녔으며 국제부, 외무성 등에서 일하였다. 연락부 공작관, 동독 대사관 공작관 등으로 일하다가 1958년 외무성 참사관, 부국장, 제1국장 등으로 일했다고 한다.

1964년 9월, 장정환의 뒤를 이어 군사정전위원회 북한측 수석대표로 부임하였다.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이후 유엔사 수석대표 존 스미스 해군소장, 그 후임 길버트 우드워드 육군소장과 치열하게 대치하였으며 매우 유능하게 대처를 했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린베레 출신으로 북한 측을 약올리는데 천재였던 윌리엄 야보로의 각종 도발과 조롱에는 천하의 박중국도 어쩌지 못해서 갖은 굴욕을 당했고 "김일성은 가짜다. 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도발에 분을 이기지 못해서 단도로 쑤셔주겠다고 폭언을 퍼붓기도 했지만 "중국과 소련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 지겹지 않은가? 남한에는 자유가 있다"라는 대답으로 역관광당하기도 했다. 1969년 9월, 리춘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1971년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4년 8월 15일, 리민수의 뒤를 이어 루마니아 대사로 부임하였으며 몰타 대사를 겸하였다. 1975년 5월, 김일성의 루마니아 순방을 동행했다.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8월 9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작별방문한 후 신인하에게 루마니아 대사를 이임하고 귀국,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임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9월, 북한 군사대표단장으로 탄자니아를, 10월에 르완다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김현식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과 장성택의 지시를 받고 오진우를 감청하다가 들켜서 격노한 오진우가 김일성에게 자기를 남조선 간첩으로 생각하냐고 마구 난리를 쳤고 인민무력부 부부장에서 짤렸으나 김정일의 비호를 받아 곧 복귀했다고 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5월, 군사대표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1983년 1월, 나미비아 반군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자 박성철, 김중린 등과 함께 영접했다. 1984년 9월, 모잠비크 해방 20주년을 기념하여 모잠비크를 방문했다. 이때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는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가 있었으나 국내 언론은 이미 박중국을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소개하고 있었음에도 교도통신을 그대로 받아적어 박중국이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고 보도하는 삽질을 했다. 근데 경향신문에서는 소스를 북한 중앙방송으로 기재한 것이나 김현식의 증언을 봐서는 중간에 해임되었다가 다시 임명된 것일수도 있다. 1985년 11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북한 방문 때도 배석하는 등 북한 군사외교의 실무자였다. 1987년 9월, 쿠바 대사로 부임하여 1992년까지 재직하였다.[1] 이에 대해서는 북한이 자기네의 미국과의 협상 경험을 쿠바에게 전수해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1992년 10월, 북한도 망할 것이라고 발언했다는 음해를 당하고 소환되어 1년간 조사를 받고 혁명화 조치를 당했다는 썰이 있으나 용서를 받았는지 무죄가 밝혀진 것인지 1994년 3월부터 외교부 순회대사 직함으로 해외순방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외교부 순회대사 재직 중 1996년 10월 6일 12시 30분에 68세를 일기로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정무원은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오랜 기간 인민무력부문과 외교부문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우리 혁명의 전취물을 옹호고수하며 나라의 대외적권위를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여담

귀순한 공작원 김용규는 박중국이 김일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김일의 비서 오기완은 박용석이 김일의 유일한 아들이며, 김일이 자신에게 아들 하나만 있는 것이 아쉬워 아들딸이 한둘 더 있었으면 집안이 더 명랑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고 증언했으니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아들이 아니라 조카로, 따라서 박용석과는 사촌이라고 한다.

4. 참고문헌


[1] 후임은 중앙위 부부장 김승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