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07-11 21:22:50

신인하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1928년 6월 1일에 평안북도 구성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무려 형제가 그를 합쳐서 8명이나 되었는데 가난 때문에 그 중에서 네 사람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구성농업학교가 구성중학교로 개편된 후 거기서 학생 민청위원장을 하였는데, 당시 구성중학교 교장이 기독교 신자라서 학교 내부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탄압하자 비밀리에 1947년 1월, 북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 1948년 9월에 김일성종합대학 외문학부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 평양시 북구의 제1군관학교에서 단기군사강습을 마치고 기관총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1952년에 김일성이 대학생들을 다시 대학으로 보내라고 지시하면서 다시 복학했다.

대학 졸업 이후 1955년 8월, 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으며 과장까지 승진하였다. 1962년 3월, 자강도 당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63년 4월,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임명되면서 김정일의 측근이 되었다. 1967년 5월, 조선로동당 4기 15중전회 때 선전선동부장 김도만을 크게 비판하는 등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공을 세웠다.

1971년 10월 대외문화련락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으로 등장했으며 1973년 4월,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까지 승진하여 주체사상화 사업을 다그쳤다. 1974년 9월, 김경인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6년 10월, 국제부 부부장에 임명, 1977년 9월, 박중국의 뒤를 이어 주 루마니아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8년 12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3년 10월, 루마니아 대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 1984년 1월 5일, 전명수의 뒤를 이어 신임 주중 북한 대사로 임명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88년 5월에 주창준에게 중국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했다. 이상하게 국내에는 1988년 10월에 죽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애국렬사릉 묘비에 따르면 1989년 2월 18일에 죽었다. 하지만 북한 관영매체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나서 10년이 지난 1999년, 갑자기 김정일이 신인하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 2001년 5월, 그의 부인 역시 애국렬사릉에 합장되었다. 로동신문 보도에 따르면 자식이 무려 6명이었다고 한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