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 1914년 6월 28일 |
전라남도 나주군 나주면 남내동 (現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 | |
사망 | 2001년 3월 7일 (향년 86세) |
광주광역시 | |
본관 | 밀양 박씨 |
친인척 | 사촌누나 박기옥 |
학력 | 광주고등보통학교 (강제퇴학)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 학사) |
교직 | 조선대학교 교수, 법정대학장, 대학원장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수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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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박준채는 1914년 6월 28일 전라남도 나주군 나주면 남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이던 1929년 10월 30일 하교길에 나주역 입구에서 광주중학교[1] 4학년생인 일본인 학생 후쿠다 슈조(福田修三)을 비롯한 여러 일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생이자 자신의 사촌 누나인 박기옥을 비롯해 이광춘, 이금자(李錦子)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걸 목격했다.[2] 이에 박준채가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후쿠다 슈조가 대꾸했다."뭐냐, 센징 주제에."
이에 격분한 그는 후쿠다 슈조에게 싸대기를 날려버렸고, 이로 인해 열차 내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간의 격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열차에 타고 있던 일본인들이 모든 잘못을 한국인 학생들에게만 몰아붙이자, 그는 분노를 삼키며 친구들과 함께 열차를 떠났다.
이 일은 곧 광주-나주간 통학생들에게 알려졌고, 이에 격분한 한인 학생들이 11월 3일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했다. 박준채는 시위에 가담해 적극 활동했다가 다음날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혹독한 심문을 받다가 1929년 12월에 연소자라는 이유로 기소유예되어 출옥했다. 출옥 후 경성으로 상경하여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3]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조선으로 귀환한 그는 주조장 사업을 하다가 1960년대 초부터 조선대학교 교수를 맡았고, 법정대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은퇴 후 광주광역시에서 여생을 보내다 2001년 3월 9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박준채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1년 그의 시신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