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출생 | 1918년 1월 28일[1]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2] | |
사망 | 1998년 7월 18일 (향년 80세)[3] |
경상북도 상주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2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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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한 공로를 인정 받아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고, 2007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 생애
박재복은 1918년 1월 28일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1934년 2월까지는 고향 집에서 부모님의 가업을 돕다가, 이후 대전부로 이주하여 본정2정목(현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에 살았고, 대전부 본정3정목(현 동구 효동) 소재 군제제사주식회사(郡是製絲株式會社)[4] 대전공장의 여공으로 근무하였다.그러다가 1938년 4월부터는 대전부 본정2정목의 백화점 양만기(梁萬技) 상점에서 여사무원으로 근무했는데, 그해 10월 어느 날 오후 10시경 군제제사주식회사 여자 기숙사 34호실 복도 앞에서 이직 전 회사 동료였던 정삼례(鄭三禮)·김추현(金秋鉉)·한동임(韓東任) 등을 만나 "일본은 현재 전쟁을 하고 있으나 돈이 적어서 불리하고, 중국 및 러시아는 돈이 많다. 또 자동차, 비행기 등도 일본에 비해 많기 때문에 장기전에 이르면 물자부족 때문에 일본은 패전한다"고 말을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도 어느 날 오후 7시경 군제제사주식회사 여자 기숙사 38호실 내에서, 정삼례와 김추현에게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또 1939년 3월에도 어느 날 오후 3시경에 대전부 천정(현 동구 천동) 인단산(仁丹山)[5] 아래 철도 선로 부근에서 정삼례·김추현·안운직(安運直=安運適)·백정옥(白貞玉)에게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말을 하는 등 주변 사람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로 인해 박재복은 중일전쟁에 관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한 죄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41년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 형사제2부에서 육군 형법 위반으로 금고 1년형[6]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이후 1998년 7월 18일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별세하였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07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7]
3. 기타
- 생전 일본어를 굉장히 잘 하였다. 그래서 주로 일본인 상관의 말을 번역하여 전달하거나, 일본인으로부터 일본의 전시상황을 알게 돼 이를 다른 동료에게 알려 항일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1] 음력 1917년 12월 16일[2] 밀양 박씨(密陽 朴氏) 집성촌이다.[3] 음력 5월 25일.[4] 일본 대재벌 미쓰이그룹(三井グループ) 계열의 회사로서 당시 식민수탈이 가혹했던 곳이다. 앞서 1929년 4월과 1932년 11월에 동맹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5] 일제강점기 때 금단증상 해소 목적의 수입품인 인단 광고판이 있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며, 2018년 9월 7일 지명위원회 심의 의결을 거쳐 비학산(飛鶴山)으로 개칭되었다.#[6] 본형에 상당하는 미결 구류일수 본형에 산입.[7] 여담으로, 홍범도 장군이 이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