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999><colcolor=#fff> 박녹주 朴綠珠 | |
| 파일:박녹주.jpg1969년 당시 | |
| 본명 | 박명이(朴命伊) → 박녹주(朴綠珠) |
| 호 | 춘미(春眉) |
| 출생 | 1905년 2월 28일 |
| 경상북도 선산군[1] | |
| 사망 | 1979년 5월 26일 (향년 74세) |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면목동[2] | |
| 국적 | |
| 활약 시기 | 1916년~1978년 |
| 직업 | 판소리 국악인(소리꾼) |
| 링크 | 명창 박녹주 기념사업회 |
1. 개요
| 파일:박녹주 젊은 시절.jpg |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자 소리꾼. 중요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이기도 하다.[3] 1978년 5월 18일에 국악 분야를 은퇴한 이후 이듬해 1979년 5월 26일에 질병으로 하세했다.
2. 상세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 박재보(朴在普)[4]와 어머니 권순이(權順伊)의 3남 3녀 중 셋째 딸(3녀)로 태어난 그녀는 송만갑과 그 제자 김정문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그녀가 주장한 예술적인 기반 자체가 동편제였기 때문에 계보상으로 동편제 명창에 속하며 20세기에 들어서 송만갑제 판소리의 전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특히 1964년에 처음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될 때 남긴 녹음 자료에도 송만갑제의 더늠[5]을 중심으로 하는 대목을 맡아서 소리를 하기도 했다.[6] 그러나 실제로는 송만갑이나 김정문 이외에도 서편제의 김창환, 정정렬에게서도 소리를 배우는 등 사승 자체는 동편제나 서편제를 가리지 않고 배웠으며, 동편제 흥보가를 부르면서도 제비노정기만큼은 서편제인 김창환의 소릿제로 부르는 등 동 시대 여러 명창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유파를 겸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 하다. 다만 송만갑이나 정정렬 이외에도 동편제 명창인 박기홍, 유성준에게서도 배웠던 만큼 동편제의 소리 지향에 가까운 소릿제를 부르긴 하였다.
23세인 1928년부터 음반을 취입[7]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성악연구회에도 참여하여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배비장전 등 창극의 여주인공으로 자주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44세가 되던 1948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당시 창극 활동을 했던 여성 명창의 처우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고 국극의 연출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사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알콜 중독과 노름꾼인 아버지 박재보에게 어릴 때부터 학대를 받았고,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함께 온갖 궂은 노동을 하며 자랐다. 아버지는 평소 목소리가 우렁찬 박녹주를 명창으로 길러내 그녀가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노름과 술값으로 쓰려는 생각을 했고, 부친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12세 때 박기홍 명창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딸이 힘들게 배운 소리 실력으로 잔칫집에 불려가 푼돈이라도 벌어오면 모두 가로채갔으며, 심지어 그녀가 14세가 되었을 때 200원을 받고 기생으로 팔아 넘기기까지 했다. 그녀가 소리꾼으로 대성한 후에도 친부라는 이유로 1937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녀를 끈질기게 착취했을 정도로 엄청난 막장 부모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신세를 비관해 음독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는데, 유약한 성품 탓에 차마 아버지와 의절하지 못했단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하나같이 아버지를 증오하며 그를 부모 취급도 하지 않고 돈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만만한 그녀에게 가서 갈취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48년[8]에 눈병을 앓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9] 해방 이전부터 접했던 아편 중독 증세로 인해 병고와 옥고를 겪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함남 원산의 갑부인 남백우(南百祐, 1886년생~1944년경 사망 추정)의 첩(妾)으로 시집 갔다가 1923년에 남백우와의 관계를 모두 절계(絶係, 정리)하였다. 자식은 없었다.
인촌 김성수의 아버지인 김경중과 전남 순천의 거부인 김종익(金鍾翊, 1886년생~1937년 사망)의 후원을 받았다.
1948년 임춘앵·김소희 등 당대 여성 명창들과 함께 최초의 여성국극단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한다. 서울에는 국극사, 조선창극단 등의 예술단체가 있었지만 모든 운영이 남성 위주였고, 여성들은 꽤 푸대접 받는 편이었다. 이에 항시 불만을 품고 있다가 자신이 주종이 돼서 순전히 여성만을 위한 단체를 만든 것이다. # 여성 국극은 큰 인기를 얻었으나 그 인기는 짧고 굵게 불꽃 같이 타오른 후 쇠락하고 만다.
1960년대부터는 본인이 보유하고 있었던 바탕소리 녹음을 많이 남겼다. 1963년 기독교방송에서 춘향가를 녹음하고, 1972년 자택에서 기록 보존용으로 심청가를 녹음하였다. 흥부가는 총 4차례나 전판을 녹음하였는데 이 가운데 1967년 녹음(고수: 정권진)과 1973년 녹음(고수: 김동준)은 음반화되었다. 전자는 지구레코드에서 출반되었으며 이후 CD로도 복각되었고, 후자는 문화재보호협회 소장 녹음으로 여러 차례 음반으로 제작되었으나 CD로는 제작되지 않아 지금은 듣기 어렵다. 출반되지 않은 녹음으로는 1976년 문예진흥원 판소리 조사 사업 당시 녹음한 것(고수 미상)과 녹음 시기 미상의 기독교 방송 소장의 녹음(고수: 정철호)이 있다.
1971년에는 판소리보존 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1973년 11월 5일에 국가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다시 지정되게 된다.
74세였던 1978년에 5월 18일에 마지막 고별 공연을 위해서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내려왔고, 그곳에서 자신의 한 많은 인생을 담은 백발가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은퇴한다. 이듬해인 1979년 5월 26일에 서울 면목동의 차가운 단칸방에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제자로는 박송희, 조순애, 장영찬,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한농선, 이일주, 조상현, 이옥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박송희와 한농선이 그의 뒤를 이어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등은 중요무형문화재 심청가의 예능보유자로, 이일주, 이옥천 등은 각기 시도 지정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는 등 굵직한 명창들을 길러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박재보(朴在普, 1937년 1월 19일 하세. - 개명(改名)하기 이전의 이름은 박중근(朴重根).
- 어머니: 권순이(權順伊) ... 박재보(朴在普)의 재혼 계배 부인
- 배다른 큰언니 : 박평록(朴萍綠) ... 박재보(朴在普)의 사별 초배 안동 장씨 부인(安東 張氏 夫人)의 유일무이 소생
- 동복 작은언니 : 박송이(朴松伊)
- 본인 : 박녹주(朴綠珠) - 본명: 박명이(朴命伊)
- 동복 첫째 남동생: 박태술(朴太鉥)
- 동복 둘째 남동생: 박만호(朴萬鎬)
- 동복 막내 남동생: 박만술(朴晩鉥)
4. 그 외
이처럼 판소리, 그 가운데에도 흥부가 전승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자 당대의 슈퍼스타였는데, 일반 대중들에게는 김유정의 스토킹 피해자로 많이 알려져 있다. 시대가 시대였고 김유정이 훗날 소설가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한동안 짝사랑으로 미화되어 포장되었으나 사실 김유정의 행동거지는 그야말로 악질 스토커였다.김유정은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안 받아준단 이유로 멋대로 그녀에게 혈서를 보내는가 하면, 그녀가 가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노려서 납치하려고도 들었다. 심지어 명목상이지만 그녀는 그때 다른 한 남자의 첩(妾)으로 재가한 유부녀였고 임자가 있는 몸인데도 저랬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김유정이라면 상당히도 질색했다. 특히 김유정 때문에 그녀가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그가 한 행동은 사랑을 핑계로 한 극심한 민폐였을 뿐이다. 그래도 김유정에게 동정심이 없진 않았는지 김유정의 친구인 안회남이 김유정이 죽은 뒤 오히려 박녹주한테 김유정을 죽인 살인자라며 매도했는데, 그 때 자신이 손 한 번 잡아주기만 했더라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거라고 동정했다고 한다.
그 동정심이 진정인지는 모르지만, 설령 진정으로 용서했더라고 하더라도 김유정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박녹주는 김유정이 고백한 상황에서는 이미 다른 남자의 첩(妾)으로 재가까지 한 엄연한 유부녀였다.
후일 김유정문학관이 개관하자 초청 받아 기념식에 참석한 대인의 면모를 보였다.
5. 참고
6. 링크
- # - 두산대백과 - 박녹주
[1] 現 경상북도 구미시.[2] 現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3]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4] 개명(改名)하기 이전의 이름은 박중근(朴重根)이다.[5] 일종의 '마스터피스'와 같은 의미로 명창들이 새로 짜거나 과거의 것을 이어받아 방창한 대목을 말한다.[6] 이에 대해서는 송미경, 「판소리 춘향가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배경 및 지정자료 <춘향가>(1964)의 성격」, 『구비문학연구』 41, 2015 참조.[7]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것으로, 단가 대관강산과 심청가 중 선인 따라가는 대목을 취입하였다.[8] 6.25 전쟁 중인 1952년에 실명한 것이 정설이다. 영상의 54초 참고.[9] 본 문서의 사진처럼 박녹주는 색안경을 쓴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시력 문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