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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4-03 20:38:36

박건(가수)

박건
朴建
파일:박건.jpg
<colbgcolor=#283593> 본명 홍몽희[1]
본관 풍산 홍씨[2]
출생 1940년[3]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학력 신광국민학교 (졸업)
데뷔 1966년 노래 '장미엔 가시가 있다'
별명 미스터 마로니에, 마로니에 가수[4]

1. 개요2. 활동
2.1. 데뷔2.2. 거듭되는 히트2.3.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2.4. 현재
3. 대표곡4.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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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이다. 빼어난 가창력과 세련된 창법으로 6, 70년대 당시 주류였던 트로트 대신 팝 느낌의 발라드 곡을 주로 부르며 인기를 끌었다.

2. 활동

2.1. 데뷔

1940년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에서 태어난 박건은 어릴 적부터 노래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으며 따라서 군 생활 역시 5사단군악대에서 가수로 보냈다.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목포KBS에서 주최한 콩쿠르에 참가했으나 입상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주었다. 자신보다 못 부른 이들이 상을 받는다는 생각에 그는 서울에 있던 둘째 형에게 억울한 사연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냈으며, 이에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는 답장이 왔다.

그리하여 1965년 상경한 박건은 둘째 형의 도움으로 유명한 작곡가였던 손목인이 가르치는 노래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이 80명이 넘는 탓에 선생의 개인지도를 받기 어려웠고 개인적으로 레슨을 받으러 선생의 집에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선생의 스케줄이 워낙 바쁜 탓에 레슨은 펑크 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작곡가 마상원에게 배우게 되었는데 그의 가르침이 몹시 마음에 들었고 따라서 마상원의 곡 <꿈속의 어머니>와 손목인의 곡 <장미엔 가시가 있다>를 취입하며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판이 나왔음에도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고 이에 ‘가수 못 해먹겠다.’고 생각한 박건은 편곡이라도 배우러 다니기 시작한다.

2.2. 거듭되는 히트

1968년, 함께 노래를 배우러 다녔던 ‘곡 잘 쓰는’ 허현이 새로이 곡 하나를 내밀었고 박건은 이를 오아시스 레코드사(社)를 통해 발표하게 된다. 이 곡이 그의 첫 히트곡 <두 글자>였다.
박건 '두 글자'

이 노래가 박건의 첫 히트곡이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는데, 음반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손진석 사장이 그를 부르더니 “너 무슨 빽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촌놈이라 돈도 없고 빽도 없어요.”라고 대답했더니 주간중앙의 인기가요 차트를 내밀며 <두 글자>가 7위로 새로 진입했다고 말하는 것. 나중에 알아보니 당시 동양방송(TBC라디오)에서 집중적으로 틀어 그렇게 빨리 차트의 상위권에 올랐다고 한다. 동양방송의 광고국장 부인이 한 라디오에서 소개한 <두 글자>를 듣다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동양방송에선 나오지 않자 남편에게 “TBC에선 왜 그런 노래가 나오지 않아요?”라고 따지듯 물었다. 다음날 광고국장은 라디오 제작부를 찾아가 ‘두 글자’란 노래가 있느냐고 물으며 음반을 찾아 들어보더니 “괜찮네.”라고 중얼거리더니 사무실을 나갔다. 이후 PD들이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하고 그 노래를 집중적으로 트는 바람에 졸지에 박건의 <두 글자>가 히트하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두 글자>의 히트는 당시까지 무명에 불과했던 박건에게 있어 크나큰 반등의 계기였다. 이듬해인 1969년 발표한 <사랑은 계절따라>마저 크게 히트하며 박건은 명실공히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박건 '사랑은 계절따라'

2.3.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1971년, <청포도 고향>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건은 작곡가 김희갑으로부터 악보 하나를 건네받는다.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일 곡이라는데, 악보를 보니 마치 외국 곡 같았다고. 드라마 작가가 썼다는 가사 역시 마음에 들어 녹음했다는 곡이 바로 박건의 최대 히트곡이자 불후의 명곡으로 꼽히는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었다.
박건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루루루루루 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루루루루 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루루루루 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첫 반응은 2년 전 <사랑은 계절따라>만큼 빠르진 않았다. 그러나 2년 반 후인 1973년, 박건은 MBC TV의 <무궁화 인기가요>란 프로그램에 나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부르기 시작했고, 5개월 동안 토요일마다 그 노래를 부르고 무궁화 다섯 개를 받으며 그제야 난리가 났다.

이후 송창식, 김추자, 조용필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리메이크 버전을 내기도 했지만 원곡만큼의 유명세는 끌지 못했다.

2.4. 현재

현재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원로가수로서 가요무대에 심심치 않게 출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19년 10월에 신곡 <엄지손가락>을 발표했다.

3. 대표곡

4. 수상



[1] #[2] #[3] 주민등록상으로는 1941년생[4] 두 별명 모두 그의 최대 히트곡인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첫 가사인 '지금도 마로니에는'에서 나온 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