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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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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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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기 생애3. 주교 시절4. 재위기간5. 사망6. 사후 시복 및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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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오로 6세의 생애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초기 생애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주에 있는 마을 콘체시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르조는 변호사, 기자, 이후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19세인 1916년 5월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1922년 25세의 나이로 교황청 국무원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바티칸에서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폴란드에서 교황 대사로 근무했는데, 바티칸 외에서의 유일한 외교 경력이었다. 당시 신생 독립국이었던 폴란드는 같은 시기에 특히 동유럽 국가들에서 주로 두드러진 배타적 민족주의가 팽배했고, 이로 인해 그도 어려운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교황청으로 복귀할 때 매우 기뻐했다고 하며, 훗날 "내 생애에서 유용하긴 했지만, 단 한 순간도 즐거운 일이 없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을 정도였다.

교황 비오 12세 재위 시절, 그는 바티칸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원의 주요 인물이었고, 비오 12세의 개인 비서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비오 12세에게 전달되는 청원, 기도을 받고 이에 대한 답신을 교황의 명의로 보내는 업무를 담당했다. 아울러 비오 12세의 지시에 따라 2차대전 당시 실종된 이들(주로 포로, 난민)에 관한 정보 요청을 받고 답변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1948년 제3차 유엔 총회에서는 교황 비오 12세의 명을 받들어, 교황청 외교 업무 총괄 책임자로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국제적 합법성 승인을 위해 장면을 정부 수석대표로 하는 한국 정부 대표단을 지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 주교 시절

1954년 밀라노 대교구장이었던 알프레도 일데폰소 슈스테르 추기경이 임종하자, 비오 12세는 당시 몬시뇰이었던 몬티니를 후임자로 지명했다. 동시에 그는 대주교로 서품되었다. 사목표어는 'Cum Ipso in Monte(동산에서 그 분과 함께)'. 비록 밀라노가 로마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밀라노 대교구는 이탈리아 내 최대의 가톨릭 교구였고,[1] 당시 비오 12세는 자신의 비서로 오랫동안 수고한 몬티니의 밀라노 대주교 임명을 "밀라노에 대한 나의 개인적 선물"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자신의 배려를 강조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외견상의 직위에 비하면, 밀라노 대주교 시절 그의 발언권은 그다지 강한 편이 못되었다. 이는 당시 비오 12세의 강력한 신임을 얻고 있던 측근 파스칼리나 수녀, 스펠만 추기경[2] 등 당시 바티칸 내 전통주의 진영의 존재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 예로 몬티니 주교는 파스칼리나 수녀와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기막히게도 몬티니 '주교'가 일개 '수녀'인 파스칼리나에게 갈굼을 당하는 관계였다. 가톨릭의 보수적인 상하관계상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파스칼리나 수녀는 교황을 등에 업은 데다가 괄괄하고 깐깐한 성격에 워킹머신이라 불릴 만큼 빠르고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였지만, 몬티니 주교는 정반대로 소심한 성품에 느긋한 일처리 스타일이었는지라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참 많이도 갈굼당했다고 한다. 비오 12세도 그런 몬티니 주교를 답답하게 여겨 "파스칼리나 수녀님에게 ABC부터 다시 배워오라." 하고 핀잔하기도 했다. 앞서 서술했듯 몬티니도 바티칸에서 오래 근무하며 비오 12세의 개인 비서로 재직하는 등 나름 가까이서 근무한 인물이었지만, 교황 이전부터 근무했던 파스칼리나 수녀보다는 아무래도 신임을 덜 받았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

게다가 몬티니가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될 당시의 대우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몬티니의 전임자를 포함해서 역대 밀라노 대교구장은 임명과 함께 추기경으로도 서임받음이 관례인데도 불구하고, 몬티니는 대주교에 서임되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3][4] 이 부분도 파스칼리나 수녀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몬티니가 비오 12세 시절 찬밥 신세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역시 비오 12세와 오랫동안 가까이 근무했던 인물로서 바티칸 내에서 주류는 아니었을지언정 꾸준한 신임을 얻으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단지 같은 시절에 활동한 파스칼리나 수녀의 발언권, 영향력이 과장된 형태로 알려지면서 가려진 측면이 있을 뿐.

성격이 소심하지만 특유의 매력과 카리스마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 23세도 자기가 죽은 뒤에 콘클라베에서 몬티니 추기경에게 표가 모여 교황으로 당선되리라 예상하였고,[5]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4. 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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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bino_Luciani,_1973_(2).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pa_Paolo_VI_e_cardinale_Karol_Wojtyla.jpg 파일:external/loradelsalento.diocesilecce.org/paolovi.jpg
교황과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 교황과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 교황과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1978년 3월 16일, 바오로 6세의 절친한 친구인 알도 모로이탈리아 총리붉은 여단에 납치당했다. 모로는 교황이 나서서 구해주기를 호소했고, 이에 바오로 6세는 모로를 조건 없이 석방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붉은 여단 앞으로 보냈다.
"나에게는 당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그를 위대한 인류의 동포로서 그리고 학창 시절의 친구로서 -더 특별하게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로서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의 한 아들로서 그를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제발 모른 척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빕니다. 부디 알도 모로를 아무 조건 없이 무사히 풀어 주십시오. 나의 이 겸손하고 선의에 찬 간청을 봐서가 아니라, 그저 그가 당신들과 똑같이 존엄성을 가진 인류의 한 형제라는 점을 생각하시고 꼭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붉은 여단 형제 여러분, 나한테,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나한테 당신들의 가슴 속에서 박애 정신이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내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여러분으로부터 좋은 대답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ㅡ 항상 여러분을 사랑하는 교황 바오로 6세 올림.

위 내용을 보면 "내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빕니다." 라는 대목이 있을 만큼 정말 필설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테러분자에게 저자세로 나갔다는 일부의 비난을 무릅쓴 교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로는 5월 9일 로마의 한 자동차 안에서 총을 맞은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80세의 고령이라 건강이 좋지 못했던 교황은 친구를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더욱 쇠약해졌다. [6]

이후 바오로 6세는 1978년 7월 14일에 바티칸을 떠나 20km 떨어진 카스텔간돌포에 있는 교황의 여름 별궁에 갔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그는 이탈리아의 새 대통령 산드로 페르티니와 두 시간 동안 만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저녁 시간에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창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다.”라고 말한 때가 바오로 6세가 평온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는 곧 호흡에 문제가 생겨 산소를 요청하였다. 다음날 일요일,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날, 그는 피곤하였지만 삼종기도를 하였다. 체온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거동이 힘들어진 바오로 6세는 침실에 드러누웠다.

침대에 누운 채로 그는 주일 미사에 참례하였다. 노자성체를 모신 후, 교황은 3시간 동안 심근경색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병마와 싸웠다. 1978년 8월 6일 밤 9시 40분(한국 시간 8월 7일 오전 4시 40분) 교황 바오로 6세는 카스텔간돌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교파를 불문하고 모든 크리스천을 포용하신 분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
교회의 가장 모범적인 사도
빌리 그레이엄

바오로 6세의 시신은 카스델간돌포에서 2일간 7만여 명의 참배를 받은 뒤, 8월 9일 오후 6시 아무런 장식도 되지 않은 소박한 삼나무 관에 실려 로마까지 가도에 늘어선 조문객들 사이를 지나 운구되었다. 그리고 8월 12일 생전의 유언에 따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경건하고 간소하게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다른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141560829.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70px-Gr%C3%B3b_B%C5%82._Paw%C5%82a_VI_w_Watykanie.jpg
바오로 6세의 시신 바오로 6세의 무덤[7]

6. 사후 시복 및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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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따라 몬티니는 밀라노 대교구장 서임으로 이탈리아 주교회의 의장까지 겸하게 되었다.[2] Francis Spellman, 생몰 1889-1967. 당시 미국추기경으로서 일명 미국의 교황으로 불릴 만큼 미국 가톨릭계에서 권력이 막강했으며, 비오 12세의 신임을 바탕으로 바티칸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말년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행보를 보이다 결국 금전 스캔들에 휘말려 은퇴했다.[3] 결국 몬티니는 요한 23세가 교황에 즉위한 1958년에야 비로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4] 굳이 변명을 하자면 몬티니는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지명될 당시 몬시뇰(명예 직함으로 공식 직위는 평사제)이었고, 아직 주교도 아니었다. 만약 추기경으로 서임하려면 무려 3계단(주교 → 대주교 → 추기경)을 한꺼번에 승진하는 것인데, 이러면 도리어 무리한 승진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었다.[5] 요한 23세는 바티칸에서 오래 근무한 몬티니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왔고, 교황으로 당선된 후 발표한 추기경 임명에 몬티니를 포함시켜 자신의 신임을 드러냈다.[6] 이는 붉은 여단에게 악수 중의 악수가 되었다. 이후 5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자 여론이 극도로 악화 되어 버렸고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버렸다. 그 상태에서 미 육군 도지어 장군을 납치하는 일까지 벌이자 미국도 붉은 여단 박멸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고, 도지어 장군 구출작전 때 핵심 멤버들이 다수 사살, 체포당하면서 조직이 유명무실한 상태로 몰락하였다.[7] ‘BEATVS(복자)'로 적혀 있는 것을 보아 2018년의 시성 이전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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