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피소드 | ||
1412년 ~ 1420년 | 1화 ~ 12화 | 펠로폰네소스 원정 |
1420년 ~ 1421년 | 13화 ~ 45화 | 아테네-이피로스 정복 전쟁 |
1421년 | 46화 ~ 59화 | 정변기 |
1422년 ~ 1423년 | 60화 ~ 124화 | 제1차 대오스만 전쟁 |
1423년 ~ 1428년 | 125화 ~ 176화 | 1차 전간기 |
1428년 ~ 1432년 | 177화 ~ 225화 | 세르비아 십자군 |
1432년 | 226화 ~ 247화 | 제2차 대오스만 전쟁 |
1432년 ~ 1435년 | 248화 ~ 277화 | 2차 전간기 |
1435년 ~ 1436년 | 278화 ~311화 | 나폴리 전쟁 |
1436년 ~ 1438년 | 311화 ~ 356화 | 제3차 대오스만 전쟁 |
1438년 ~ 1445년 | 357화 ~ 377화 | 재건기 |
1446년 ~ 1448년 | 378화 ~ 407화 | 맘루크 전쟁 |
- | 408화 ~ 410화 | 그 후 |
맘루크 전쟁 | ||
시기 | 서기 1446년 3월 8일 ~ 1448년 4월 2일 | |
장소 | 로도스 섬, 보스포루스 해협, 아나톨리아, 에게 해 | |
교전 국가 및 세력 | 동로마 제국 구호기사단 헝가리 왕국 알바니아 왕국 [[폴란드 왕국| ]][[틀:국기| ]][[틀:국기| ]] 세르비아 왕국 [[왈라키아 공국| ]][[틀:국기| ]][[틀:국기| ]] 아라곤 왕국 | 맘루크 왕조 오스만 술탄국 |
지휘관 |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 돈 프란시스코 할리드 무르타트 장 드 라스티그[1] 후녀디 야노시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라자르 브란코비치 미르체아 2세 브와디스와프 3세 알리폰소 5세 | 자히르 쟈크마크 무라트 2세‡ 찬다를르 할릴 파샤‡ 메흐메트 2세† 자아노스 파샤† 이스하크 파샤† 이브라힘 베이† 투라한 베이† |
병력 | 동로마 전선 31척 아라곤 전선 26척 베네치아 전선 6척 제노바 전선 8척 아나톨리아 야전군: 12,000명 알바니아 병력: 3,500명 왈라키아 병력: 1,000명 세르비아 병력: 3,000명 헝가리 병력: 2,300명 폴란드 병력: 5,000명. | 맘루크 병력: 21,000명 맘루크 전선: 80척 오스만 병력: 20,000 ~ 30,000명 오스만 전선: 24척 |
피해 | 제국군 피해 다수 | 오스만 전선 19척 침몰 및 나포 맘루크 전선 47척 침몰 및 나포 오스만 육군 괴멸 |
결과 | 동로마 제국 연합군의 승리, 오스만의 완전한 몰락 | |
영향 | 아나톨리아의 수복, 아나톨리아의 서부 해안에서의 맘루크 철수 |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10년의 휴전이 끝나고 맘루크 왕국과의 본격적인 충돌을 다룬 문서로 1446년부터 종전 4년 뒤인 1452년 황제의 서거까지 다루고 있다.2. 맘루크의 압박
작중 처음으로 기나긴 평화를 맞이하면서 제국은 그동안 상상치 못한 일상과 번영을 누리며 차츰 옛날 상처들을 하나하나 지워내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줄 알았건만, 휴전 만료를 2년 앞둔 1446년 초에 맘루크 함대가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구호 기사단이 지키고 있는 로도스 섬을 점령할 목적으로 키프로스 섬으로 진군한 뒤, 에게 해 일대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 때문에 어느덧 16세가 된 헬레네와 블라드 2세의 차남 미르체아 2세와의 약혼 성사, 삼남 블라드 3세[2]의 제국군 종사 선언 등 황실의 소소한 경사들이 가려지게 된다. 어쨌든 황제는 해군 제독을 맡고 있던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제노스와 토마스 부제 등 각 분야에서 고생 중인 참모들을 소집해 대책을 마련하게 된다. 다행히 지금 당장 맘루크가 제국을 침공하는 미친 짓은 강화된 제국군과 용기사단 등의 동맹 때문에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면서도, 제국 해군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오스만 함대를 어찌 상대할 지 생각하다가 옛날 네에파트레 전투 때 도시와 함께 모든 걸 불태운 그리스의 불을 써보기로 하며, 전쟁의 혼란을 틈타 에게 해 방위를 이유로 아직 남겨두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식민지도 되찾을 계획을 세운다.그렇게 조용히 준비하며 정세를 관망하다가 그해 3월 8일, 맘루크 함대가 작정하고 로도스 섬에 상륙하는 비보가 알려져 본격적으로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맘루크의 술탄, 자히르 자크마크의 시점이 잠시 나타나는데, 그는 지금 못한다면 동부 지중해로의 진출 자체가 영원히 불가능 하리라는 걸 알았기에, 더 늦기 전에 동지중해와 에게 해의 섬들을 미리 장악해 재해권을 반드시 탈취하리라는 야망을 드러낸다. 이렇게 되어 침공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머지 않아 콘스탄티노플에도 알려지게 되고, 황제와 참모진을 제외한 민중들과 의회는 오랜 평화 중, 갑작스런 맘루크의 침공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평화의 시대 속에서 반발을 설득해가며 과대한 군비를 유지해온 황제의 판단에 대해 모두 감탄하게 되고, 그런 여론에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 황제가 직접 의회에 나서 이젠 신앙이 아닌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아나톨리아를 되찾을 시간이라며 호소하자 이에 감동한 의원들의 만장일치로 맘루크와 오스만에 대한 개전 결의안이 통과된다.
3. 로도스 공방전
이렇게 제국이 대응을 준비하는 동안 43척의 맘루크 함대는 1만 1천명 가량의 병력을 순차적으로 상륙시키게 되는데, 비장의 수단이랍시고 가져온 사석포는 정작 처음 운용하는 지라 전문적으로 활용했던 전성기 오스만과 달리 미숙한 면들이 곳곳에서 노출되어 시작부터 많이 삐그덕대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게 된다.[3] 또한 몇 달 전부터 맘루크의 침공 위험을 느끼고 있었던 구호기사단은 진작에 기사단 자체 선단을 제국 해군 집결지인 테살로니카로 피항해두었고, 제국을 통해 사석포를 비롯한 화포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맘루크의 간헐적 포격에도 사기에 큰 지장을 받지 않고 그때마다 피해 복구만 하며 농성하자, 이를 보다 못한 맘루크군은 포격을 포기하고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이후로도 작중에서 계속 공세를 퍼붓고 있긴 하지만 로도스 요새는 모든 공세를 다 막아내고 여전히 굳건히 유지되고 있음
4. 다르다넬스 해전
로도스 섬이 본격적인 공성전에 돌입함과 동시에 맘루크는 제국을 압박하면서 추가 증원될 맘루크 원정군을 지원하라는 의미로 오스만에게 참전을 요구하였고, 할릴 파샤는 참전에 응하면서도 혹시나 제국군 별동대가 기사단의 지원을 받고 이즈미르로 기습 상륙을 벌일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부르사와 갈리폴리 일대에 머물고 있던 오스만 함대를 이즈미르로 보내려고 한다. 허나 지나가던 민간 상인들로부터 오스만 함대의 기동 정보를 입수한 테살로니카의 제국 함대 사령부는 오스만 함대가 해협 밖으로 나가는 걸 막기 위해 신속히 출항하였고, 결국 오스만 해군은 충돌 직전 배를 돌려 해협 안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한편, 이 소식을 모두 보고받은 황제는 오랫동안 준비해 둔 아나톨리아 야전군을 바로 오스만령 갈리폴리로 진군시켜 최후의 요새들을 포위, 거기다 이참에 오스만 해군을 일망타진하고 바로 도해하려는 목적으로 실제 메흐메트 2세의 전략이기도 한 군함 4척[4]을 들고 반도를 횡단해 적 함대의 퇴로를 차단해 버리는 기상천외한 전법을 구사한다.[5] 또한 그렇게 준비하면서 오스만 해군의 괴멸 후 제국 육군의 아나톨리아 도해를 염두에 두고 헝가리, 알바니아 등 드래곤 기사단의 가맹국들에게 소집령을 내리게 되면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5월 17일 밤, 2달 동안의 대치 끝에 오스만 해군은 후방 콘스탄티노플 방향에서 어선으로 보이는 수많은 작은 배들과 그 사이에 있던 제국 군함 4척이 접근하는 걸 발견하고 비상 태세에 돌입한다. 오스만 해군은 바로 화살 공격을 하여 제국 함대를 견제하려고 했으나 순간 가만히 있었던 전방의 제국 함대가 일제히 진격을 시작한다. 처음 오스만 해군은 제국이 그리스의 불을 해전에 쓴 전적이 없으니 여유롭게 충각과 근접 백병전으로 후방을 정리하고 맞받아칠 생각이었으나, 그 후방에 있던 제국 함선들이 그리스의 불을 내뿜기 시작하면서 군함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화염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으나 제국 함대가 끌고 와서 버리고 간 수많은 배들이 해로를 차단하면서 좌절된다. 이러한 혼란에 빠지자 노꾼으로 끌고 온 아나톨리아 출신의 기독교 노예들이 일제히 선상 반란을 일으키면서 전의를 상실한 오스만 해군은 결국 화염을 뒤집어 쓰지도 않고 선상 반란도 진압한 5척의 함선을 제외한 모든 함선들이 전소되거나 격파 및 나포당하는 참패를 당한다.
이렇게 오스만이 제해권을 상실하면서 제국이 콘스탄티노플 방면과 이즈미르 방면으로 아나톨리아를 침공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고 누구보다 먼저 이 소식을 받은 부르사 궁정의 메흐메트 왕자는 이번에도 할릴 파샤가 7년 전처럼 실리 만을 쫓아 제국과 타협할 거라는 확신을 가진다. 또한 계속 칩거 중인 아버지 무라트가 후처를 들였다는 소문도 있고, 할릴이 자신을 미리 팽하고 제국과 협상하기 전에 자신이 직접 칼을 뽑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결의를 드러내며, 예니체리를 소집한다.
5. 오스만 친위 쿠데타
오스만 함대의 붕괴 직후 원정군 사령관을 맡은 토마스 황태제는 상륙 이후 무리한 전격전 대신 첫 거점인 아비도스 지방에 확실한 보급 기지 구축을 우선시하면서 갈리폴리 잔존 요새 함락과 갈리폴리 시 교외 지역에 맘루크 함대의 테살로니카 봉쇄 시 임시 보급 및 무역 거점으로 삼을 마을과 항만 건설에만 힘쓰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한편 해협이 돌파당한 오스만 정부 측은 초 비상사태에 직면했고, 그동안 남쪽 이즈미르에 진격할 줄 알았던 할릴 파샤는 맨붕하면서 모든 가용 병력을 아비도스 지방에서 저지선을 세우도록 이스하크와 투라한에게 지시하는 한편, 그것마저 돌파 당하면 최소한 수도 부르사와 이즈니크[6]라도 사수할 준비를 하려고 했다.허나 6월 1일이 되면서 모든 예니체리를 소집한 메흐메트 왕자는 할릴이 눈치채기도 전에 바로 집무실로 들이닥쳐 할릴 파샤를 체포했고, 그 후 별궁에 있던 무라트의 하렘으로 쳐들어가 자신의 라이벌이 될 수도 있을 이복동생들[7]을 죽이거나 자기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해 잡아 내려는 행보를 보이게 된다. 그렇게 이복형제들을 쳐낸 뒤 곧바로 술탄의 궁으로 향해 무라트 2세와 조우하고 거기서 실제 역사에서 했던 발언을 조금 비틀어서[8] 아버지에게 선위를 강요한다. 허나 오래전부터 방구석 폐인이 되어 버린 무라트 2세는 별 저항도 없이 결국 독이 든 포도주를 받아 마셨고 그대로 허무하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무라트가 독살된지 4일이 지난 6월 5일, 제국의 첩자라는 누명을 쓴 할릴 파샤가 재판 끝에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재상파는 완전히 숙청당했고, 이 모든 정변의 중심에 서있던 메흐메트 왕자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메흐메트 2세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직후 메흐메트는 곧장 아비도스 저지선에 있던 이스하크와 투라한에게 제국군과 상대하지 말고 부르사로 철수하라고 하는 한편 비정상적인 정변에 반발할 수많은 토후들을 염두에 둔건지 여차하면 이즈미르가 있는 남서부 해안가 지방 방위를 포기하고 최후의 직할령인 앙카라로 후퇴해 옛날 제국이 수십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반대로 맘루크의 방파제
6. 아비도스 전역
메흐메트 2세의 친위 쿠데타 소식은 곧 주력군을 이끌고 제국과 대치하던 이스하크와 투라한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스하크는 메흐메트의 인격을 두고, 투라한은 메흐메트의 사병으로 전락한 예니체리의 처지에 대해 각각 불쾌한 반응을 보여주었으나, 일단 오스만을 살리기 위해 함께 메흐메트를 술탄으로 인정하며 술탄의 명령에 따라 주력군을 부르사와 이즈니크로 철수시킨다. 한편 이브라힘을 비롯한 토후파들, 특히 아이딘 지방과 이브라힘 베이의 출신지인 잔디르 토후국이 크게 반발하긴 했지만 무라트의 후처들도 거침없이 제거하는 메흐메트의 모습에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한다. 그렇게 위협 세력을 제거해 나가며 메흐메트는 과거 하즈 바이람 벨리가 들려준 예언을 떠올리며 이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예언이라 칭하면서도 그럼에도 아버지처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술탄이니 패해도 자신의 이름으로 패하겠다고 포효한다.한편 기독교 세계에서는 우선적으로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왈라키아가 제국과 함께 싸우기 위해 원군을 보내었고, 아비도스 전초 기지에 머물고 있던 토마스의 아나톨리아 야전군은 오스만의 쿠데타 소식과 함께 오스만 군이 방어선을 버리고 부르사 쪽으로 철수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제국 함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메흐메트가 포기한 이즈미르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이번에 새로 마련한 핸드캐논 부대의 활약으로 토후들의 군대를 손쉽게 박살내며 5전 연승을 보여주더니만 결국 첫번째로 마주한 요새 도시인 에드레밋(Edremit)[10] 을 포위 4일 만에 사석포로 깨부숴 함락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충격적인 소식에 패닉에 질린 토후들은 어쩔 수 없이 메흐메트 2세에게 지원을 구하기 위해 전령을 보냈고, 이에 메흐메트는 제국군 원정대가 맘루크 원정군을 의식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아비도스로 회군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최대한 내륙으로 끌어들인 뒤 상징적인 지역에서 결전을 통해 섬멸하라고 지시하다가 문득 이 전쟁에서 오스만의 처지는 옛날과 같이 무대 위의 주연이 아닌 장기말밖에 안되는 처지를 깨닫고 잠시 쓴 웃음을 짓게 된다.
한편 흐름이 마냥 맘루크에게 불리하게 흘러 가는 건 아니라는 듯 드래곤 기사단의 중추국인 헝가리가 신성 로마 제국이 북이탈리아에 손을 뻗치려는 프랑스와 분쟁이 생기며 지원에 난색을 표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11] 이 소식을 접한 맘루크의 자히르 술탄은 신성 로마 제국 측의 개입을 염두에 두면서 로도스 섬과 크레타 섬만 챙기려 했던 소극적인 태도를 벗어 던지고 제국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게 된다. 우선 자히르는 크레타 섬에 투입하기 위해 진군하던 2진 병력을 아나톨리아로 발길을 옮겨 메흐메트를 지원하는 한편 원래 계획에도 없던 3진 원정대까지 추가 편성할 준비를 세우게 된다. 이렇게 몰려오기 시작한 대규모 맘루크 함대는 집결하자마자 로도스 섬 너머의 에게 해로 돌진했고, 한참 아나톨리아 야전군을 해상 지원하던 제국 함대는 황급히 그리스의 불로 막기 쉬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피신해버린다.
그러나 맘루크도 생각하지 않았던 알리폰소의 아라곤이 갑자기 제국에 도움을 주기 위해 참전을 선언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알리폰소는 다시 재점화된 이탈리아 분쟁에 무리하게 개입하기보다는 안전하게 이교도이기도 하면서 미래의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맘루크를 미리 밟아놓아야 겠다고 계산했는지, 교황에게 자신이 동방 제국을 도울테니 이전의 형벌을 완화해달라 부탁하고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12] 단숨에 26척의 함대를 모으는데 성공한다. 한편, 후냐디도 난처한 처지였지만 마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고, 알브레히트 황제를 설득한 끝에 없는 병력을 쥐어짜 2,300명을 지원군으로 보내는 한편, 한창 튜튼 기사단과 검우 기사단을 밀어붙이며 기세를 올리고 있던 폴란드의 왕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도 원군을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해 폴란드와 몰다비아 공국도 참전하도록 이끌어낸다.
이렇게 각 국가에서 참전 준비가 이루어지는 동안 황제는 친정 대신 흑양 왕조에 대해 이간질을 행사하여 흑양 왕조의 영향력 아래 있던 둘카디르 토후국과 에레트나 토후국이 오스만령 옛 카라만 지방과 맘루크의 속국인 라마잔 토후국을 기습 침공하는데 이끌어냈으나, 메흐메트 2세도 이 상황을 예견했는지 맘루크 측과 긴밀히 협의하여 둘카디르와 에레트나에 대한 맘루크의 독립 보장 철회를 이끔과 동시에 흑양조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린 이들을 공격하게 유도해 버리면서 황제의 계획과 다르게 아나톨리아의 정세가 점점 난잡해진다. 이를 한 달이 지난 9월 말이 돼서야 조지아의 사신을 통해 모든 소식을 접한 황제는 격변하는 정세의 배후에 메흐메트 2세가 제대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메흐메트의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후대가 고생하기 전에 꼭 죽여야 겠다고 결심한다.
일단 9월에 접어들면서 갈리폴리 반도의 오스만 요새와 아비도스의 마지막 요새도시였던 라프세키(Lâpseki)[13]를 거의 동시에 함락시킴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의 재해권과 아비도스 지방 평정이 마무리되었고, 먼저 참전 선언했던 동맹 겸 속국 병력들[14]이 아비도스로 집결하면서 원정군은 2만에 달하게 된다. 이를 부담으로 여겼던 맘루크는 2진 선견대를 아야 술룩(Aya Suluk)로 파견해 남하가 임박한 제국 원정군을 견제했고, 이에 오스만 정부 인사들은 환호했지만 그 이면을 꿰뚫어본 메흐메트는 한심하게 여기면서 투라한을 아비도스 접경 도시인 아이딘시크[15]로 보내 제국군의 동진을 견제하는 한편, 제국이 이즈미르로 반드시 내려 오리라고 여겼기에 이스하크에게 오스만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즈미르를 무조건 사수하라는 뜻에서 8천이나 되는 병력을 보내준다.
이렇게 현장에 도착한 이스하크는 에드레밋의 선례를 보면서 병력만 낭비되는 수성전은 포기하고 원정군의 병력이 양분되게 하려는 의도로 내륙의 베르가마(Bergama)를 일부러 미끼로 던지는 유인책을 시행하였는데, 이 판단은 잘 먹혀 제국 원정군이 베르가마를 접수하긴 했지만, 오히려 후방 급습 우려 때문에 갑론을박[16]이 벌여지다가 토마스의 판단으로 남진을 멈추게 되어 페르가몬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화된다.
이 결정으로 인해 아비도스 지방에서 페르가몬 주변 지역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안정화하긴 했으나, 그 대신 에페소스 근처에 상륙한 맘루크 군의 합류를 저지하지 못했고, 제국 원정군의 돈좌 소식을 접한 부르사의 메흐메트 2세 또한 자아노스와 함께 이즈미르로 친정을 하게 되면서, 1447년 3월 4일 메흐메트가 끌어모은 4천의 병력과 이스하크, 이브라힘, 마지막으로 맘루크의 선견대와 합류하여 원정군보다 많은 총 3만 4천의 규모의 군세를 편성하는데 성공한다. 이번 전쟁으로 아나톨리아 진출에 사활을 건 맘루크는 시아파와 수니파로 대표되는 종교 갈등에도 불구하고 흑양 왕조와 손을 잡았으며 에레트나와 돌카디르의 라마잔 침공으로 번 시간마저 이제 한계라는 이민국의 정보에 토마스는 자신의 결정을 자책하지만 대신에 페르가몬을 요새화함으로써 주요 전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는 제르지의 위로를 받게 된다.
7. 사모스 해전
육지에서 정세가 고착화 되어 가는 동안 70척 규모로 불어난 맘루크 함대는 무리한 해협 진입과 아라곤 함대와의 충돌 대신 로도스 섬과 이즈미르를 비롯한 주요 보급 항구인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도시 방위에만 신경 쓰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아라곤에서 출발한 아라곤 함대 26척과 제국과 맘루크 술탄국으로 인한 식민지 상실을 저지할 생각으로 온 베네치아 함선 6척, 제노바 함선 8척이 테살로니카에 별 문제 없이 합류해 총 71척의 연합 함대가 구성된다. 이렇게 테살로니카에 모인 이들은 황제를 존중하는 뜻에서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고 맘루크 해군의 취약점들을 까면서 하나 둘 전해준다. 이렇게 맘루크 함대가 조류에도 약한 얼치기 군대라는 걸 알게 된 디미트리오스는 제노바 해군 참모의 조언에 따라 이즈미르 일대에만 쳐박혀 있는 맘루크 함대를 제노바령 사모스 섬[17]으로 끌어내 싸워보자는 결심을 낸다.이에 따라 제국 함대의 남하 소식을 접한 맘루크의 함대는 제국 측의 계략대로 로도스로 남하하는 길을 택하고 이 사실을 들은 메흐메트는 해전은 이미 졌다고 단정지으며 한탄하면서, 제국 총사령관 토마스가 가만히 있는 건 이해가 가지만[18] 그의 밑에 있는 제르지 카스트리오티가 가만히 있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아니나 다를까 제르지도 뭔가 구상중이었다는 게 밝혀지는데, 그건 이즈미르와 오스만 수도권을 연결하는 도시인 칼라모스를 쳐서 오스만의 허리를 끊고 잔여 병력을 끌어내 섬멸하는 것이었다.
며칠 뒤, 로도스 섬으로 남하하던 60척의 맘루크 함대는 사모스 섬 동쪽 미코노스 해협에서 저지선을 구축한 아라곤-베네치아-제노바 연합 함대를 만나 교전에 들어가게 되는데 수적 우위에도 끝내 돌파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뭉쳐있기만 하다가 결국 사모스 섬 해변 여기저기에 매복해 두었던 제국 함대가 맘루크 함대 후방에 기습해 그리스의 불로 불태워버리면서 맘루크 함선 47척이 격침하거나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번 해전에서 어마어마한 손실을 본 맘루크 측은 당연히 경악했고, 술탄 자크마크는 전의를 상실했는지,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로도스 섬의 1진 병력을 고립 당하기 전에 철군시키고 한참 준비 중이던 3진 편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또한 해전이 벌어지던 비슷한 시기에 제르지의 별동대가 칼라모스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아비도스 동부 경계선을 담당하던 투라한 베이의 병력이 이들에 맞서 싸웠고 그렇게 밑에서 싸우는 사이, 이즈니크(니케아)가 있는 옵시키온(Opsikion) 지방이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버리자 황제는 잔다르 토후국 측에 미리 말한 대로 오스만의 뒤통수를 갈기게 유도하는데 성공시킴과 동시에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헝가리, 폴란드, 몰다비아 병력과 함께 이젠 의미가 없어진 루멜리 히사르 요새를 돌파해 이즈니크로 진격하기 위한 본격적인 친정에 나서게 된다. 그와 함께 페르가몬의 토마스도 전설이 끝나고 있다는 걸 직감하면서 오스만 본대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게 된다.
7.1. 죽음의 체스
이 모든 사실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게도 전달되고 황제는 제르지의 수를 이용하기 위해 잔다르에 사신을 보내기로 하는데 예상 못한 경우가 하나 있었다. 바로 과로로 인한 본인의 악화된 몸 상태로 이를 가장 먼저 눈치 챈 요안니나가 휴식을 권유하여 그때부터 휴식이란 걸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황제의 보좌관인 스프란체스도 이 사실을 빨리 눈치채고 자신이 알아서 황제의 대리 직책을 수행하며 황제의 부담을 줄여주려 노력한다. 그 덕에 휴식 시간을 번 황제는 테라스에 앉아서 누군가와 이야기 하는데...그는 바로 원래 현대인이던 드라가시스를 멸망 직전의 로마 제국으로 보낸 장본인인 사신이었다.
사신은 자신이 예상한 바는 아니었지만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며 칭찬하면서 황제가 너무 무리한 나머지 죽을 때가 가까워 왔다는 이야기를 전하게 되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소피아를 불안해하는 황제에게 황제가 죽은 뒤 제국의 미래를 예측하자 하면서 여기서 자신이 이기면 비슷한 일을 한 번 더하고 황제가 이긴다면 그의 죽음에 3년의 유예를 주겠다는 사신과의 체스[19][20]를 제안한다.
내기에 앞서 사신은 선의[21]에서 시작된 일이라며 원망하지 말라고 운을 뗀다. 이에 황제가 인간의 영혼을 멋대로 건드는 당신은 악마라고 경멸하자 사신은 오히려 자신은 당사자와의 공정한 거래를 통해 영혼을 가져간다면서 이게 다른 세계의 문명을 수호하는 일이라고 답한다.
황제는 사신이 사람이 아니라 확신하며 미래를 알고 있는 사신과 미래를 알 수 없는 자신의 내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말하지만 사신은 그 전에 제국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라며 예상과 달리 3개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그에 따라 황제에게 미래의 환상들을 보여준다.
1. 이 세계관에서 제국의 무슬림들이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되겠는가?
2. 파편화된 제국을 다시 하나로 엮기 위해 민회와 의회를 만들었는데, 이 민회와 의회가 미래에 등장할 야망에 가득 찬 황제들과 힘겨루기를 하였을 때, 과연 승자는 의회인가? 황제인가?
3. 그런 비극을 보았음에도 토마스를 여전히 황제가 생각하는 제국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 보는가?
2. 파편화된 제국을 다시 하나로 엮기 위해 민회와 의회를 만들었는데, 이 민회와 의회가 미래에 등장할 야망에 가득 찬 황제들과 힘겨루기를 하였을 때, 과연 승자는 의회인가? 황제인가?
3. 그런 비극을 보았음에도 토마스를 여전히 황제가 생각하는 제국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 보는가?
이에 대한 황제의 답은 첫 번째 문제의 미래[22]는 예상했으나[23], 두 번째 문제의 미래[24]는 예측에 실패한다.[25] 본인의 수명과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마지막 질문을 하기 전, 사신이 강조하는 대화[26]에서 해답을 떠올리며 믿는다는 대답[27]을 한다.
그런 마지막 대답을 들은 사신은 웃으면서 황제, 당신이 이겼다며 경의를 표한 후 3년 뒤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앞에 있었던 일들이 꿈이였다는 걸 깨달았고 그와 함께 건강이 회복되는 걸 느낀 그는 꿈에서 보았던 절망적인 미래가 일어나지 않도록 회복된 만큼 열심히 업무에 집중하게 된다.
8. 결전
8.1. 옵시키온 전선 붕괴
보스포러스 해협을 도해한 황제의 연합군 병력은 순식간에 루멜리 히사르를 돌파하여 첫번째 목표인 이즈미트(니코메디아) 부근에 도착하게 되는데, 도시를 점령하는 것에 앞서 미리 와서 공성 중이던 잔다르 토후국 측을 토사구팽할 작정으로 4천명의 잔다르 병력에 대해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오스만보다 약했던 잔다르 토후국은 헝가리의 흑군과 폴란드의 후사르 기병 앞에 순식간에 무너져버렸고, 그대로 멸망당하게 된다.[28] 잔다르 토후국을 제압한 황제는 이후 이즈미트를 비롯한 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들에 약탈이 아닌 회유로 대했고 이로 인해 니코메디아를 시작으로 수많은 크고 작은 도시들이 귀순하더니만, 9월 2일에 이즈니크가 제국에 자발적으로 항복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이즈니크, 아니 니케아의 귀순으로 수도 부르사가 적 코앞에 이르게 되자, 아나톨리아의 이맘들은 이게 다 오스만의 괜한 자비로 힘 낭비하다가 이렇게 된 거라는 근본주의적 결론을 내리며 절망했고, 칼라모스 일대에서 제르지의 부대와 계속 싸우고 있던 투라한도 마찬가지로 절망하면서 자신이 사람이 아닌 칼로만 생각하며 침묵을 지키면서 술탄에게 직언하지 않았던 것에 후회하며 아예 죽을 작정으로 전투에 임했다. 이에 제국군(알바니아) 측에서 8백 가까운 희생자가 나오긴 했지만 그만큼 아칸지도 보급도 받지 못하고 한계에 이르러 점점 버거울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10월 23일, 칼라모스를 눈 앞에 두고 투라한의 아칸지는 모두 궤멸당하고 투라한 본인도 전사해버린다.
투라한의 전사 후 오스만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29]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이스하크와 메흐메트는 마지막 일전으로 끝내보자는 심정으로 아직 제르지가 칼라모스 일대에 머물고 있는 틈을 타 이즈미르와 니프(님페온)을 포기하고 칼라모스로 진격하는 척하면서 중간 기점인 포카(포케아)에서 모든 걸 걸기로 하며 11월 30일 총공격을 개시한다. 이 소식을 접한 토마스도 마찬가지로 포카로 남진하면서 마지막 전투가 임박하게 된다.
8.2. 2차 칼라모스 전투
오스만 군이 이즈미르와 포카 중간 지점 쯤 도달했을 무렵인 12월 24일, 페르가몬과 칼라모스에서 동시에 제국군과 알바니아군의 남진이 시작되었단 보고를 받은 메흐메트는 제르지가 제국군에 합류하지 못하게 칼라모스 인근 예상 진격로에다 자아노스 파샤와 오천에 달하는 마지막 예니체리들[30]을 남겨두고 포카로 가던 길을 떠난다. 이렇게 만나 대치하게 된 양측은 서로 데브시르메의 배신자, 술탄의 짐승이라며 날카롭게 언쟁을 펼치다가 화살이 날라오면서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간다.이후 전투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밝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결전이 끝난 뒤 제르지와 휘하 알바니아 부대가 합류했다고 언급된 것으로 보아, 최후의 예니체리 부대는 모두 순절한 것으로 보인다.
8.3. 포카 전투
자아노스를 뒤에 둔 채 포카로 진군하던 메흐메트의 오스만 군대는 에르모스 강 부근에 제국군의 행군 흔적, 세우다 만 목책들을 발견하게 된다.그러자 이미 제국 군대가 포카에 도착해서 기지를 세우고 있다고 여긴 메흐메트는 강행군으로 서둘러 포카에 진군한 끝에 1448년 1월 4일, 제국 전진 기지가 보이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 허나 메흐메트를 비롯한 오스만 참모진은 황제보다 능력이 떨어졌던 토마스를 과소평가하던 터라 제국군의 편제 상태를 캐내어 그에 맞게 전략을 세웠고 오로지 승리를 위해 사사로운 갈등은 뒤로 한 채 단합을 이루면서 천천히 나아간다. 한편 포카의 전초 기지에 전투 준비를 하던 제국군 측에선 다가오는 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방어 상태 때문에 이에 대해 각 부대 마다 어떻게 해야 한다며 어수선하게 다투고 있었고 거기다 병사들이나 일부 부사관들도 토마스의 군재를 의심하고 있던 터라 토마스를 보좌하고 있던 라자르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던 토마스도 씁쓸해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장점이기도 한 경험을 통해 다양한 계략으로 맞붙을 오스만과 맞붙을 준비를 한다.그날부터 오스만의 파상 공세가 시작되고 이에 맞서 제국군의 중보병 부대가 이들을 저지해 첫 날엔 1:37이나 되는 높은 교전비를 보여주었지만, 그 후 이틀 내내 전면 공격이 아닌 사격 견제만 하면서 제국 보병대들을 지치게 만드는 한편, 제국 기병 라인인 왈라키아 부대가 섣불리 돌격하지 못하게 이브리힘 베이의 궁기병과 맘루크 부대가 견제하면서 결국 제국의 반격도 못하게 막아버린다. 이렇게 되자 상당히 적은 피해와 정반대로 제국군의 피로는 급증했고 반대로 줄곧 우울한 분위기였던 오스만 군대에 희망이 생기면서 병사들은 메흐메트를 찬양하며 사기가 크게 오른다.
그런 상황인지라 제국 병사들 사이에서 황제와 토마스를 비교하며 한탄하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고, 지나가다 그 말을 들은 토마스는 자신의 모자람을 곱씹었지만, 바로 떨쳐내고 오스만이 내일 새벽에 총공세에 들어가리라 예상하면서 철야 경계+방진 편성을 계획했다. 한편 메흐메트도 모두가 방심하는 시간인 동틀녁에 총 공격을 준비하자고 계획하면서 이에 따른 기습 공격 준비를 마치며 폭풍 전야 같던 1월 8일의 날이 저문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완전히 은신한 채로 전초기지 목책 앞까지 접근한 오스만 군은 제국군이 새벽임에도 전투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제국 병사들 모두가 피로에 찌들어 있다는 걸 알아채자 안심하고 정면 제국군에 돌격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다. 한편 후방의 맘루크 군대[31]는 이미 전의를 상실해서 짜증나긴 했지만 일단 메흐메트의 요청대로 제국 방진을 우회해 측면으로 돌격하려 했다가 핸드캐논 부대, 사깃타리의 일제사격에 한번 주춤하고 그 뒤에 왈라키아 기병대가 돌격해 기병간에 난전이 벌어진다. 허나 기병전에서 이골이 나 있던 맘루크 기병에게는 상대가 안되었기에 왈라키아 기병들이 하나 둘 쓰러져 직접 나섰던 미르체아와 헬레네 조차도 죽을 뻔했다가 급히 지원 온 블라드에게 구출받는 등, 많이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체력이 많이 고갈되어 있었던 제국 중보병들은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오스만 경보병들을 상대로 저항하다 결국 지쳐서 쓰러진 뒤, 바로 둔기로 두들겨 맞아 죽어나갔고, 전열 여러 곳에 생긴 틈에다 사깃타리가 사격을 퍼부어 전열을 넘는 오스만 병사들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버티다 못한 제국군 전열이 패주하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순간이 오자 패배를 예상한 라자르는 토마스에게 철수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그 순간에도 승리에 눈이 돌아간 오스만 군대의 진형이 흐트러졌다는 걸 본 토마스는 2세기 전, 테오도로스 1세가 했었던 것처럼 친위 부대로 남겨 두었던 라틴 기사와 스트라디오테 기병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돌격을 감행한다. 갑자기 나타난 최후의 중기병대의 등장에 당황한 오스만 경보병들은 도망가거나 창을 내밀어 막아보려고 했지만 거리가 너무 짧았던 지라 별 소용도 없이 로드킬 당하듯이 쓸려 나간다. 오스만 진형 사이를 뚫던 토마스와 기병대는 예니체리나 최소한의 근위대도 없었던 메흐메트를 향해 달려나가자 멀리서 병사를 지휘하던 이스하크와 이브리힘은 경악했고, 그들을 전면에서 지켜보던 메흐메트는 도망치라고 건의하는 한 병사의 건의를 거절한 뒤, 뭔가 생각하더니만 역으로 토마스를 향해 홀로 돌격하여 단 일합의 충돌이 벌어졌고, 이 짧은 충돌 직후, 짧은 유언[32]을 남긴 채 메흐메트 2세가 전사하게 된다.
오스만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메흐메트의 전사 후 구심점을 잃은 오스만 군대는 완전히 분열되어 다들 패주하려 했고, 이를 막기 위해 이브라힘과 이스하크가 패잔병들을 어떻게든 모아서 저항했지만, 제국군 측에서 마지막에 합류한 할리드의 무르타티 부대가 등장하면서 가볍게 분쇄당한다. 전장에 나선 할리드는 우선 이브라힘과 이스하크에게 각각 귀순을 권하긴 했지만, 그들은 귀순을 거절했고, 그렇게 끝까지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거기다 전투 중반부터 왈라키아 기병대에게 묶여 있었던 맘루크 기병대는 오스만의 붕괴를 확인하자 마자 더 이상 싸우는 건 개죽음이라 판단하여, 그냥 독자적으로 전장을 이탈해버렸고, 남아있던 오스만 병사들은 맘루크의 철군을 보고 절망하며, 도망가다가 제국 추격대들에게 전부 전멸당하면서 포카, 아니 이제 포케아로 불리는 평원 일대는 수많은 시신들과 피로 도배되어 끔찍한 참상만 남았지만, 마지막 결전은 제국의 완벽한 대승으로 마무리된다.
9. 종전
1448년 4월 2일 종전 이후 판도[33] |
한편 황제는 맘루크에게 서부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칼리프의 이름으로 군대를 철수시킬 것과 키프로스의 조차지 할양, 콘스탄티노플의 10년 관세에 해당하는 배상금이라는 관대한 조건의 조약을 제안하고, 자크마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아나톨리아에 대한 제국의 지배권이 확실시 되었다. 그 후 3달이 지난 4월 2일, 제국은 갈리폴리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는 개선식을 열어 황제와 황태제, 그리고 원정군을 환영하면서 상징적으로도 맘루크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한다. 의회와 교회 측은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한 황제에게 새로운 칭호를 올리기를 원했고, 격렬한 논쟁 끝에 황제는 무너진 세상의 재건자라는 칭호를 부여 받았다.[34]
허나 이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직감한 황제는 9윌 2일, 황제로서의 마지막 임무로 세 부인과 함께 아나톨리아 순방길에 나섰고, 콘스탄티노플에 남게 된, 부제 토마스도 황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뒤, 실질적인 로마인의 황제로 전설의 뒤를 잇게 된다. 그렇게 순방을 떠난 지 4년 뒤, 1452년 8월 22일. 사신과 거래한 대로 드라가시스 황제는 그가 이뤄낸 기적을 뒤로 한 채 생을 마감한다. 시호는 회생제, 향년 47세였다.
[1] 당대의 구호기사단 단장.[2] 블라드 2세의 장남은 가시공과 마르체아 2세와는 이복형제인 수도공 블라드 4세이며, 막내 라두 3세는 원 역사에서 메흐메트 2세 휘하의 예니체리로 참전하여 가시공과 대적했다.[3] 먼저 상륙 직후 사석포 운반 및 포대 구축에만 신경쓰느라 로도스 섬 일대의 마을 주민이나 기사단원들이 모두 요새 안으로 들어가 농성할 충분한 시간을 내주었다는 패착이 있고, 거기다 화포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공성에 별다른 효과를 주지 못했다.[4] 모두 그리스의 불을 탑재한 함선들이다.[5] 차이점은 주인공은 군함을 분해한다음 부품들을 옮겨서 다시 재조립하는 방식이다. 그 다음 부품을 옮기는 방식은 메흐메트 2세가 하던 전략.[6] 니케아[7] 2남 1녀[8] 무라트, 당신이 저의 술탄이라면 지금 일어나 그 자식들을 죽인 자를 벌하십시오. 허나 아니라면 지금 여기서 명하니 그대의 술탄을 맞이하라.[9] 이를 본 수많은 독자들은 맘루크가 곧 몰락할 텐데 저렇게 하면 오스만이 룸 술탄국 당시보다 더 암담한 처지로 굴러떨어질 것은 물론이며 아예 멸망의 지름길로 가게 될 거라고 메흐메트 2세의 결정을 조롱하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으론 이번 편이 현대(과거)인과 미래인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평하는 댓글도 있다.[10] 그리스 이름은 아드라미티온(Άτραμύττιον) 12세기경 중흥기에 요안니스 2세가 대 튀르크 방어용으로 축조한 요새도시로 건설 후 200년간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곳이다. 이후 튀르크 토후들이 잡아먹어서 잘 썼다.[11] 전의 지기스문트가 그랬듯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헝가리의 왕도 겸했기 때문이다. 즉, 신성 로마의 분쟁에 헝가리 군도 얄짤 없이 끌려가야 하는 것.[12] 레콩키스타의 이름으로 무슬림과 싸웠던 경험 덕에 제국의 처지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13] 그리스 이름은 람프사코스이다.[14] 제르지의 알바니아 군, 라자르의 세르비아 군, 블라드 2세를 대신해서 온 미르체아 2세와 헬레네 부부의 왈라키아 기병대, 그리고 블라드 3세가 이끌고 있는 제국 후속 부대[15] 그리스어론 키지코스라 부른다.[16] 세르비아의 라자르 왕은 경무장한 오스만의 군세가 빠르게 우회하여 후방을 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적극적인 남하를 주장했고, 반대로 원정군 총사령관 토마스는 함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들의 의도대로 내륙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페르가몬에 머무르며 주변을 안정화시키고 사수하자는 의견이었다.[17] 이즈미르와 로도스 섬 사이에 위치해 있기에 맘루크 입장에서 해로 차단이라는 생각으로 끌려나올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위치로 또한 지중해에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18] 신중하기도 하지만 황제보단 능력치가 떨어진다고.[19] 소설이 채용해온 게임인 크루세이더 킹즈에서 등장하는 사망 이벤트이다. 이기면 건강 수치가 오르고 지면 즉사 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까지 따라갈 수도 있다.[20] 사실 그 크킹의 이벤트도 영화 제 7의 봉인을 오마주한 것이다.[21] 그 선의란 운명을 바꾸길 원한 두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 것으로 주인공에게는 새로운 삶을, 본래의 콘스탄티노스에게는 미래를 바꾸는 대가로 인격과 자아를 거두어가면서 주인공의 인격이 콘스탄티노스의 몸에 깃든 것이다.[22] 당분간은 할리드를 위시한 무르타티의 영향력과 민회나 법정에서 자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길, 모스크를 건설한 도시에 모여들도록 조성해 통치하기 쉽게 했지만, 맘루크 왕국에 칼리프가 있는 이상 제국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면 무르타티를 포함한 무슬림들이 제국을 등지고 봉기를 일으키리란 예상이었다. 하지만 봉기는 진압되고 의회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무슬림들은 반란의 대가로 제국에서 보장된 지위와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23] 보여진 미래도 제국이 점령한 중동 지방의 한 도시에서 무트라티 출신 장교, 병사들이 무슬림들을 이끌고 대규모 종교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그런 반란군들을 제국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 때 무르타티를 진압하는 제국군의 말에서 황제의 시호가 대제가 아닌 회생제로 불려짐을 알 수 있다.[24] 황제는 의회가 황제의 정통성을 보장해준다는 이유 때문에 많은 외세들이 의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들 것이라고 판단, 결국 황제의 계승문제를 의회가 완전히 주도하게 되면 의회에 영향을 미치는 외세에 반발하는 세력도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황제 자신의 유지가 자신의 핏줄은 제위에 올릴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황제에 맞서는 의회파의 수장은 본인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황제 본인의 뜻을 명분으로 내세워 의회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25] 카이사르와 같은 초기 독재관들과 비슷하게, 후대의 황제는 의회가 군사를 통솔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악용하여 거듭된 전쟁을 통해 성전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심을 장악하고, 이미 민심이 떠난 의회를 강제 해산해버린다. 그러자 회생제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분이 사라지고, 이는 드라가시스계 황족들에게 내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어 내전이 시작된다.[26] "잊지 마, 이 내기는 네 믿음을 시험하는 내기야."[27] "나는... 네가 보여준 미래에 대한 환상 때문에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 그는 내가 낙점한 후계자야. 이 제국을 이어받을 계승자다."[28] 황제 병력이 잔다르 지방까지 평정했다고 보는 것이 아닌, 니코메디아를 공성하던 잔다르 부대 안에 에미르 이하 중요 인물들이 같이 있다가 포로로 잡히거나 몰살당한 게 더 가깝다.[29] 오스만 군에서만 탈영하다 붙잡힌 병사가 무려 삼백명 이나 나왔는데, 붙잡힌 게 그 정도면 탈영을 실행에 옮긴 병사만 대략 천 명은 넘을 거라며 예상하면서 자아노스와 이스하크가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30] 루멜리아의 영구 상실로 몰락했지만 메흐메트가 제르지, 단 한 명을 끝장내기 위해 일부러 보존하고 어느 정도 지원해주었다. 마침 전쟁 이전까지 최남단이나마 갈리폴리 지역에 영토가 있었고 할릴의 협상으로 루멜리아가 할양될 때 오스만 충성파 주민들이 아나톨리아로 넘어왔었기에(대부분 무슬림이겠지만 교회통합을 반대한 정교도인들도 보복을 피해 따라 왔을 것이다.) 기반은 어느 정도 있었다.[31] 예상과 달리 2진 병력의 본대조차 오지 않아 순수 선견대 부대인 맘루크 기병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이기는 것과 별개로 이 정도 밖에 안되는 병력 가지고 싸울 수는 있을까 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는 상태이다.[32] 그리스어로 독배보단 칼이 낫구나.라고 하였으며, 아마 독배를 마시고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무라트에 비하면 차라리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게 더 숭고하고 명예로워 보인다는 의미로 보인다.[33] 해당 자료는 오류가 있다. 아래에 이미 서술된 제국과 맘루크 간의 평화 협상 내용을 보면, 제국은 스미르나를 비롯한 에게 해에 접하는 아나톨리아 서해안 지역까지만 수복하는 정도로 진출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런 점에서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한 번에 탈환했다고 표현하는 해당 자료는 오류라 볼 수 밖에 없다.[34] 원 역사에서는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 로마 제국이라는 3개의 나라로 쪼개진 제국을 다시 하나로 합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게만 내려진 칭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