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04 05:07:22

미궁

1. 들어가면 나올 길을 쉽게 찾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곳.2. 게임 장르 중 하나3. 황병기 작곡의 창작국악4. 일본동인 서클5. 대중매체
5.1. 도박마에 나온 도박의 한 종류5.2. 메이플스토리의 맵5.3. 잠뜰마인크래프트 콘텐츠

1. 들어가면 나올 길을 쉽게 찾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곳.[1]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미로
,
,
,
,
,

/ Labyrinth

미궁과 미로는 들어가면 쉽게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갈림길이 있는 미로와 달리 미궁에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 그 길 한 줄기가 복잡하게 얽혀 쉽게 나올 수 없을 뿐, 왔던 길로 돌아가면 나갈 수 있고 그냥 쭈욱 길을 따라 들어가면 목적지에 다다른다. 즉, 미궁에서는 길을 잃을 수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로(maze), 즉 복잡한 갈림길이 있어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록 만든 구조물은 르네상스 이후에 고안된 것으로 귀족들이 놀이 목적으로 수목을 이용해 제작한 시설이다. 미궁(labyrinthos)은 군사용 방어시설로, 성 안으로 진입하려는 적군이 성 내부에 신속히 도달할 수 없도록 통로를 길고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안에서 길을 잃을 가능성은 없다. 물론 방어군은 미궁의 벽 위에 서 있으므로 적군이 미궁을 통과하는 동안 돌과 화살 등을 머리 위에 퍼부어 공격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몸에 소의 머리가 달린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다이달로스가 만들었다는 '라비린토스'가 그 기원. 영단어 라비린스(Labyrinth)도 여기서 유래하였다. 소(牛)와 통정하였다 해도 왕비가 낳은 생명이라 죽이지는 못하고 미궁에 가두었으며, 매년 그리스에서 아이 12명을 공납받아 먹이로 넣어주었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복잡함으로 유명했으나, 테세우스가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에게 조언받아 실타래를 풀어 길잡이로 삼아 빠져나왔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크레타 섬에 존재했던 고대문명 미노스 문명이 건립했던 크노소스 궁전이 그 원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도 1400개가 넘는 방들이 3, 4층 구조로 존재했고, 그마저도 정형적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하게 배치되어 방문자로 하여금 미궁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영국 등에는 영어로 트로이 타운(Troy Town), 또는 그와 비슷하게 '트로이'가 들어가는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간략한 미궁이 있다. 야외에 흙과 돌, 잔디로 간단한 미궁을 표현한 것이다.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도 트로야보르그(Trojaborg) 등등 비슷한 야외 간이 미궁을 만드는 민속이 있었다.

한국 불교에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라 하여 한문 게송 210자를 배치한 미궁 형태의 그림을 사용한다.[2] 전하는 말에 따르면 7세기 신라의 승려 의상 대사가 불교의 진리를 표현한 210자 게송을 짓고는 글자를 배치하여 미궁 형태로 그림을 만들었는데, 중앙에서 시작하여 중앙에서 끝나는 특이한 모양이다. 절 마당에 법계도를 그려놓고 그 안에서 신자들이 쭈욱 돌아다니며 기도하기도 한다.

2. 게임 장르 중 하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미궁 게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황병기 작곡의 창작국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미궁(국악)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일본동인 서클

迷宮'(연도)
コミックマーケットの開催ごとに用意される『迷宮』のスペースは、若くて貧乏で無名だった彼らの「運動」の小さな記念碑でもある。
코믹 마켓의 개최 때마다 마련되는 미궁의 스페이스는, 젊고 가난하고 무명이었던 그들의 '운동'에 대한 작은 기념비이기도 하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서술. 이 서술은 미궁 창립 멤버였던 타카미야 나리카와(高宮成河)이 쓴 것이다.

1975년 결성된 일본의 만화 연구 및 비평 서클로, 0세대 오타쿠[3] 서클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일본 만화사에 이 이름이 거론되는 이유는 코믹 마켓의 모체라는 점 때문이다.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서클명 뒤에 연도를 표기하는 것도 특징. 예를 들어 2022년 C101에 참여했을 때는 미궁 '22(迷宮'22)이었다.

1975년 4월에 칸토의 서클인 CPS와 칸사이의 서클인 구웅회(構雄会)의 핵심 멤버들이 신주쿠에 있었던 찻집 카틀레아(カトレア)[4]에서 결성했다.

미궁은 비평지 만화신비평대계(漫画新批評大系, 야마가미 타츠히코의 초기작 '희극신사상대계(喜劇新思想大系)'에서 따왔다.)를 간행하고 이것을 들고 나갔던 일본만화대회[5]를 규탄[6]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과 함께 미궁의 멤버들은 참가자 중심의 새로운 만화 행사가 필요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일본만화대회의 참가자들은 동인지 유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모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 주목해, 동인지 즉매를 중심으로 한 행사를 기획, 1975년 12월 21일 도쿄도 미나토구의 일본소방회관에 모여 1회 코믹 마켓을 개최하게 된다.

행사가 계속해서 커지고 비평과 연구 중심의 동인지보다 2차창작 위주의 동인지가 늘어나게 되자 위화감을 느끼게 된 초대 회장 시모츠키 타카나카(霜月たかなか, 필명, 본명 하라다 테루오(原田央男))가 C12를 마지막으로 대표를 사퇴했고, C13은 대표 공석인 채로, C14부터는 요네자와 요시히로(米澤嘉博)가 대표를 맡게 된다. 이 시기 미궁은 규모가 커져가는 코미케를 개최 측으로서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고, 당초 미궁 초기에 결의했던 참가자 중심주의와 비영리주의 등의 운영 이념과 운동으로서의 순수성을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속에 향후의 방침에 대해 운영 효율화를 내세운 규제파와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내세운 반대파로 나뉘어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코믹 마켓 준비회는 1981년 C21부터 미궁으로부터 독립해 요네자와를 대표로 한 별도 조직으로 운영되게 된다.

한편 아니와 쥰(亜庭 じゅん, 필명, 본명 마츠다 히게키(松田 茂樹))을 필두로 한 반대파는 대표라는 개최자조차 두지 않는 오리지널 만화 전문 동인지 즉매회로서 만화 미니 마켓(이후 MGM으로 호칭을 변경)을 1980년부터 개최했고, 규제파가 갈라져나간 후에도 미궁에 잔류해 MGM을 계속 운영해 나갔다. MGM은 80년대와 9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 COMITIA에 참가 서클이 서서히 흡수되며 규모가 크게 줄었다.[7] 주 개최장소로 사용하고 있던 카와사키시 중소기업 부인회관이 2007년 폐관되자 이 해 3월 열린 97회 행사를 마지막으로 한번 휴지, 2012년에 이타바시로 회장을 옮겨 98회 행사를 열었고, 2013년에 열린 100회 행사를 마지막으로 미궁 주최의 MGM은 종료함을 선언한다. 이후 다른 스탭에 의해 이름을 이어받은 MGM2.0이 개최, 현재도 연 2회 페이스로 개최되고 있다.

이렇게 격렬하게 갈라져 나갔음에도, 아직도 존속되고 있는 게 있다. 미궁은 지금도 코믹 마켓에 무조건적으로 부스 참여가 가능한 유일한 서클이다. 다시 말해 코믹 마켓 준비회는 지금도 미궁 앞으로 무조건적으로 부스를 마련해주고 있고, 이 과정에서 추첨은 당연히 면제, 심지어 신청조차 하지 않아도 미궁 명의로 부스가 무조건 마련된다. 당초 미궁은 창설 당시 멤버들이 각출한 비용을 종잣돈 삼아 운영되었고, 이후 1회 코믹 마켓도 미궁의 자금으로 열리게 되었다. 미궁은 코믹 마켓으로부터 돈을 돌려받는 대신 코믹 마켓에 영구히 고정 참가할 수 있는 권리를 받기로 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코믹 마켓 준비회의 장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권리에서 보여주듯 미궁은 C1부터 현재까지 개근하고 있는 유일한 서클이기도 하다. 다만 C95 당시 운영 상의 실수로 인해 부스를 받지 못했고, 때문에 코믹마켓 사상 최초로 부스 없는 참가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미궁 부스를 지키고 있는 만화가 호리우치 마리코(堀内満里子)는 "(요네자와가 죽은 후 코믹 마켓 준비회에게 조차 미궁이) 잊혀진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それでも『漫画新批評大系』を置く場所は、現在でもコミックマーケットの会場に「迷宮」のための即売スペースとして特別に提供され続けている。けれどそのスペースを与えられた「迷宮」がどんなサークルなのか、知っている参加者はもう誰もいない。
그래도 『만화신비평대계』를 비치해두는 곳은, 지금도 코믹 마켓의 회장에 「미궁」을 위한 즉매 부스로서 특별히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그 부스를 받는 「미궁」이 어떤 서클인지 알고 있는 참가자는 더 이상 아무도 없다.
시모츠키 타카나카, 저서 《코믹 마켓 창세기(コミックマーケット創世記)》에서

5. 대중매체

5.1. 도박마에 나온 도박의 한 종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0엔 도박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2. 메이플스토리의 맵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고통의 미궁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3. 잠뜰마인크래프트 콘텐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잠뜰/콘텐츠/미궁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국어 사전에 등재가 된 내용.[2] 파일:화엄일승법계도.jpg[3] 여기서 언급하는 오타쿠의 세대론은 오카다 토시오 등이 인용하는, 60년대생을 1세대로 잡고 10년마다 세대가 바뀐다는 이론을 따른다. 미궁의 주요 멤버는 50년대생으로, 이 세대론에 따르면 '오타쿠 이전의 오타쿠'라 할 수 있는 0세대이다.[4] 신주쿠구 신주쿠 3-17-5 카와세빌딩(현재는 재건축, T&TⅢ빌딩이 되어 디즈니 플래그십 스토어 도쿄 등이 입주해 있다(2023년 기준).) 지하에 있었던 찻집이다. 바로 옆에 키노쿠니야 신주쿠 본점이 있었고, 맘모스 찻집(マンモス喫茶)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점포였기 때문에 대인원이 모이기도 좋았으며, 그러면서 직원에게 주문한 내용이 종종 증발하는 등 운영도 엉망이라(...) 음료 하나만 시켜놓고 오래 앉아있기에 좋았기 때문에(사실 점 측에서도 별 상관 안 했던 모양인지, "알바 첫날부터 커피 한 잔만 들고 추가 주문 없는 손님 같은거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을 들었다"는 언급이 있었다고) 미궁의 멤버 뿐만 아니라 오타쿠라는 말이 생기기 전의 오타쿠들과 만화가와 편집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어찌나 그 쪽 사람들이 많았는지, 앉은 자리에서 기획부터 제본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무시무시한 곳이었다고.[5] 日本漫画大会. 1972년부터 1981년까지 도쿄에서 개최된 만화 행사로, 성운상을 시상하는 걸로 유명한 일본SF대회를 모방한 행사였다. (그러다보니 일본판 코믹콘 같은 형태가 되었다) 강연, 유명 만화가 초청, 패널 토론, 고서 경매, 동인지 판매 등의 행사를 시행했다. 운영 측은 프로 만화가 등의 만화계 유명인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을 포인트로 삼았지만, 만화 팬들은 전국 각지의 동인지를 사모을 수 있는 유일한 행사로서 이 행사를 주목했고, 이런 인식의 간극은 결국 후술할 파멸의 물꼬를 트게 된다.[6] 일본만화대회는 3회 당시 고압적인 운영 측의 태도나 고서 경매 낙찰가의 비정상적 상승 등으로 많은 불만을 샀는데, 3회 참가자가 4회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이런 운영 측을 비판하는 내용을 넣었더니 참가를 거부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참가자는 미궁 멤버의 지인이었기 때문에 미궁도 이를 알게 되었고 미궁은 이런 일본만화대회 운영측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규탄과, 이후 등장한 코믹 마켓으로의 참가자 유출로 인해 일본만화대회는 급속도로 몰락했고, 1981년 여름에 열린 10회 대회는 7월 25일과 26일 양일에 걸쳐 개최한다는 것을 8월에 개최한다며 잡지에 잘못된 공지를 걸어버리는 바람에 역대 행사 관계자들만 모인다고 하는 극히 조촐한 자리가 마지막이 되어버리며 소멸했다.[7] 사실 그런 상황에 대해 COMITIA 실행위원회 스스로도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실행위원회 대표인 나카무라 키미히코(中村公彦)는 아니와 쥰이 2011년 사망한 직후 열린 COMITIA95 개최 당시 인사말에서 스스로 "MGM을 흉내냈다"고 공언하고 "아니와 쥰 칠드런"을 자칭할 만큼 MGM과 아니와 쥰에 대한 깊은 리스펙트를 뿜어냈다. 하락세를 걷는 MGM의 상황에 초조해져서 뭔가 협력을 제안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