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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8:49:22

에드바르트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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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에드바르트 뭉크[1]
Edvard Munch
파일:Moonk.jpg
출생 1863년 12월 12일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뢰텐시 오달스브루크동
(현 노르웨이 인란데주 뢰텐시 오달스브루크동)
사망 1944년 1월 23일 (향년 80세)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오슬로시 위을레른구 스쾨옌동
(현 노르웨이 아케르스후스오슬로시 위을레른구 스쾨옌동)
직업 화가
사조 표현주의, 상징주의

1. 개요2. 일생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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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뭉크 절규.jpg
파일:뭉크_죽음과소녀.jpg
절규[2] 죽음과 소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노르웨이표현주의 화가이자, 그림 그리기와 인쇄법을 사용한 작품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이다. 그는 주로 심볼리즘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적 언어를 개발했고, 독특하고 특별한 작품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예술적 영향은 현대 미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노르웨이 뿐만 아니라 국제 미술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연속된 사랑의 실패를 겪은 뭉크는 당대 유행하던 풍경화를 위시한 자연주의의 경향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표현주의 양식을 주로 채택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거나 신경증적인, 불안의 느낌이 나는 우중충한 작품이 대부분이나, 《태양》이라는 작품처럼 밝고 화사한 작품도 그린 바 있다.

지금도 무척 유명한 화가지만 생전에 두 지역의 넓은 땅을 구매해서 거기서 살며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고 노르웨이 왕실에게 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화가였다.

2. 일생

뭉크는 군의관 아버지와 예술적 소양을 갖춘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본인 스스로가 일생에서 죽음과 함께 있었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불운이 몰아쳤다. 그는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14살에는 어머니를 대신해줬던 큰 누나 소피에마저 동일한 병명으로 세상을 떠나는 걸 목격[3]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 라우라는 정신병을 앓게 된다.[4] 설상가상으로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인한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5]는 종교에 의존하다 못해 광신도가 되버려 아이들에게 공포 소설을 읽어주고 종교적 행위를 강요하는 등 정신적 학대를 아이들에게 일삼았다. 이런 불운한 가정사와 유년시절은 큰 트라우마가 되어 뭉크는 평생동안 자살충동과 불안, 강박장애로 고생했었다.

그러던 도중 뭉크는 자신을 돌봐준 이모를 통해 그림을 접하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캔버스에 담아내며 어두운 현실을 잊고 견뎌내곤 했다. 18살에 아버지의 강요로 기술학교를 가게 되었지만 병약한 체질 탓에 학교를 자주 결석했다. 또 그림에 대한 열망을 끊을 수 없던 그는 기술학교를 그만두고 국립 왕실 미술 학교를 가게 된다. 당시 뭉크는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학생 시절 개인전을 열고 프랑스 유학생으로 선발되기까지 했다.

이때 프랑스 유학 시절 뭉크는 후기 인상주의, 특히 고흐의 화풍[6]에 큰 영향을 받고 자신의 화풍을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표현주의으로 노선을 정하게 된다. 이후 한 화가의 추천으로 독일로 가서 첫 개인전을 열지만 당시 독일 화풍과 정반대[7]이다 못해 우중충한 분위기의 뭉크 그림은 사람들에게 여러 혹평을 받는 걸 넘어 전시회도 도중 중단 되는 여러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내면을 그려내는 뭉크의 화풍은 큰 찬사를 받게 되며 이후에 노르웨이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는 등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뭉크는 말년까지 재산이 많았는데, 적어도 이 시점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은 안 하고 산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런 성공과 별개로 뭉크의 연애사는 그의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큼 우중충했으며, 뭉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여자와의 관계가 아예 전무했던 건 아니었으며, 밀로 탈로, 다그니 유엘, 툴라 라르센이라는 세 여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다만 셋 중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이 사랑으로 큰 트라우마를 얻게 된다.

뭉크의 첫사랑인 밀리 헤이베르그는 해군 장교의 아내였으며 당시 신여성의 상징이자 사교계의 유명인사였다. 팜므파탈의 기질이 다분했던 유부녀이나 매력적인 여성인 밀리에 푹 빠진 뭉크는 그녀와 6년간 밀회[8]를 한다.하지만 밀리에게, 뭉크는 그저 놀이대상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며, 결국 남편과 이혼 후 바로 다른 남자와 재혼해 뭉크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다.

파일:20240206_231830.jpg
첫 사랑에게 큰 상처를 받은 뭉크는 이후 여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가지게 되며 이때 탄생한 작품이 위에 있는 <흡혈귀> [9]또는 <사랑과 고통>이라고 불리는 4점의 작품이다.

이후 뭉크는 베를린에서 살다가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먼 친척인 다그니 유엘(Dagny Juel)을 만나 교제한다. 그러나 다그니는 뭉크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10]의 뮤즈였고 하필이면 뭉크의 친구이자 극작가 겸 시인인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Stanisław Przybyszewski)와 교재하여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결국 다그니는 1893년 프시비셰프스키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뭉크는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이별', '질투'를 그리고 자신을 떠나간 다그니를 모델로 한 '마돈나'를 그리게 된다.[11]

그 후 한동안 좌절에 빠졌던 뭉크는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이란 여자와 교제하게 된다. 그동안 뭉크를 떠나 상처를 주었던 여자들과 달리 툴라의 경우 그보다 4살 더 연상인 연상녀로서 예술 방면에 해박하고 성격도 적극적이어서 뭉크와 깊은 관계를 지녔지만 그 사랑이 너무 지나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뭉크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혼을 요구했다. 점점 툴라를 멀리하는 뭉크에게[12] 툴라는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파일:Munch_death_of_marat_I_1907.jpg
뭉크는 결국 툴라에게로 돌아와 툴라를 말렸는데, 하필이면 이 때 총이 발사되면서 뭉크의 왼쪽 3번째 손가락(중지)이 관통당하는 사태가 생기고, 뭉크는 결국 영영 왼손의 중지를 잃고 만다. 이 일을 겪은 후 뭉크가 그린 그림이 '마라의 죽음'이다.[13] 그래놓고 라르센은 3주 뒤 다른 화가와 결혼했다.

툴라와의 결별 이후 뭉크는 과도한 음주, 싸움 등을 하다 보니 불안증세가 더욱 심해졌고 거기에 더해 환각 증세까지 얻게 된다. 결국 뭉크는 야콥슨이란 의사의 병원에 가서 8개월 동안 요양치료를 받았는데, 이 때의 경험 덕분인지 요양치료 시기 이후의 뭉크의 그림에서는 특유의 신경증 + 비관적인 느낌이 줄어들고 색채가 좀 더 밝고 다양해졌다고 한다.[14]

이후 뭉크는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두 지역(스퀘옌과 에킬리라는 지역)의 넓은 땅을 사서 그곳에서 풍경화나 자화상 등을 주로 그리며 20년을 살았다. 또 대량의 판화 작품도 제작했다고 하며, 자기 작품에 집착해서 한 작품을 팔고 나면 같은 소재로 작품을 또 그리는 일을 반복해서 작품의 숫자가 많아졌고,[15] 현재의 뭉크 미술관이 그의 전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1월 23일에 사망했는데,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지정된 자기 작품이 파괴될 것을 우려해서[16] 유언으로 자기의 전 작품을 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여러 정신 질환을 앓아와서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데에다 때때로 과음까지 하며 몸을 망쳤던 것에 비해 대단히 장수했는데, 향년 80세로 당시에는 웬만큼 건강한 남성도 8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인 부분.

3. 기타

엄청난 다작왕이기도 하다. 그가 기증한 작품들만 해도...

이 정도. 아마도 그가 80세라는 긴 세월을 살면서 계속 화가 일을 해온 것도 있어서 그의 손에 제작된 작품도 많았고 뭉크는 워낙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애착심[17]이 커서 팔린 그림을 또 다시 그리곤 했었다. 당장 대표작인 절규는 30개의 버전이 있으며 2012년 소더비 경매장에서 1억 1990만 달러라는 최고가를 경신한 절규는 파스텔 버전이었다.

뭉크의 대표작 중 하나는 "절규"(The Scream)로, 이 작품은 1893년에 제작되었다. "절규"는 뭉크의 불안과 고통을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예술적 성취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그의 삶과 작품에서 고요한 테마와 대조적으로 강렬한 감정을 담고 있다. 또한 절규 외에 "사랑의 새벽"(The Dance of Life), "포함된 여인"(Madonna),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은 종종 사람 간의 관계, 죽음, 사랑, 고통 등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삶의 주제를 다뤘다.

금발이 많은 북유럽(노르웨이)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색 머리이다. 사실 북유럽인은 천연 금발로 유명하지만 염색한 금발도 있고[18] 흑발이나 어두운 색의 머리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니면 어릴적 금발이었다가 크면서 어두운색으로 변했을 확률도 있다.


[1] 노르웨이어 표기법에서 Edvard는 '에드바르'로 예시로 들고 있으나 실제로는 d가 묵음이 아니라서 '에드바르트'로 발음된다.[2] 뭉크는 몰라도 《절규》 그림은 어디서 한 번 봤다고 할 정도로 매우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다. 그래서인지 저 그림은 유독 패러디도 많다.[3] 당시 이때 병든 누나를 간호하고 집안일을 이모가 대신했으며 이런 모습을 그려낸 그림이 바로 "병든 소녀"와 "병실에서의 죽음"이다.[4] 정면을 응시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거나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가 하면 망상과 환영에도 시달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현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5] 이후 부친은 파리 유학 시절 뇌졸중으로 사망하며 이때의 슬픔을 그려낸 작품이 "생클루의 밤"이다.[6] 생전에 존경하는 화가가 고흐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했으며 실제로 고흐의 대표작인 "별이 빛나는 밤"를 오마주해서 6점을 그렸다.[7]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 큐비즘 등 다양한 화풍이 등장한 프랑스와 다르게 독일은 사실주의 화풍이 주목받는 등 미술발전이 다소 더뎠던 지역이었다.[8] 실제로 뭉크가 만난 여성들을 모델로 한 그림 중 밀리와 관련된 작품들이 많으며 뭉크는 그녀와의 만남에서 중독과 같은 강렬한 경험을 했다고 회상했다.[9] 뭉크의 지인이 이 그림을 보고 남성의 피를 흡혈하는 여성을 그렸다고 보아 흡혈귀란 이름이 붙어졌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선 여성이 남성의 피를 흡혈하는 모습을 통해 여성은 쾌락과 동시에 고통,공포을 주는 존재라는 뭉크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으로 봤다.[10] 뭉크에게는 함께 어울리던 친구 둘이 있었는데 뭉크를 포함한 세 명 모두 유엘에게 반했다고 한다.[11] 참고로 다그니는 34살 젊은 나이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데, 바로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남편 프시비셰프스키가 다그니와 다른 남자가 불륜을 하게 조장한 후에 그 불륜남에게 살인을 사주했다고 한다.[12] 이는 뭉크가 어릴 적 불우한 가정 환경과 두번의 사랑 실패로 결혼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있지만 툴라가 사람을 시켜 뭉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는 등 스토커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13]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동명의 그림의 제목을 빌린 그림으로,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침대에 쓰러져있는 뭉크와 전라로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툴라가 그려진 그림이다. 《살인녀》, 《마라의 죽음》 등이 결별 이후의 툴라에 대한 뭉크의 감정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한다.[14] 이때 그린 그림이 오슬로 대학 100주년을 기념으로 그려진 "태양"이란 작품이다. 참고로 노르웨이 사람들은 뭉크의 그림 중 절규보다 이 태양이란 그림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15] 그래도 완전히 똑같이 그리진 않고 유화를 판화로 그린다던가 파스텔로 그린다던가 조금씩 바꿔서 그리긴 했다. 한 정신과 의사는 뭉크의 이런 행동을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승화'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으로 해석했다.[16] 히틀러가 과거 미술 지망생 때 미대에 떨어진 트라우마로 뭉크, 피카소 같은 현대 미술가들에 대한 분노가 컸고 실제로 노르웨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에게 점령당했다.[17] 때론 그림을 산 구매자에게 부탁해 잠시동안 빌리기도 했었다.[18] 예시로 2010 벤쿠버 동계올림픽에 노란색으로 물들인 모히칸 머리를 하고 나온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 요르헤임 에릭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