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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시마 히토시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모토시마 히토시
本島 等 | Hitoshi Motoshima
파일:모토시마 히토시.jpg
출생 1922년 2월 20일
일본 제국 나가사키현 미나미마츠우라군 기타우오메무라
사망 2014년 10월 31일 (향년 92세)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가톨릭
직업 정치인
소속 소속
서명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전직 4선 나카사키시장으로 후술할 암살 미수 사건으로 유명하다.

2. 생애

나가사키현 미나미마츠우라군 기타우오메무라(현재의 동군 신카미고토쵸)에 태어났다. 그는 천주교도로 세례명은 이그나치오 로욜라였다.

그의 어머니는 카쿠레키리시탄의 후예인 가톨릭교도로 미혼이었기 때문에 전시에는 스파이 의혹을 받았다. 구제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21세 때 징병돼 수습사관으로 신병들에게 대포 쏘는 법을 지도했다. 소속되었던 서부 군관구 교육대·포병 학생대가 소개하는 구마모토시 교외의 산속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1945년 8월 포병 소위로 승진할 예정이었다. 전후에는 교토대 공학부 토목공학과에 입학해 교토가톨릭학생연맹 위원장을 맡아 27세에 졸업했다.

그는 토료 학원(현 나가사키 남산 중·고등학교) 교사, 현 교육위원회 직원 등의 교원 생활을 거친 후 동향의 시라하마 니키치 중의원 의원(전 우편통신부 대신)의 비서, 나가사키 시립 고등학교 교사등을 거쳐 1959년 나가사키현의회 의원으로 처음으로 당선되고 5기 연속 20년을 시의원으로 지냈다. 자유민주당 나가사키현 연합회 간사장 등을 역임했다. 1979년의 나가사키시장 선거에서 당시 현직이었던 모로타니 요시타케를 누르고 나가사키 시장에 처음 당선되었다.

나가사키 시장 3기였던 1988년 12월 7일 나가사키시 의회 질의에서 공산당 소속 시의원 시바다 보쿠가 당시 시장이었던 그에게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하였다. 문제는 당시 히로히토 천황이 오늘내일 하면서 사경을 헤매이고 있었던 터라 일본은 사회 전체가 소위 "자숙" 모드였다.[2] 이 일로 인하 그는 극우파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현의회에서는 그에게 해당 발언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짓을 할 수 없다며 발언 철회를 거부해서 소속당인 자민당에서 제명당했고 극우 단체의 확성기 차량 80여대가 몰려들어 연일 그를 비난해댔다. 극우 깡패들이 여기저기서 그를 노리면서 나가사키시는 그에 대한 경호 수위를 높이고 공관에서 지내게 했다. 평소 그는 아침 일찍 출근 전 산책을 즐겼는데 이조차도 시장 공관에서 런닝머신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2.1. 암살 미수 사건

그러던 중 1990년 1월 18일 오후 3시경 그는 나가사키시청 현관 앞에서 관용차에 오르려다 등 뒤에서 다가온 우익단체 쇼기주쿠(正氣塾) 간부 와카시마 카즈미에게 등 뒤 1m라는 근거리에서 총격을 당했다.[3] 탄환은 왼쪽 흉부에 명중했으나 갈비뼈에 맞아 탄도가 변해 심장과 대동맥 등을 벗어나서 관통한 덕분에 전치 1개월의 중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다.[4] 회복한 후에 그는 자신을 저격한 와카시마를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를 저격한 와카시마는 시장이었던 그가 시의원이던 시절에는 국기제정운동과[5] 일본 교사 노조 타도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되자 전향한 것 때문에 그에게 대화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해서 저격했다고 했다.

와카시마는 이 사건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며 2002년에 형기 만료로 출소했고 2003년 4월 20일에 열린 통일지방선거에 나가사키 시장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에 대한 내용은 이 문서에 나온다.

2.2. 사건 이후

그 다음 해의 1991년 선거에서 그는 4선에 성공했지만 다음 선거인 1995년 선거에서 이토 잇초에게 낙선한 후 정계를 은퇴하고 지내다가 2014년 10월 31일 92세의 일기로 폐렴으로 별세했다.

2005년 한국 방송사인 문화방송이 광복 60주년 특집으로 제작한 5부작 다큐멘터리 <천황의 나라, 일본>의 1부 방송인 '덴노, 살아있는 신화'에서 이 사건을 다뤘는데 여기에 직접 인터뷰어로 직접 출연했다. 그에게 질의를 했던 시바다 보쿠 전 시의원도 인터뷰에 응했다.

2007년에는 그를 선거에서 이긴 이토 잇초암살당해 사망하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대에 걸쳐 시장이 총격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고 말했다.


[복수전공] [2] 예시를 몇 가지 들면 이 시기 히카루GENJI는 콘서트를 취소했고, 그 해 호시노 센이치는 50승 15패 3무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주니치 드래곤즈를 6년만에 NPB 센트럴 리그 정상에 올려놓는 대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를 축하하는 자리가 모두 축소 혹은 취소되었다.[3] 당시는 문제의 발언으로부터 만으로 1년이나 지난 시기라서 극우 단체들도 다 철수했기 때문에 경호 수위가 낮아졌다고 한다.[4] 여기에 덧붙여서 피의자는 총격 직후 쓰러진 모토시마 시장에게 「괜찮냐?」라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5] 일장기가 일본의 공식 국기로 제정된 것은 1999년으로 당시의 일장기는 일본의 국기라고 관습적으로 쓰이는 것일뿐, 법적으로 정한 국기라는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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