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Murder of Mark Tildesley1984년 6월 1일 영국 버크셔주 오킹엄(Wokingham)에서 마크 앤서니 틸더즐리(Mark Anthony Tildesley, 당시 7세)라는 소년이 실종된 후 피살된 사건.
당시 경찰은 물론이고 영국군 육군까지 동원되어 마크를 찾기 위해 나섰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범인 일당 중 한 패인 레슬리 패트릭 베일리(Leslie Patrick Bailey)의 자백으로 범인들이 체포되었고 마크에게 약을 주입시켜 고문하고 강간한 뒤에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끝내 아이의 시신을 찾는 데는 실패하였고 현재까지 이 아이의 시신을 찾아내지 못해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2. 마크 틸더즐리
마크 틸더즐리는 1976년 8월 31일에 영국 버크셔에서 존 틸더즐리(John Tildesley, 1932~2005)와 러비니아 레이철 글래디스 틸더즐리(Lavinia Rachel Gwladys Tildesley, 1935~2011)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위로는 1959년에 태어난 누나 크리스티나 틸더즐리와[1] 1963년에 태어난 형 크리스토퍼 틸더즐리가 있었다. 즉, 마크는 부모가 40이 넘은 나이에 얻은 귀한 막내아들이었던 셈이다.마크는 오킹엄 시내 중심에 위치한 로즈 스트리트에서 다소 떨어진 로즈 코트 1번지에 살았는데 마크의 집은 작은 2세대 주택과 옆에 단층으로 된 별채가 합쳐진 구조였다. 마크는 사건 당시 7살 난 남학생으로 오킹엄의 노리스 애비뉴에 위치한 Palmer C of E Junior 학교의 3학년 생이었다고 한다.
3. 유원지에 놀러가자
사건의 발단은 1984년 5월 25일에 학교가 여름 방학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마크가 살았던 오킹엄에는 웰링턴 가의 카니발 필드란 곳에 프랭크 에어스 펀 페어(Frank Ayers Fun Fair)라는 유원지가 있었다.[2] 마크는 프랭크 에어스에 가고 싶었지만 수중에 돈이 없었다. 당시 마크에게 용돈이라고는 주당 겨우 30페니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신이 돈을 벌어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7살짜리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서 생각 끝에 꾀를 냈다. 당시 영국에서는 마트에서 쇼핑카트를 이용할 때엔 10페니 동전을 넣어야 카트를 쓸 수 있었는데 그 점을 이용해 마크는 집에서 가까운 덴마크 스트리트에 위치한 테스코에서 고객들이 회수하지 않은 쇼핑 카트를 수거해 10페니 동전을 차곡차곡 모으기로 했다. 그렇게 마크는 1주일 동안 쇼핑 카트를 수거하면서 동전을 차곡차곡 모았다.그리고 문제의 6월 1일은 주말이었다. 마크는 덴마크 스트리트에 위치한 어느 사탕 가게[3] 바깥에서 사탕을 사먹으라며 50페니 동전을 쥐어준 남자를 만났다. 마크와 안면이 있는 가게 점원 마거릿 히크먼(Margaret Hickman)은 마크는 평소에 10페니짜리 사탕을 주로 사먹었기 때문에 그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남자는 자신이 좀 있다가 프랭크 에어스 펀 페어에 갈 것이며 저녁에 마크가 도젬(dodgem)[4]을 타는데 자신이 돈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5시 반을 막 넘긴 때 저녁식사를 한 뒤 마크는 자신이 아끼던 금색의 롤리 토마호크(Raleigh Tomahawk) 중고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 반 마일 거리의 저녁 6시에 개장하는 프랭크 에어스 펀 페어로 향했다. 마크는 부모에게 저녁 7시 반까지 돌아오겠다고 굳게 약속하며 "걱정하지마. 엄마. 난 절대 안 늦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안심시켰고 프랭크 에어스로 가는 길에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 2명을 만났는데 친구들과 함께 가려고 했지만 친구들은 집에 돌아갔다 와야 했고 그렇게 되면 프랭크 에어스에 늦게 도착할 것 같아 마크는 혼자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살아 있는 마크 틸더즐리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4. 사라진 아이
마크가 돌아오겠다고 한 저녁 7시 반이 되었지만 마크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저녁 8시가 되어도 마크가 돌아오지 않자 부모가 마크를 찾아 나섰지만 프랭크 에어스 펀 페어가 열렸던 카니발필드 초입에서 체인에 묶여 있는 마크의 자전거만 발견되었을 뿐 마크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1시간 동안 주변을 샅샅이 찾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부모는 마크의 자전거만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부모는 형 크리스토퍼에게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크의 행방을 찾아보라고 했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결국 그 날 밤 10시에 어머니 러비니아가 현지 경찰에 전화하여 마크가 실종되었다고 신고했고 아들에 대해 어떤 것이라도 들은 게 있는지, 없는지 물었지만 경찰 쪽에서도 들은 것은 전혀 없었고 1시간 뒤에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그 사이 러비니아는 핀챔프스테드에 거주 하던 마크의 누나인 크리스티나와 매형 테드에게 카니발필드로 가서 마크를 찾아보라고 했지만 역시 아무 소득이 없었다.
5. 마크를 찾아라
5.1. 초기 수색
템스벨리 경찰서는 곧바로 마크 틸더즐리 수색에 나섰는데 헬리콥터를 동원해 카니발필드 일대를 수색하는 한편 확성기로 마크를 찾아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인근의 강과 시냇물, 호수, 연못까지 찾아보았지만 마크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이후 런던광역경찰청에서 열 추적 장치를 빌려 시신을 찾으려고 했다.경찰은 프랭크 에어스 펀 페어의 모든 직원과 노점상들에게 마크 틸더즐리 실종에 관해 탐문수사를 했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 1984년 6월 9일과 10일 양일 동안 15명의 경찰관과 2마리의 경찰견이 팀을 짜고 영국군 로얄 전기, 기술 정비대대(Royal Electrical and Mechanical Engineers) 출신 병사 100명과 함께 오킹엄 남부 지역인 바컴로드에서부터 아멘 코너까지 수색에 나섰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 마크가 실종된 지 2주가 지나자 로저 니클린(Roger Nicklin) 경정은 경찰이 '마크 틸더즐리의 실종에 대해 전혀 모르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한편 길드퍼드에서 레딩까지 노선을 운행하는 기차 기관사가 누군가가 어린이의 팔처럼 보이는 것을 입에 넣고 있는 여우를 싣고 가는 걸 보았다고 경찰에 제보해 급히 찾아 나섰고 3주 뒤에 그 문제의 여우를 실은 사람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건 그냥 동물 뼈로 밝혀졌다. 이후 크로손 인근 마을에서 또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강하게 난다는 제보를 받고 경찰이 급히 출동해 확인해 보았으나 역시 그저 썩은 양의 사체로 밝혀졌다. 사라진 마크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5.2. 국가적 호소
마크 틸더즐리의 실종이 장기화되자 이제 대대적으로 국가적으로 캠페인을 벌여 마크를 찾기로 했다. 영국의 모든 경찰서에 마크 틸더즐리를 찾자는 포스터를 붙여 놓았고 언론에서도 지역지인 오킹엄 타임스뿐 아니라 아예 범국가적으로 중요한 뉴스가 되었을 정도였다. 타임스와 데일리 메일, 데일리 미러 모두 마크 틸더즐리 실종 사건을 중요하게 보도하였고 ITV의 템스 뉴스에서도 이 사건이 중요하게 보도되었을 정도였다.1984년 6월 7일, BBC 프로그램인 크라임워치 UK(Crimewatch UK)[5] 에서 처음으로 마크 틸더즐리 실종 사건을 언급했다. 이 같은 첫 번째 국가적 호소가 효과가 있었는지 경찰서로 무려 400통의 제보 전화가 쏟아졌다고 한다.
마크 틸더즐리의 실종 직후 몇몇 목격자들이 저녁 7시~8시 사이에 허리를 구부린 남자에 의해 페어그라운드에서 멀리 끌려다니던 소년을 봤다고 진술했으며 덴마크 스트리트의 모퉁이에 있는 콕핏(Cockpit) 오솔길 근처에서 봤다는 진술이 있었고 랭버러(Langborough) 길에서 봤다는 진술도 있었다.
또 많은 상반된 목격담들이 있었다. 한 증인은 마크 틸더즐리로 보이는 소년이 실종된 날 저녁 8시 10분에 로즈 스트리트(Rose Street)에 위치한 웨이트로즈(Waitrose) 주차장의 벽에 자전거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마크의 자전거는 웰링턴 길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페어 그라운드 입구에서 체인이 걸려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고 목격자가 마크 틸더즐리를 봤다고 한 그 시간에 이미 마크의 부모가 그 자전거를 발견했다.
5.3. 사건의 재구성
크라임워치 UK의 첫 방송이 나간 다음 날 경찰은 처음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비디오를 7살 된 이 지역 소년이 틸더즐리가 그 날 입었던 옷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로즈 스트리트 주변에 틸더즐리가 목격되었다는 웨이트로즈 주차장 담과 페어 그라운드 일대에서 촬영했다. 불완전한 재구성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다.마크 틸더즐리 실종 1주기 이틀 전에 오킹엄 카니발필드에 위치한 프랭크 에어스 펀 페어가 다시 들어섰고 그 때 경찰은 두 번째 재구성 영상을 촬영했다. 이 촬영분에서는 로즈 코트와 로즈 스트리트, 브로드 스트리트, 덴마크 스트리트, 카니발필드에서 웰링턴 로드와 랭버러 로드까지의 동선이 포함되었다. 10살 된 폴 리틀(Paul Little)이 마크 틸더즐리의 역할을 맡았고 피터 러셀(Peter Russell)이 이 사건의 용의자 허리를 구부린 남자의 역할을 맡았다.
마크 틸더즐리가 실종된 지 1년이 지난 1985년 6월 13일 밤 9시 25분에 BBC의 크라임워치 UK에서 두 번째로 이 사건에 대해 보도했다. 이 때도 이 사건에 대해 무려 1,000건의 제보 전화가 왔다고 한다.
5.4. 호소의 성공
전반적으로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1,200건이 넘는 제보 전화와 2,500건의 잠재적 증거 제보를 획득했지만 확실한 물증은 나오지 않던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템스밸리 경찰서는 틸더즐리가 안전하다거나 죽었다거나 범인의 신원, 마크 틸더즐리의 시신 발견에 대해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했다.6. 수사
6.1. 초기 수사
이 사건의 초기 수사는 제프 길버트(Geoff Gilbert) 형사에 의해 주도되었다. 공교롭게도 길버트 형사는 오킹엄 경찰서에서 근무하던 그의 어머니를 통해 틸더즐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수사 초기에 오킹엄 경찰은 주 과제조차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던 가운데 겨우 4명의 경찰관들만이 수사에 참여했고 템스밸리 경찰서는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영국에서 일어난 광부들의 파업에 많은 경찰관들이 차출되어 일손이 부족했다. 거기다 오킹엄 경찰서는 너무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다락의 저장실을 수사 사무실로 써야 했을 정도였다. 경찰들은 지체 없이 페어그라운드에 재택 근무 사무실을 설치했다.1984년 6월 3일은 마크가 실종되고 난 뒤에 맞이한 첫 일요일이었다. 경찰은 밀턴 길에 위치한 오킹엄 밥티스트 교회를 회의실로 써야 했다. 다음 날 마크의 어머니 러비니아가 데일리 익스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누군가가 마크를 붙잡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하며 아직 마크가 누군가에게 잡혀 있을 뿐 살아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말을 했지만 앨런 커셀(Alan Cussell) 경정은 "마크는 아마 살해당했을 것이다."고 인정했다.
경찰은 이 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도 했는데 마크와 형제 간 나이 차이가 일반적인 남매들에 비해 매우 많이 났다는 사실을 보고[6] 마크가 사실 누나 크리스티나가 낳은 자식이 아니냐고[7] 어머니 러비니아를 불러 물었다고 한다. 러비니아는 이 때의 일을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고 묘사했다. 마크가 유독 나이가 어렸을 뿐 마크는 실제로 러비니아가 낳은 자식이 맞았다.
경찰은 최초 용의자로 마크의 형인 크리스토퍼를 지목했다. 크리스토퍼는 동생과 나이가 무려 13살이나 차이 났지만 마크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며 특히 마크가 실종되기 하루 전에도 둘이서 싸웠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이 때문에 크리스토퍼가 최초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크리스토퍼는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결국 용의선상에서 배제되었다.
1984년 6월 7일 크라임워치 UK에서 첫 번째 대국민 호소를 했던 그 날에 2건의 익명으로 걸려온 전화가 있었는데 페어그라운드 직원 마틴 얼리(Martin Earley)라는 사람이 틸더즐리 실종사건의 범인일 것이라고 의심하는 내용이었다. 마틴 어얼리라는 사람은 11년 동안 프랭크 에어스에서 근무했으며 타이데슬리가 실종된 날 밤에도 오킹엄 펀 페어에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틴 얼리는 새로운 용의자로 지목되었고 곧 경찰에 체포되었다.
마틴 얼리는 경찰에게 자신이 틸더즐리 유괴에 대해 자신이 한 짓이라고 자백했으며 자신이 틸더즐리를 납치해 자신의 이동식 주택 근처로 끌고 온 다음 강간해서 죽였다고 자백했다. 이렇게 손쉽게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 했으나 얼리는 이후에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하여 신뢰할 수 없게 되었으며 형사들은 엉뚱한 사람을 체포했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 발생 6주 사건이 커지면서 템즈 밸리 경찰서는 수사 사무실을 오킹엄에서 M4 고속도로로 20마일 떨어진 뉴버리(Newbury) 인근 설햄스테드(Sulhamstead)로 옮겨야 했다. 1984년 8월 16일 메트로폴리탄 경찰서는 런던에 사는 또 다른 페어그라운드 직원 시드니 쿡(Sidney Cooke)을 새로운 용의자로 지목했다. 시드니 쿡이 용의자로 지목된 이유는 쿡의 동료 중 한 명이 틸더즐리 사건 수사 사무실에 과거 어린 소년들을 향한 쿡의 의심쩍은 행동에 대해 제보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쿡에게 마크 틸더즐리가 실종된 날 밤에 오킹엄에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쿡은 자신에게는 알리바이가 있다며 사건과의 관련성을 부정하였고 그 날 밤 런던에 있는 웨스트헨던(West Hendon) 경찰서 맞은 편의 유원지에서 일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시드니 쿡이 그 날 그곳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유원지 소유자였던 로지 그레이(Rosie Gray)가 확인해 주었다. 그 때문에 경찰은 쿡을 용의선상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지 2년 반이 지난 1987년 4월 29일 경찰은 타이데슬리가 실종되기 6개월 전부터 오킹엄 일대에서 수많은 아동 납치 미수사건이 일어났었단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경찰은 곧바로 이 아동 납치 미수사건과 틸더즐리 실종사건의 연관성을 조사했으나 결국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6.2. 난초 작전
1989년에 영국 메트로폴리탄 경찰서는 난초 작전을 수립해 실종 아동 조사에 나섰는데 이것은 로저 스투들리(Roger Stoodley) 총경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작전의 한 부분으로 1990년 12월에 그들은 런던 동부에 근거지를 두고 동성 소아성애 갱 단원 레슬리 '캣위즐' 베일리(Leslie "Catweazle" Bailey)를 조사했다. 당시 레슬리는 이미 2건의 다른 살인 사건으로 복역 중이었는데 14세 소년 제이슨 스위프트(Jason Swift)와 6살 된 배리 루이스(Barry Lewis)를 살해한 혐의였다. 이 두 소년이 살해당한 시점은 틸더즐리 실종 이후였다고 한다.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반이 지난 1987년 4월 29일, 경찰은 마크 틸더즐리가 실종되기 6개월 전부터 오킹엄 일대에서 수많은 아동 납치 미수사건이 일어났었단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경찰은 베일리에게서 손으로 그린 약도와 손으로 쓴 편지를 받은 그의 원즈워스 교도소 동료 죄수로부터 그것들을 입수했다. 그 지도는 마크 틸더즐리가 어디서 살해당했는지를 보여주었고 편지는 감방 동료에 의해 쓰였는데 다름 아닌 이미 용의자로 거론된 적이 있는 시드니 쿡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쿡도 베일리와 같은 갱단의 멤버였으며 베일리의 살인 사실에 대해 역시 알고 있었다.
이 때 베일리는 경찰에게 'Dirty Dozen'이라 불리는 그의 동성 소아성애 갱단이 시드니 쿡이 이끄는 조직이며 해크니의 킹스미드(Kingsmead) 지구에 근거지가 있다고 자백했고 아울러 자신들이 마크 틸더즐리를 납치해 실종된 그 날 약물 투약, 고문, 강간하고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이 때 경찰은 마크 틸더즐리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허리가 구부정한 남자가 시드니 쿡이 확실하다고 느꼈다.
6.3. 사건의 전말
레슬리 베일리가 자백한 내용에 따라 재구성한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크 틸더즐리가 실종되었던 그 날 밤 베일리는 갱단의 다른 멤버이자 그의 연인이기도 했던 레니 스미스(Lennie Smith)에게 자신이 해크니에서 오킹엄까지 차에 태워줄 테니 유원지 근처에 있는 시드니 쿡 소유의 이동식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둘은 오킹엄으로 향했다.오킹엄에 도착한 뒤 스미스가 시드니 쿡을 찾으러 유원지 안으로 들어갔고 쿡과 스미스는 곧바로 유원지 근처 랭버러 로드에 주차되어 있는 베일리의 흰색 트라이엄프 2000 차량으로 돌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유원지에서 50페니짜리 사탕 1봉지를 사 주겠다는 어른들의 약속에 홀려 버린 어린 남자아이와 함께. 이 두 악당들은 이 불쌍한 소년을 우악스럽게 질질 잡아 끌고 랭버러 로드까지 왔다. 이 소년이 바로 실종자 마크 틸더즐리였다. 이 악당들은 마크 틸더즐리를 덜렁 들어 곧바로 차 뒷좌석에 태웠고 레슬리 베일리가 차를 몰았으며 레니 스미스가 조수석에 탔고 시드니 쿡이 마크 틸더즐리의 옆자리에 앉았으며 이 악당들은 제 4의 인물을 만났는데 그는 베일리의 친척으로 괴짜(Odd-Bod)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남자로[8] 레이스 커튼이 달린 쿡의 희고 파란 이동식 주택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후안무치하고 파렴치한 인간 말종들의 추잡한 범죄가 시작됐다.
베일리에 의해 '마크의 파티'라고 조회된 이 파티는 30분 동안 계속되었는데 베일리는 이 때 마크의 맥박이 뛰지 않는 걸 보고 죽었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쿡이 마크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직접 마크를 집에다 데려다 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은 곧 마크의 가족들이 마크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마크가 사망했다는 걸 의미했다.
파티가 끝난 후 베일리는 해크니로 스미스를 데려다 주러 차를 몰았고 자정이 넘어 그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베일리가 스미스를 내려주기 전에 스미스가 베일리에게 틸더즐리의 시신 처리를 시드니 쿡에게 맡겼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7살밖에 되지 않은 이 불쌍한 아이는 파렴치한 자들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죽고 말았다.
6.4. 끝나지 않은 수사
이후 경찰은 이 틸더즐리 사건의 궁극적인 해결을 이끄는 데에 훌륭하고 지속적인 수사를 추구했다고 하여 판사의 찬사를 받았지만 경찰 측에서는 이 사건은 마크 틸더즐리의 시신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범인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경찰은 여전히 이 사건을 미제사건으로 분류하고 있다. 2007년 템스벨리 경찰서는 미해결 살인사건과 이 마크 틸더즐리 사건을 포함한 근래 50년 동안 일어난 심각한 성폭행 재수사를 전담하는 심리 팀을 조직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마크 틸더즐리는 'Dirty Dozen' 갱단의 첫 번째 피살로 알려졌지만 2015년에 언론 보도와 정치적 압박에 따라 경찰은 1981년 7월 29일에[9] 런던 지하철 이스트 퍼트니 역 근처에서 비샬 메로트라(Vishal Mehrotra)라는 7세 소년이 피살당한 사건을 재수사했다. 'Dirty Dozen' 갱단 단원들은 타이데슬리 살인사건보다 최소 3년 이상 이전에 일어난 이 살인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 수사를 받게 되었다.
2015년 로저 스투들리 前 총경은 틸더즐리 살인사건이 메트로폴리탄 경찰서에 의해 자체적으로 덮어지는 것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그는 타이데슬리 살인사건에 대해 시드니 쿡을 기소할 충분한 증거를 유지했다. 경찰은 2015년에 9건의 다른 미해결 소년 살인사건에 쿡의 연루 가능성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7. 범인 목록
- 시드니 쿡: 이 사건의 주범. 풀 네임은 시드니 찰스 쿡(Sidney Charles Cooke)이며 1927년 4월 18일 생이다.[10] 사건이 일어난 1984년에는 유원지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별명은 '쉿쉿하는 시드(Hissing Sid)'로 1999년 더 가디언 신문에 영국의 가장 악명높은 소아성애자로 묘사되었다. 시드니 쿡은 1985년에도 당시 14세였던 제이슨 스위프트(Jason Swift)란 소년을 레슬리 베일리와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 스티븐 배럴(Steven Barrell) 등과 함께 강간한 후 살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1989년에 제이슨 스위프트 강간 살해 혐의로 19년 형을 선고받아 원즈워스(Wandsworth)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1991년에 마크 틸더즐리 살인 혐의로 추가 기소되어 이 건도 인정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현재 영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재소자가 되었고 웨이크필드(Wakefield)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 레슬리 베일리: 역시 이 사건의 범인. 풀 네임은 레슬리 패트릭 베일리(Leslie Patrick Bailey)다. 처음에는 그저 시드니 쿡이 이끌던 소아성애자 갱단의 단원 중 하나로 보였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으며 이 자는 경미한 학습 장애를 앓고 있다. 틸더즐리 살인사건 수사로 소환되었을 때 이미 그는 1985년에 저지른 제이슨 스위프트 살인사건으로 쿡과 함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상태였다. 1993년 10월 7일 케임브리지셔의 화이트무어(Whitemoor)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에 누군가에게 교살당했다. 그가 죽자 마크의 부모는 크게 기뻐했는데 마크의 아버지는 베일리를 살해한 자와 악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축하의 의미로 와인을 따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후에 밝혀진 결과 레슬리 베일리를 살해한 자는 2명의 다른 재소자였다고 한다.
- 레니 스미스: 풀 네임은 레너드 윌리엄 길크리스트 스미스(Leonard William Gilchrist Smith)이며 1954년 8월 23일 생으로 사건 당시 만 30세였다. 1992년에 마크 틸더즐리 강간 치사 혐의로 수감되었으며 2006년 노팅엄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에이즈로 죽었다. 이 자가 죽자 마크의 부모는 다시 한 번 기뻐했다고 한다.
- 괴짜: 이 사건의 종범인데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지만 그의 정신 연령이 겨우 8세에 불과하다는 점을 참작받아 기소되지 않았다고 한다.
8. 발견되지 않은 마크의 시신
비록 범인들은 모두 1992년에 유죄를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마크의 시신만큼은 여전히 발견되지 못했다. 이것이 영국 경찰이 아직도 이 사건을 미제사건으로 보는 궁극적인 이유다. 영국 경찰은 마크 틸더즐리의 시신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사건 발생으로부터 [age(1984-06-0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범인들 중 한 명인 레슬리 베일리는 마크의 시신을 시드니 쿡이 암매장했다고 진술했지만 그가 어디에 묻었는지는 모른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쿡은 현재까지도 자신이 시신을 암매장한 곳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베일리의 살해 자백에 따라 경찰은 1991년 3월에 어벤던스 레인(Evendons Lane)의 무어란 곳에 있는 어느 들판을 파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2008년 쿡의 전 애인이자 감방 동료이며 소아성애 혐의를 받고 도주하던 데이비드 패트릭(David Patrick)은 자신이 시드니 쿡이 소년을 매장한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이 비밀을 폭로하는데 대가로 3,000파운드를 요구했다. 경찰은 그의 주장이 거짓인 데다 마크의 어머니로부터 돈을 갈취하려 한다고 묵살했다. 2012년에 어벤던스 레인 인근에서 인간 두개골의 파편이 발견되었으나 마크 틸더즐리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마크 틸더즐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고 이 사건은 오킹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템스밸리 경찰서는 마크의 시신이 오킹엄의 웰링턴 가에서 1마일 이내, 즉 마크가 납치되었던 유원지 인근에 묻혀 있을 것으로 처음에 생각했지만 현재는 마크의 시신이 사라진 농장에 있는 얕은 무덤에 묻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1] 마크 틸더즐리가 태어날 무렵에 누나 크리스티나는 이미 결혼하여 남편 테드와 1981년에 태어난 딸 메리와 함께 분가하여 핀챔프스테드에 거주하고 있었다.[2] 상설 유원지는 아니고 1년에 단 4번 열리는 이벤트 격의 유원지였다고 한다.[3] 마크가 동전을 모으러 다니던 테스코에서 불과 20야드(대략 18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4] 영국식 영어[5] 영국의 유명한 범죄 관련 프로그램으로 주요 미제사건 및 공개 수사 중인 사건의 재구성과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의 그것이 알고싶다와 비슷하며 공개수사라는 점에서는 공개수배 사건 25시와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이다.[6] 마크는 형 크리스토퍼와 13살 차이가 났고 누나 크리스티나와는 무려 17살이나 났다.[7] 즉, 크리스티나가 어렸을 때 사고 쳐서 마크를 낳아 놓고 자기 부모 호적에 올린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8] 참고로 이 괴짜라고 불린 자는 정신연령이 겨우 8세 수준이었다고 한다.[9] 참고로 이 날에 찰스 3세와 다이애나 스펜서 前 왕세자비의 결혼식이 있었다.[10] 현재 만 [age(1927-04-18)]세이며 사건 당시엔 만 5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