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6:42:34

마쓰시타 고노스케

마츠시타 고노스케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6년 일본의 방송국 닛폰 테레비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일본인' 명단이다.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오다 노부나가 사카모토 료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쓰시타 고노스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노구치 히데요 히지카타 토시조 사이고 다카모리 미소라 히바리 후쿠자와 유키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파나소닉 초대 사장
마쓰시타 고노스케
[ruby(松,ruby=まつ)][ruby(下,ruby=した)][ruby(幸, ruby=こう)][ruby(之, ruby=の)][ruby(助, ruby=すけ)] | Matsushita Kounosuke
파일:松下幸之助.jpg
<colbgcolor=#015CAB><colcolor=#fff> 출생 1894년 11월 27일
와카야마현 가이소군 와사촌
(現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사망 1989년 4월 27일 (향년 94세)[1]
오사카부 모리구치시 마쓰시타기념병원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간사이상공고등학교
종교 불교 변천종
직업 기업인, 발명가
부모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무메노
자녀 장녀 사치코
경력 마쓰시타 전기기구제작소 사장
마쓰시타 전기제작소 사장
파나소닉 사장
마쓰시타 정경숙 창립자
"직원들 때문에 이 위기가 닥친 것이 아닙니다. 직원들이 있어야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정리해고를 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재고품의 판매를 위해 노력합시다."
세계 대공황 당시 경영악화로 인건비를 줄여야 한다는 건의가 빗발치자 전 직원을 강당에 모으고 연설하며
가난과 허약, 무학(無學)은 하늘이 내게 준 축복이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건강에 신경을 썼고,[2]
배움이 없었기 때문에 학식이 있는 사람들의 충고를 경청할 수 있었다.
나는 실패한 적이 없다. 어떤 어려움을 만났을때 멈추면 실패가 되지만 끝까지 밀고 나가 성공을 하면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1. 개요2. 생애3. 논란
3.1. 한국과 불편한 관계
3.1.1. 전범기업3.1.2. 냉전으로 인한 대일관계 변화의 수혜자
3.2. 비효율적인 연공서열제
4.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기업인으로 마쓰시타 전기산업(현 파나소닉.)의 창업주이다. 일본 내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인물이다.[3]

2. 생애

1894년 (메이지 27년) 일본 와카야마현 카이소 군(現 와카야마시)의 가난한 집안에서 3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운 생활을 했다.[4] 자전거 가게 점원으로 17세까지 일하고 이후 시멘트 운반업을 거치며 1910년에 오사카 전등 주식회사에 입사한다. 그러나 1917년 허약한 몸으로 인하여 퇴사하고[5] 1918년 3월 7일 오사카시 키타구(北区. 오늘날 후쿠시마구) 오비라키 1번가 2층 목조 가옥을 빌려 마쓰시타 전기기구제작소를 창립했다.

직원은 마쓰시타 부부와 마쓰시타의 처남 이우에 도시오(훗날 산요전기 창업자)가 전부였지만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나쇼날(내셔널의 일본식 표기), 파나소닉 브랜드로 유명한, 연매출 7조 엔(연결기준)이 넘는 세계 굴지 기업으로 발전하였다. 아무리 기업이 어려워도 절대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종신고용을 사수하면서 일본식 연공서열제도를 확립한 인물이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로 대표되는 마쓰시타의 경영철학은 전후 고도성장기에 일본 기업의 롤모델이 되었고, 마쓰시타는 일본 내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1962년 2월 23일에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하였다.[6] 작가는 카타야마 난푸(堅山南風). #

1961년, 마쓰시타 전기의 사장에서 회장으로 옮기며 일선에서 물러나고 1973년에 상담역으로 회사 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이후 만년인 1979년에는 자신의 재산 70억 엔을 들여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이란 4년제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쉽게 말해서 사설 정치/행정대학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학교는 2000년대에 와서는 수십명의 의원, 장관, 지자체장 등을 배출한 정치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일본 내에서는 상당히 잘 알려진 기관이다.

국내에서는 파나소닉이 전범기업이라는 점 때문에 마쓰시타 정경숙을 자민당 정치인 양성기관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의 대부분은 자민당이 아닌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며[7], 최초로 이곳 출신으로 내각총리대신 직을 역임한 노다 요시히코도 민주당 출신의 총리였다.[8]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의 정계 엘리트들은 1993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대거 정계에 진출하여 현재 양당 중진 의원에 많이 분포해있다. 이때 첫 당선된 이들이 민주당에선 겐바 고이치로, 마에하라 세이지(10선), 노다 요시히코(9선), 자민당에선 다카이치 사나에, 이토 다쓰야(9선) 등이다. 이 중 다카이치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이토는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 정치인 중에 첫 각료를 역임했다. 일본 국내의 정치 엘리트 육성을 위한 기관인 만큼 외국인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주간조선에서 활동하는 유민호 퍼시픽 21 소장이 이곳 출신이다. 유민호 소장이 쓴 마쓰시타 정경숙 경험기

3. 논란

3.1. 한국과 불편한 관계

3.1.1. 전범기업

파나소닉의 전신인 마쓰시타 전기산업은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주요 기업들이 그랬듯이 전쟁 물자 공급에 큰 역할을 했던 소위 전범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해 노동시킨 전력도 있기 때문이다. 해당 기사[9][10] 상기된 처남 이우에가 산요전기를 창업하게 된 것도 목조선 건조를 담당했던 이우에가 마쓰시타 전체의 책임을 지고 공직추방을 당했기 때문이다.

3.1.2. 냉전으로 인한 대일관계 변화의 수혜자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고 냉전 체제가 구축되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변화하자, 제재 조치가 풀리고 경기가 활성화되는 덕을 봤다고도 한다. 실제로 미국은 소련이라는 더 큰 적을 앞두고 있었기에 남한과 일본을 전진기지로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11] 오키나와 미군정도 그 당시의 산물인 것. 요컨대 그가 일본의 경제에 기여한 업적과는 별개로, 한국과 직간접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2. 비효율적인 연공서열제

또한 그가 정립한 일본식 기업문화는 비효율성과 경직성, 혁신에 대한 기피로 이어져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를 정체시킨 원흉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노사간의 끈끈한 유대를 통해 대공황을 이겨내고 여기에 상술한 6.25 전쟁의 특수효과를 누리며 회사를 재건했으나, 당시 방침을 어떻게 보면 안이하게 유지했기 때문에 내부 문제가 곪다가 터진 것. 후술할 시마 시리즈에서도 현실 역사를 어느 정도 반영하여 극중 "하츠시바"의 창업주 요시와라 쇼타로(=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주창한 '하츠시바이즘'을 부수고 전면적인 대개혁을 하는 장면이 시마 이사나 시마 상무 즈음에 나온다.

물론 시대에 맞는 정책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그것을 마쓰시타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론도 있다. 마쓰시타가 경영에 완전히 손을 뗀게 1974년이니 비판이 나오는 시기 까지 약 20여년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쓰시타 신격화로 인해 변화를 거부하는 낙후된 사고방식'을 지적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실제로 마쓰시타의 어록 중 "(위기일수록) 경영자의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마쓰시타 본인이 자기가 세운 정책을 고집했을지는 미지수이다.

4. 기타



[1] 사인은 기관지 폐렴.[2] 그 덕분인지 90세가 넘는 장수를 누렸다.[3] 닛폰 테레비가 2006년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을 설문조사한 적이 있는데 전체 리스트에서 5위, 기업인으로서는 토머스 에디슨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눈여겨볼 점이라면 파나소닉의 업계 라이벌이자 서양권에서 일본 최고의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소니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는 이 리스트에서 들지 못 했다는 사실. 일본의 기업가로는 마쓰시타 이외에 혼다 소이치로가 91위에 든 것이 전부였다.[4] 와카야마선 센다역에서 내려서 걸어서 몇 분 가면 그의 출생지가 있다.[5] 몇몇 위인전에서는 나름대로 신작을 고안했으나 상층부에게 무시당하는 등 여러가지 제약이 많자 독립했다고 나온다. 나중에 당시 신작의 문제점을 파악하기를 '기술공들에게만 편리했지 소비자에게는 편리하지 않았다'고 한다.[6] 당시 마쓰시타는 한국 나이 기준으로 68세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이미 많이 장수한 셈.[7] 현재는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으로 나눠져 있다.[8]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 중에는 친중파가 많은데 이는 창립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부터가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될 것이라며, 학생들한테 중국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이들이 주로 민주당에 진출한 이후 민주당은 친중 성향이 강한 편이 되었다. 다만, 마에하라 세이지, 노다 요시히코 같은 반중 성향인 인사들도 좀 있다.[9] 이 기사는 약간 걸러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마쓰시타 정경숙을 우파 정치인 육성 기관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다.[10] 과거 웅진출판사에서 집필한 "20세기의 큰 인물" 위인전 시리즈에선 일본군이 마쓰시타에게 연습용 목제 비행기와 목조선을 만들라고 압박하자 마쓰시타가 어쩔 수 없이 이에 따르고, 종전 이후 미군정에게 재벌이라며 제재 조치를 당하자 "연습용을 만든 것도 무기 생산에 들어가냐"라며 타카하시(당시 부사장)가 항의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판단은 각자에게 맡긴다.[11] 더글러스 맥아더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맥아더는 전후 일본의 군국주의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히로히토(쇼와 덴노)에게 '인간선언'을 사실상 강요하여 수많은 일본인들을 충격에 빠트리고 일본을 점령했다. 하지만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6.25와 냉전으로 인해 맥아더의 통제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