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2-12 14:16:03

마츠나가 나가요리

松永長頼
? ~ 1565년

1. 소개2. 나가요시의 부장3. 탄바에서의 활약4. 최후5. 기타

1. 소개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악인의 이미지로 유명한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동생. 미요시 북부 영토 확장의 군단장.

키나이 미요시 가문 정치의 쌍두마차던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친동생. 가명은 진스케(甚介)이며 나이토(内藤) 가문과 혼인을 맺고 가문의 어린 당주를 보좌하게 되자 나이토 무네카츠(内藤宗勝)로 이름을 바꾸어 미요시 정권 군사력의 일각을 담당했다.

2. 나가요시의 부장

마츠나가 형제는 미요시 나가요시에 의해 등용되어 본격적으로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가요리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시기는 1549년으로 에구치 전투(江口の戦い)에서 승리한 뒤 야마시로에서 소고 카즈마사와 함께 압령(押領)을 실행하였다고 한다.

이후 나가요리는 나가요시의 부장으로서 호소카와 세력의 잔당을 격퇴하기 위해 오미까지 출진하는 일도 있었으며 부교(奉行)의 위치로서 미요시 가문의 중신인 미요시 나가야스와 함께 나가요시의 명령을 수행하는 등 미요시 가문의 세력 확장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야마시로 근방이 어느 정도 미요시 가문에 복속되자 나가요리는 호소카와 하루모토 세력의 남아있는 거점을 점거하기 위해 1553년 9월, 탄바로 출진하였다.

3. 탄바에서의 활약

탄바로 출진한 미요시 가문이었지만 얼마 못가 호소카와 세력에게 패배한데다 미요시 측에 가담하고 있던 탄바노쿠니 슈고다이(丹波国守護代)이자 야기 성(八木城)주인 나이토 쿠니사다(内藤国貞)마저 사망하여 상당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나가요리는 이런 상황에서 출진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동시에 야기 성의 구원에도 성공하였다.

나가요리는 나이토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야기 성에 입성하였고 쿠니사다의 아들인 치카츠(千勝)를 후계자로 내새워 나이토와 미요시의 관계를 더욱 견고히 만들었다. 이윽고 1556년, 나가요리는 자신의 이름을 나이토 무네카츠로 바꾸어 자신이 미요시의 가신이자 나이토의 일문이라고 알렸다. 이후 무네카츠는 사실상 탄바의 지도자가 되어 나이토 가문의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타노(波多野)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반미요시 세력과 싸워 나가며 나가요시가 군사를 요청할 때면 군세를 이끌고 전투에 나선데다[1]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본인이 직접 문서를 발급하여 탄바를 통치하는 등 명실상부한 미요시 가문의 군단장이 되었다.

무네카츠는 탄바에서의 기반을 안정시키며 탄바 야가미 성(八上城)의 하타노 히데타다(波多野秀忠)와 싸워나갔다. 이윽고 탄고까지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1560년에는 와카사의 아와야(栗屋) 가문과 연합해 와카사 타케다(武田) 가문과도 전쟁을 시작하며 나가요시의 확장 전쟁에도 참가하는 등 미요시 가문 영토 확장에 전념하게 되었다.

4. 최후

이렇게 미요시 가문의 최중요 인물 중 한 명이 된데다 세력 싸움을 주도하는 위치까지 올라간 무네카츠였지만 1561년, 와카사 타케다 가문과의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결국 무네카츠는 나가요시 사망으로부터 얼마 지나지않은 1565년, 그의 본거지 탄바의 코쿠진(国人)인 오기노 나오마사(荻野直正)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무네카츠의 죽음은 미요시 가문에 상당한 타격을 가져왔다. 그의 후사는 아들인 나이토 죠안이 이었으나 탄바에서는 나이토 가문을 밀치고 하타노 가문이 대두하였으며 미요시 가문은 야마시로 이북의 영향력을 상당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나이토 가문의 당주 치카츠는 죠안의 보좌로 탄바의 통치를 계속해 나가나 1579년, 야기 성이 낙성되어 다이묘로서의 나이토 가문은 멸망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이 되었던 나이토 죠안도 세키가하라에서 패하고 주군 유키나가가 패사한 후 천주교도라는 죄목으로 추방형을 받아 필리핀 마닐라로 추방되어 거기서 죽으면서 나이토 가문은 완전히 멸망했다.

5. 기타

마츠나가 형제는 미요시 가문에서 중대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많은 연구와 평가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더욱이 과는 달리 나가요리의 이름이 남아있는 사료도 부족하여 나가요리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아있는 상태다. 당장 대역무도한 이미지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그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언급을 하지않는 경우가 부지기 수다.

언급시기는 형보다 느리지만 출세는 형보다 빨랐다. 히사히데가 막부에게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나가요시에게 야마토 방면의 군단장을 명령받았을 때 나가요리는 이미 탄바 방면의 군단장으로 탄바의 경영에 힘쓰며 탄바 이북으로 진출하는 중이었다. 이를 근거로 나가요리의 군사적 능력이 히사히데보다 뛰어났을거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파일:松永長頼.jpg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이미 오래전인 2004년에 발매된 태합입지전 5에서도 등장했지만[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천상기, 람세기, 창천록 이후 나오지 않다가 창조에서 재등장. 여담으로 시부사와 코우는 발매전 인터뷰에서 마츠나가 나가요리는 등장하지 않을 거라고 한 적이 있었다.

센고쿠히메에서 등장한 적이 있다.


[1] 대표적인 예로 미요시 가문과 아시카가 가문의 최후의 전투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으며 직접 군의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는 마츠나가 히사히데미요시 나가야스도 참전했으며 나가요시와 요시테루의 화친으로 결말이 맺어진 중요한 전투였기 때문에 한 명의 장군으로 참전한 무네카츠가 미요시 가문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쉬이 추측해 볼 수 있다.[2] 능력치는 형에 비하면 지모, 정치. 매력이 심하게 낮지만 대신 통솔과 무력이 형보다 더 높다. 즉 맹장형 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