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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3:16:01

마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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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두원.jpg
이름 마두원 (, Ma Du Won)
드와이트 말스베리 (Dwight R. Malsbary)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출생 1899년 5월 22일
미국 캘리포니아 스톡턴
사망 1977년 7월 30일 (향년 78세)
강원도 홍천군
직업 음악선교사
학력 캘리포니아 프레스노 초급대학
시카고 셔우드 음악대학
1. 개요2. 생애3. 이모저모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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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치선 목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을 세웠고 대한신학교 초대 이사장이자 초대 ICCC 한국 지부장이었고 대한민국의 서양음악계에 큰 영향을 끼친 장로회선교사. 그리고 최초로 조선에 파송된 음악선교사이다.

멘델스존, 슈베르트, 리스트를 즐겨쳤던 낭만주의 음악가였다. 그의 찬송가들은 멘델스존의 ‘무언가’(Songs without Words) 스타일과 비슷하다 #

2. 생애

1899년 5월 22일 미국 캘리포니아 스톡턴(Stockton)에서 태어났다. 1920년 캘리포니아 프레스노 초급대학을 마치고 1924년 시카고 셔우드 음악대학을 졸업하였다. 1923~29년 모교의 피아노와 음악 이론 강사로 일하였다.

1929년 한국 선교에 뜻을 느끼고 미국 북장로회의 음악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1929~37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과장으로,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서양 학교 음악(밴드)ㆍ관현악ㆍ피아노 강사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한국에 서양음악을 소개했는데 그가 조직한 숭실밴드는 한국은 물론 만주에서도 순회공연을 하며 사람들을 음악으로 위로했다. 그의 밑에서 김동진(작곡가), 박태준(전 연세대 음악대학장), 김홍전(대전대학학감, 음악가), 채리숙(오페라), 한동일(피아니스트), 백건우(피아니스트), 안익태 등 굵직한 한국의 음악가들이 배출됐다.

1936년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마두원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사임하고 학생들과 자신의 집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이 곳에서 함께 기도했던 학생들이 강태국(한국성서대 설립자), 방지일, 박윤선 목사(예장합신 설립자) 등이었다. 1937년 무디성경학교에서 잠시 수학한다.

결국 1940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으로 강제 귀국당한다. 1941~42년 일리노이 주 키케로(Cicero)의 키케로 성경 교회에서 목회하고, 1942~47년 캐나다의 프레어리(Prairie) 성서 학원에서 악리론ㆍ피아노ㆍ합창ㆍ관현악 등을 교수하였다. 1947년 훼이스 신학교에서 보수신학을 공부한다.

1948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중앙방송국(현 KBS)의 ‘Piano playing at the religious’라는 방송을 주일마다 진행하고, 부산에서 보수신앙운동을 하였다. ICCC의 한국 지부장이 된다. 1956년까지 고려신학대학, 칼빈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피아니스트 한동일백건우를 가르쳤다.HLKA 및 HLKY를 통하여 피아노와 합창단의 지휘자로 때때로 연주하였다. 침례신학교, 성결신학교에서 강의했다.

1961년 김치선 목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공동 창립하였으며,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 27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게다가 홍천의 두 마을에 제이드(Jade) 병원을 설립하였다.

1962년 대한신학교의 초대 이사장이 된다. 1965년 훼이스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얻게 된다. 1969년 성경장로회 개설 신앙신학교를 개설하고 교장으로 취임한다.

1977년 7월 30일 강원도 홍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77년 8월 5일 경기도 파주시 기독교일산공원묘지에 묻혔으나 그동안 잊혀졌다가 2011년 다시 발견되어[1] 2018년 8월 27일 홍천희망교회 희망동산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아내였던 마포린 사모는 마두원 선교사가 사망하고 1년 뒤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숨졌다. 그의 아들도 미국에서 90년대 중반 사망했다.

2014년 마두원선교사기념사업회는 연내 마 선교사 전기를 발간하는 한편 그와 사모의 유골을 한국에서 합장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거기에 '음악 선교사 마두원’ 기념 음반이 나왔다. 그의 제자였던 피아니스트 김애자가 마두원의 찬송피아노편곡집을 재해석, 연주 앨범을 낸 것이다. 한국과 미국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김애자는 아버지인 영창악기 설립자 김재창씨와 함께 마두원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3. 이모저모

4. 같이 보기



[1] 수십 년 관리비가 밀린 탓인지 잡초로 덮여있었다. 결국 예장대신 동강원노회 목회자 등이 그동안 밀린 관리비 400만원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