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38:47

리학구

李學九
리학구
파일:attachment/리학구.png
출생 1922년(?)
사망 1963년 (향년 41세)
1. 개요2. 생애

1. 개요

6.25 전쟁 당시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 부대 중 하나였던 13사단의 참모장이었다.[1] 계급은 총좌.[2]

2. 생애

13사단은 6.25전쟁 초반에 한국군미군을 밀어붙이며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했으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하여 부대가 고립되었다. 이 때 리학구는 자신이 모시던 사단장인 홍용진(洪鏞鎭) 소장과 후퇴하네 마네 하면서 옥신각신했다. 리학구는 조금이라도 빨리 후퇴해서 병력이라도 살려보자는 반면, 홍용진은 결사항전으로 버티자고 해서 두 사람은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결국 리학구는 홍용진을 자신의 권총으로 쏴 팔에 부상을 입히고 탈출하여 1950년 9월 21일 오전 다부동 남쪽 4km 지점에 있는 삼산동 부근 길가에서 자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소속 병사를 흔들어 깨워서 투항했다.

앞서 8월 29일 13사단 포병 연대장 정봉욱(鄭鳳旭)[3] 중좌가 한국군 1사단에 투항한데 이은 고위 장교의 투항이었다. 그 후 북한군 1사단, 3사단, 13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와해되어 상주 방면으로 후퇴했으며 특히 13사단은 유난히 많은 귀순·투항자를 내고 사실상 궤멸되었다.

파일:external/www.koreastory.kr/ff7b5bbfa3a9459bd86e190543aceb72_XujAgpcrfrHn8ttAxjT6hs3AeVIq.jpg
미군에 투항한 뒤 이송 중인 이학구.

리학구는 당시 28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전반적인 전황을 잘 아는 고위급 장교로서 귀중한 존재였다. 그는 북한군의 불법남침을 증명해 주는 북한군의 작전명령 제1호 등 중요한 정보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미군 측에서는 투항한 리학구를 포로로 취급하여 거제도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감금했다. 리학구는 거듭 대한민국에 귀순하겠다고 밝혔으나 미군 측에서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는 사로잡은 전쟁포로를 함부로 자국 군대에 편입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포로가 된 윌리엄 F. 딘 소장과의 일대일 교환을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후자는 미국 G-2 정보문서에 근거한 것이라는데 리학구가 귀순할 9월 당시 미군에서는 딘 소장이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고 1950년 10월말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포로로 잡은 북한군 병사의 진술로 미군에서도 이때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을 인지하였다고 한다.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166P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그렇지만 미군에서는 진술보다는 정황상 전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1월 9일에 명예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 중 1951년 12월 21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종군기자 월프레드 버체트를 초청해서 인터뷰를 시키면서 딘 장군이 생존해 있고 자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휴전 협정 이전에 유엔군 측에서 비밀리에 일대일 교환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근거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도 고위급 장교였기에 미군 측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4]

리학구 등의 포로들이 수용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말 그대로 헬게이트였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가 툭하면 현피를 떴고 현피만 뜨면 반드시 사상자가 발생했다. 심지어는 친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 돗트 준장을 생포해서 인질극을 벌이는 상황까지 갔다.[5] 이 상황에서 리학구는 단지 포로들 중 가장 계급이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공포로의 대표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리학구의 위장투항설이 거론되기도 했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전쟁 포로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는 것만 빼고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하였다고.

결국 리학구는 휴전 협정 후 포로 교환에 의해 북한으로 귀환하였는데 유엔군과 공산군이 서로 최고 계급 포로였던 소장과 리학구 총좌가 맞교환 형식으로 송환되었다는 설이 있었지만 휴전 협정 과정에서 오랜 진통 끝에 유엔군과 공산군이 원칙적으로 자유 의사에 따라 귀환을 원하는 포로들을 모두 상대방에게 송환하기로 합의했었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없고 결론적으로 잘못 알려진 설이다.

즉 양 측이 포로 인원수 및 계급 등 조건에 따라 포로 교환을 진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엔군에서 포로로 붙잡고 있던 리학구 총좌 그리고 공산군에서 포로로 붙잡고 있던 딘 소장 이렇게 상대방의 고위급 포로를 수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둘다 귀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덧붙여 미군 측 기록에도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하였다는 근거자료는 전혀 없으며 국내에서도 2000년대까지 딘 소장이 리학구 총좌와 맞교환에 의해 귀환했다는 기사 등이 전혀 없었는데 2010년대 이후 이런 설이 갑자기 생겨났다.


[1] 원래 리학구는 개전 당시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의 작전참모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김광협이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되면서 보직이 바뀌었다.[2] 총좌는 국군 계급으로 따지면 대령. 현재 북한군 계급으로는 대좌이다. 현재 북한군 장교 계급은 대-상-중-소 체계이지만 6.25 전쟁 당시에는 총-대-중-소 체계였다.[3] 1923~2018[4] 차라리 국군에 투항했다면 다부동 전투 때 국군에 투항해 소장까지 진급한 정봉욱 장군처럼 국군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5] 이 당시 인질로 잡힌 돗트 준장과 그 후임으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의 요구를 수용해줬던 콜슨 준장 이 두사람은 대령으로 강등 조치후 바로 현역부적합 전역시키고 포로들에게 난폭하기로 악명높은 보트너 준장을 부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