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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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대공국 | 나치 독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리투아니아 임시정부 |
리투아니아 공화국 Lietuvos Respublika Pirmąja Respublika | |||
국기 | |||
1918년 11월 2일 ~ 1940년 7월 21일 | |||
{{{#fff 성립 이전}}} | {{{#fff 멸망 이후}}} | ||
리투아니아 왕국 | 리투아니아 SSR | ||
<colbgcolor=#c1272d> 위치 | 리투아니아 | ||
수도 | 명목상 빌뉴스, 사실상 카우나스 | ||
정치체제 | 공화제 → 군부독재 | ||
국가원수 | 대통령 | ||
언어 | 리투아니아어 | ||
통화 | 리투아니아 리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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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간기 1918년부터 1940년까지 존재했던 국가. 이로서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분할 이후 123년만에 독립을 쟁취하지만 시작부터 폴란드 제2공화국에게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수도를 포함한 영토를 뜯겨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졌었고 이후에 불과 22년만에 소련의 침공으로 단명하게 된다.2. 역사
2.1.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
1918년 독일 제국의 항복 이후 독일이 동부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자 독일계 국왕을 중심으로 세워진 괴뢰국 리투아니아 왕국은 의회의 결정에 따라 군주제를 폐지한 후 공화제를 도입하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한다.하지만 독립 직후부터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던 소비에트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1918)을 수립하여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3국을 침공하게 되고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이 발발한다. 1918년 11월부터 1919년 8월까지는 러시아 적군과, 1919년 7월부터 1919년 12월까지는 러시아 백군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1920년 8월부터 1920년 11월까지는 폴란드군을 차례차례 막아내며 독립을 지켜냈지만 폴란드에 의해 자국의 전통적인 수도 지역 빌뉴스를 폴란드의 괴뢰국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에 잃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폴란드가 모든 외교적인 타협안을 무시하고 자국의 수도 빌뉴스를 합병하고도 국제연맹의 그 어떤 제재도 받지 않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하여 리투아니아 정부는 카우나스로 옮기게 된다.
2.2. 민주정부 시절
폴란드와의 전쟁 도중 1920년 4월에 세워진 제헌의회는 같은 해 6월 제3차 임시헌법을 제정하고,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평화조약으로 러시아에게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922년 10월, 리투아니아의 첫 의회가 세워졌지만 그 어떤 정당도 다수를 점하지 못하였고 결국 1년 내에 해산되었다. 하지만 그 정치적 위기 와중에도 1923년 리투아니아는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었던 메멜란트의 프랑스군이[1] 루르 점령으로 철수하자 봉기를 지원해 합병해 버린다. 당시 메멜란트 지역은 41.9% 독일계, 27.1% 메멜란트계 (루터교회를 믿는 과거 프로이센 지역의 리투아니아인), 그리고 26.6% 리투아니아인이었는데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는 30년대 도중 몇 차례의 독일인들의 봉기를 겪게 된다. 제1의회가 해산되고 메멜란트 합병도 끝난 이후 1923년 기독민주당이 다수를 점한 제2의회가 출범하게 된다. 리투아니아 제2의회는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전체를 채운 정부였으며 토지개혁, 사회보장제도 도입, 경제재건 및 외채상환 시작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2.3. 군부독재
1926년 3번째 의회에서는 기민당이 실각하고 농민당과 사민당의 연정으로 좌파정부가 출범하게 되지만 당시 반공 반소 기조가 강하던 와중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정부가 리투아니아를 공산화하려 한다는 주장이 퍼지면서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고 기민당과 국가주의당의 제4의회가 출범, 제2대 대통령이었던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하지만 군부는 이마저도 해산하고 군부를 주축으로 한 제5의회를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 안타나스 스메토나의 군부독재가 수립된다.나치당이 독일에서 집권하자 독일은 리투아니아의 메멜란트 반환을 요구하며 리투아니아에 무역제재를 가하고 이에 의해 리투아니아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이에 1936년, 반정부 기조가 강화됨에 따라 1926년 독재 시작 이후 최초로 선거가 실행되지만 이때 수립된 의회는 직접적인 실행력이 없었으며 그마저도 1926년 이후 국가주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은 해산되었으므로 별 의미는 없었다.
2.4. 멸망
리투아니아 군부는 나치 독일과 소련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리투아니아를 언젠가는 병합할 나라로 보았고, 1939년 나치 독일은 메멜란트의 반환에 관한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결국 리투아니아는 메멜란트를 반환한다. 그리고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이 빌뉴스 지역을 폴란드에게서 빼앗아 리투아니아에 반환하며 소련과는 원만한 관계로 지낼 수 있나 했더니 1940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결과대로 소련은 리투아니아에 현 정부를 해산하고 리투아니아 SSR의 수립을 받아들이고 소련군의 점령을 허가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결국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은 이렇게 멸망하고 만다. 그나마 1939년에 독일에 할양했던 메멜란트(클라이페다)를 리투아니아 SSR 시기인 1945년에 반환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조그마한 위안거리였다.3. 이후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병합된 이후 수천 명의 리투아니아인 지식인은 시베리아로 유형당하거나 처형당했으며 강제적인 집단화가 진행된다. 이런 강압적인 소련의 지배에 불만을 가진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은 나치 독일의 점령을 환영하고 나치 점령 초기에는 많은 이들이 나치에 부역했다. 나중에는 나치들이 소련놈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놈들이란 걸 깨닫게 되지만 이런 소련에 대한 악감정 때문인지 발트 3국 지역에서는 전체적으로 나치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을 가진 이들이 간간히 보인다.게다가 리투아니아는 규범에 바탕한 망명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2] 가장 큰 이유는 안타나스 스메토나가 그냥 빤스런하여 정부조직의 공중분해를 초래했기 때문이다.[3] 그래서 리투아니아 외교공관들은 매우 큰 혼란을 겪었으며, 일부는 나치 독일과 결탁하여 6월 봉기를 일으키고 친독 임시정부를 세워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예: 리투아니아인 활동가전선).[4]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야 소련군에서 탈영한 리투아니아군 장교들이 외세(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및 스웨덴)의 원조를 바탕으로 군사정권을 수립하면서 10년간 항전하다가 전멸하고 말았다.[5]
[1] 국제연맹은 군대가 없었기에 위임통치령들은 회원국들이 회원국들의 군대로 운영했다[2] 에스토니아 정부는 대통령이 총리에게 비상대권을 위임했으니, 내각을 구성한 국무위원 및 군부의 절반이 시골로 탈출해 국내외에서 투쟁하는 에스토니아 망명정부(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내각책임제)로 전환했다. 에스토니아 망명정부는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북유럽 나라들의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온나라의 곳곳에서 의용군과 예비군을 싹쓸이로 총동원해 10만 명의 독립군을 창설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업적을 남겼지만, 백만대군을 투입한 소련군과 NKVD의 토벌전으로 마침내 전멸하고, 살아남은 관료들은 핀란드와 스웨덴을 경유하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라트비아 정부는 카를리스 울마니스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라트비아 외교공관들을 라트비아 외교단(외교관들의 정무위원회)으로 개편했으며, 그들에게 비상대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망명정부를 굳이 세울 필요가 없었다.[3] 곧이어 리투아니아 정부 관청들은 순식간에 마비됐는데, 리투아니아 군부가 질서를 유지하면서 소련군을 환영했다.[4] 해외에서 머무르는 리투아니아 외교관들과 사전 교섭이 전혀 없었고, 독일 국방군의 침공에 호응해 카우나스와 빌뉴스에서 봉기에 성공한 유격대들이 군정권을 휘두르는 군정부(軍政府)였기 때문에 규범에 바탕한 망명정부가 아니었으며, 연합국과 추축국은 그들을 마적이나 군벌로 취급했다.[5] 대단히 불리한 형편에서 유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거점을 자주 옮기면서 군령권을 휘두르는 완편사단급의 전투사령부로 발족했는데, 참의부처럼 서유럽에 파견한 특사들이 리투아니아 외교관들과 가까스로 접촉에 성공해 그들의 추인(군사정권의 우두머리=대통령 권한대행)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