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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7:50:46

루이스 스트로스

<colbgcolor=#000><colcolor=#fff> 루이스 릭턴스타인 스트로스
Lewis Lichtenstein Strauss
[1]
파일:lewis_strauss.jpg
출생 1896년 1월 31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찰스턴
사망 1974년 1월 21일 (향년 77세)
미국 버지니아주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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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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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직업 사업가, 군인
복무 1926년~1945년
최종 계급 소장 (미합중국 해군)
학력 존 마셜 고등학교
정당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유럽에서의 활동2.3. 사업가의 길을 걷다2.4. 미합중국 해군 복무2.5. 미국 원자력위원회 시절2.6. 정계 입문과 몰락
3. 오펜하이머와의 악연4. 수상 이력5. 미디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미합중국 해군 소장 출신이자, 대중에게는 미국 원자력위원회(United States Atomic Energy Commission, AEC) 의장으로 알려진 인물.[2]

2. 생애

2.1. 유년기

1896년 1월 31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찰스턴에서 태어났다. 스트로스의 부모님은 19세기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었다.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며, 물리학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성적도 우수하여 버지니아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 할 수 있을정도였는데, 하필이면 고등학교 졸업시즌에 장티푸스에 걸려서 시험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또래들보다 졸업을 1년 늦게 하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대학교의 길을 포기하고 아버지 회사에서 구두 판매원 일을 하게 된다. 나름 수완이 좋았는지, 판매원으로 일한지 3년만에 2만달러를 모으게 된다. 대학 입학금으로 대고도 남을 돈이 었는데, 대학입학 대신, 어머니의 권유로 유럽으로 구호활동을 하러 떠난다.

2.2. 유럽에서의 활동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스트로스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나중에 미국의 31대 대통령이 되는 허버트 후버의 밑에서 일을 하는데, 당시 후버는 유럽에서 구호활동을 벌이던 시절이었고, 스트로스는 후버를 따라서 활동하며 유대인들 구호활동에도 신경썼다. 1919년까지 유럽에 있었는데, 당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을 보면서 반공주의 감정을 키우게 된다. 후버와의 인연으로 신발 사업을 하며, 경제계의 인맥도 쌓고, 국제연맹에서 일자리를 제안받기도 하나 사양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2.3. 사업가의 길을 걷다

미국으로 돌아온뒤, 유럽에서 쌓은 경제계 인맥을 바탕으로 쿤로브(Kuhn, Loeb & Co.)라는 투자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성실한 모습으로 회사 공동경영자의 딸 앨리스 하나우어와 결혼하고 1929년엔 그 자신이 공동경영자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 해 미국에서 대공황이 일어났지만 쿤로브사는 비교적 피해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2.4. 미합중국 해군 복무

1930년대, 스트로스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반대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출세가도가 방해받지는 않았다.[3] 그는 진주만 사건 9개월 전에 해군부 군수국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해군부 장관 제임스 포레스탈의 눈에 띄어 특별 보좌관으로 승진한다. 이때의 공헌으로 인해 전쟁이 끝나자 해군 소장(제독)이라는 명예 계급장을 받았다.

2.5. 미국 원자력위원회 시절

공직에서의 활약으로 스트로스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이사장, 원자력위원회 의장을 지내게 된다.

이때 연구소 소장, 원자력위 자문위원을 맡게 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원자력위 의장 시절 원자폭탄 연구에 예산이 워낙 많이 들자 예산확보를 위해 노르웨이에 동위원소를 수출할 것을 제안받았다. 동위원소는 핵분열이 되지 않는 대신 항암치료에 사용되는 관계로 원자폭탄으로 개발될 위험은 없으나,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스트로스는 이를 원자폭탄 개발 위험이 있다며 반대했다.

이를 한심하게 여긴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개발 위험성은 없다며 증언했다. 게다가 이를 단순히 개발의 위험이 없다는 식으로 증언한 것이 아니라 망치나 샌드위치도 핵폭탄 개발 시 필요하다며 동위원소의 수출을 막는 것은 멍청하다고 돌려까며 스트로스는 제대로 굴욕을 당했다. 이때의 악연이 향후 오펜하이머를 압박하는 계기가 된다.

2.6. 정계 입문과 몰락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스트로스는 유능한 공직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마침내 1959년 아이젠하워는 그에게 백악관 비서실장이란 요직을 제의했으나 스트로스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망설인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국무장관 자리를 제의했지만,[4] 스트로스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크리스티안 허터가 또다른 후보자임을 알고 양보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옵션을 다시 바꿔서 상무장관직을 제의했고 스트로스는 이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승낙한다.

하지만 스트로스는 이미 자신에게 '유능한 공직자'라는 평판 뒤에 '독선적인 지도자' 등 좋지 않은 이미지도 결합되어 있음을 간과했다. 이때까지만해도 보통 대통령이 내각 장관을 임명하면 악질적인 범죄경력이 있지 않은한 상원은 인준해주는 게 관례였지만, 이번에는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이례적으로 스트로스를 거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트로스는 자신을 향한 의혹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으며, 의회 밖에서도 그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5][6]

결국 스트로스는 찬성 46표, 반대 49표로 상원에서 인준을 받지 못했고 이후 두번 다시 재기하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몰락한다.[7] 이후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둘 다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소장직, 이사장직은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스트로스는 오펜하이머의 사저 설립을 방해하는 등 소심한 복수를 일삼다가 오펜하이머가 1967년, 스트로스가 1974년 각기 숨을 거두면서 수십 년에 걸친 그들의 대립도 끝난다.

3. 오펜하이머와의 악연

2023년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와의 악연이 그려지는데, 거의 대부분이 사실이다.
1949년 6월 초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 증언이 있고 나서 엿새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에너지 합동 위원회 공개회의에서 또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했다. 이번 주제는 연구 목적으로 외국의 실험실에 방사성 동위 원소를 수출하는 문제였다. 치열한 논쟁 끝에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들은 수출을 승인했다. 유일한 반대표를 던진 위원은 스트라우스였는데, 그는 방사성 동위 원소가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수출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얼마 전, 스트라우스는 합동 위원회 청문회에서 수출에 반대하는 증언을 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상원 빌딩의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스트라우스의 입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런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는 “그 누구도 방사성 동위 원소를 원자력 에너지를 얻는 데에 절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자력 에너지를 얻으려면 삽도 필요하지요. 원자력 에너지를 얻으려면 맥주도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자 청중석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 필립 스턴(Philip Stern)이라는 젊은 기자가 청문회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1391 스턴은 이런 야유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몰랐지만, “오펜하이머가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것은 명확했다.”라고 썼다.


볼피는 누가 바보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증언대의 오펜하이머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는 스트라우스의 얼굴이 시뻘개지는 것을 보았다. 오펜하이머의 다음 발언은 더 많은 웃음을 자아냈다. “이렇게 보았을 때, 방사성 동위 원소는 전자 장비들보다는 훨씬 덜 중요하고, 예를 들어 비타민보다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진실이 있겠죠.”


나중에 오펜하이머는 볼피에게 무심코 “오늘은 어땠어?”라고 물었다. 볼피는 조금 거북했지만 “잘 했어요, 로버트. 너무 잘 했어.”라고 대답했다. 오펜하이머가 사소한 의견 차이 때문에 스트라우스에게 망신을 주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쉽게 오만함을 보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그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것이었다. 한 친구는 “로버트는 다 자란 어른들도 어린아이처럼 느끼게 할 수 있었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거인도 바퀴벌레처럼 느끼게 했어요.”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어린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예민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데다, 쉽게 수치심을 느끼는 성격을 가졌고 권력까지 쥐고 있었다. 그는 그날 매우 화가 나서 청문회장을 떠났다. 또 다른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인 고든 딘은 “나는 루이스의 무서운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라고 말했다. 몇 년 후 릴리엔털은 “그는 사람 얼굴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증오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라고 생생하게 기억했다.

카이 버드, 마틴 셔윈, 최형섭 역,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010, 사이언스 북스, 28장
오펜하이머의 정적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의 옛 친구인 체르니스가 수년 전에 논평했듯이 오펜하이머는 종종 “매우 잔인한” 말을 했다.1539 그는 부하들에게는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었지만, 동료들에게는 매우 예리했던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가장 위험한 정적 중 하나였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지난 여름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의 권고를 놀림감으로 삼았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스트라우스는 1949년 7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요즈음은 그리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했다.1540

카이 버드, 마틴 셔윈, 최형섭 역,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010, 사이언스 북스, 31장
스트라우스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오펜하이머에게 소개하려 하자, 오펜하이머는 퉁명스럽게 어깨 너머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가 버렸다. 스트라우스는 당연히 격분했다.

카이 버드, 마틴 셔윈, 최형섭 역,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010, 사이언스 북스, 30장
오펜하이머 세력에 의해 음해 당했다는 오해도 실화에 근거했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여러 정책들이 계속 반대에 부딪치자 그는 점점 신경질적이 되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와 그의 친구들에 대해 “내가 동료들과 의견을 달리할 용기가 있다는 이유로 그들은 내가 불경죄를 지었다고 여긴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가까운 친구인 허버트와 앤 윌슨 마크스가 “내가 ‘고립주의자’라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믿었다.

카이 버드, 마틴 셔윈, 최형섭 역,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010, 사이언스 북스, 31장

4. 수상 이력

5. 미디어에서

5.1. 오펜하이머

파일:로다주 스트로스.jpg
파일:로다주 스트로스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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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내각사무실장 맥스웰 M. 랍로버트 키스 그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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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계 이민자 2세대이자 미국 남부 태생이므로 영어식인 /ˈstrɔːz/로 발음한다.[2] J.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는 루이스 스트라우스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지만, 스트라우스 본인은 유대혈통과 남부출신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하여 자신의 성을 영어식에 가깝게 스트로스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3] 훗날 스트로스와 대립하게 된 오펜하이머는 뉴딜 정책을 비롯한 루스벨트의 주요 정책에 동조적인 편이었다.[4]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수년 동안 국무장관으로 재직했던 존 포스터 덜레스가 지병인 암으로 사직한 상태였다. 덜레스는 얼마 안되어 사망했다.[5] 스트로스는 그것이 오펜하이머의 추종자들이 복수한 거라고 굳게 믿었다.[6] 훗날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는 "대통령의 지명을 반대하는 건 극단적인 경우여야 한다."라고 우려를 표했지만, 동료 의원이 "지금이 바로 극단적인 경우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오펜하이머 사건에서 스트로스가 행한 간첩몰이를 설명해주자 마음을 바꿔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7] 이때 버니스 브로디가 오펜하이머에게 보낸 전보의 내용이 걸작이다. "재미있는 쇼가 벌어지고 있음. 이렇게 원수를 갚게 되다니. 그의 몸부림과 고통을 즐기시오. 좋은 시간 보내길.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