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5819B><colcolor=#ffffff> 아르망티에르 후작 루이 드 콩플랑 Louis de Conflans, Marquis d'Armentières | |
이름 | Louis de Conflans (루이 드 콩플랑) |
출생 | 1711년 2월 23일 |
사망 | 1774년 1월 18일 (향년 62세)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배우자 | 아델라이드 잔 프랑수아즈 드 부테루 도비니 (1733년 결혼 / 1746년 사망) |
마리 샤를로테 드 세느테르 (1770년 결혼) | |
자녀 | 루이 앙리 가브리엘, 루이 샤를, 루이즈 가브리엘, 샤를 루이 가브리엘 |
아버지 | 아르망티에르 후작 미첼 3세 드 콩플랑 |
어머니 | 다이앤 가브리엘 드 쥐사크 |
형제 | 르네 |
[clearfix]
1. 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군인이자 귀족. 육군 사령관으로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동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콩플랑은 1711년 2월 23일에 태어났다. 그는 미첼 3세 드 콩플랑과 다이앤 가브리엘의 아들이었다.1717년, 콩플랑은 아버지로부터 오를레앙 공작을 첫번째로 알현할 수 있는 신사의 자격을 물려받았다. 1726년, 콩플랑은 친위 총사대에 합류했고 1727년 9월 16일 앙주 보병대의 지휘를 맡았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콩플랑은 이탈리아에서 복무했고 1733년 5월 15일 아델라이드 잔 프랑수아즈 드 부테루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1736년 9월 19일, 콩플랑은 과스탈라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준장으로 승진했다.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콩플랑은 보헤미아 전역에 가담했으나 적에게 체포되어 프라하에서 억류되었다가 포로 교환 협상으로 풀려났다. 1742년, 콩플랑은 보헤미아에서 라인강으로 후퇴하는 프랑스군에 가담했고 1743년 2월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으며,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지휘를 받는 플랑드르 군대에 배속되었다. 콩플랑은 플랑드르에서 메닝, 이프레, 퓌른 포위전에 가담했고, 1745년 5월 11일 폰테노이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투르나이 포위전에서도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그는 오스텐드와 니우포트 포위전에 가담했으며 나무르 요새 공방전에도 참가했다.1746년 5월 9일 그의 아내 아델라드가 사망했고, 같은 해 10월 11일 로쿠스 전투 승리에 큰 공을 세운 뒤 이 소식을 루이 15세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루이 15세는 그의 공적에 크게 기뻐하며 콩플랑을 중장으로 승진시켰다. 또한 콩플랑은 1747년 7월 2일 라우펠트 전투에 가담했으며 1748년에는 마스트레히트 포위전에 참가했다. 마스트레히트 요새를 공략한 후에는 벨기에 주둔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다가 1749년 2월 27일 벨기에가 도로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지면서 프랑스로 귀환했다. 1753년 1월 1일, 콩플랑은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콩플랑은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작전에 가담했다. 그해 4월 말, 데스트레 백작 루이 샤를 세자르 르 텔리에는 그에게 겔더른의 봉쇄와 포위를 맡겼다. 그러던 6월 중순 예비군을 이끌고 있던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이 파리로 소환되자, 그가 대신 예비군을 지휘해 파더보른으로 진군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군의 우익을 맡아 프랑스군의 독일 서부 침공 작전에 함께 했다. 7월 26일, 콩플랑은 하스텐벡 전투에서 우익 보병대를 지휘해 승리에 기여했고 민덴에서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가 이끌었던 군단을 맡았으며, 9월 1일 브레멘을 점거한 뒤 10월 1일 크베들린부르크를 점거했다. 그러나 11월 5일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완패한 뒤 12월 초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12월 30일 첼레로 후퇴했다.1758년 3월 연합군이 독일 서부 일대에 대한 겨울 공세를 개시해오자, 콩플랑은 적의 공세에 밀려 라인강 서쪽 둑으로 후퇴했다. 그후 6월 23일 크레펠트 전투에 참가하여 우익 기병대 제1선을 지휘했으나 아군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보급로 차단을 우려하여 하노버로 철군하자 이를 추격했으나 격파되었다. 그해 10월 프랑스군이 독일 서부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을 때, 그는 뮌스터 요새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1759년 1월 19일, 콩플랑은 베르사유로 소환된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슴을 대신해 독일 서부 일대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이끌었다. 이후 그는 연합군의 봄 공세로 위기에 직면했으나 베르겐 전투에서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가 연합군을 격파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콩플랑은 프랑스군의 여름 공세에 참여해 라인강 하류 일대의 군단을 지휘했고 7월에 뮌스터를 봉쇄해 7월 25일 함락시켰다. 그러다가 9월 1일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 주력군을 격파한 연합군이 임호프 장군 휘하의 병력을 뮌스터로 파견하자, 그는 이에 맞서기 위해 뮌스터로 향하는 적 보급 수송대를 습격하려 했으나 도르슈타인, 레클링하우젠, 뤼넨에서 잇달아 격퇴되었다. 결국 브리엔은 저항 의욕을 상실하고 10월에 라인강 서부로 패주했고 12월 27일 뒤 무이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다. 1761년, 콩플랑은 트루아 에베셰 일대 프랑스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