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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00:44:22

루돌프 누레예프

<colbgcolor=#000><colcolor=#fff> 루돌프 누레예프
Rudolf Nureyev
파일:626px-Nureyev_9_Allan_Warren.jpg
본명 루돌프 하메토비치 누레예프
Rudolf Hametovich Nureyev
출생 1938년 3월 17일
소련 러시아 SFSR 이르쿠츠크 근처
사망 1993년 1월 6일 (향년 54세)
프랑스 르발루아페레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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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발레리노, 안무가
활동 1958년 ~ 1992년
신장 173cm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어린시절3.2. 학교생활3.3. 서방으로의 탈출3.4. 마고 폰테인과의 오랜 파트너십3.5. 에릭 브룬과의 관계3.6. 마지막
4. 활동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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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노.

2. 상세

정확히 말하자면 소련의 타타르계 발레리노. 마린스키 발레단의 솔리스트로 활동하다가 구미(區美) 발레단에 들어가 활약했고 로열 발레단의 객원 무용수로 이름을 떨쳤다. 안무가로도 활약하여 러시아 고전발레를 서유럽에 전하였다.

3. 생애

3.1. 어린시절

파일:RUDIK-MOM.jpg
아기였을 때 어머니와 함께

누레예프의 부모님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 중이었는데 그때 누레예프가 열차 안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농부의 집안으로 러시아 혁명 때 그의 아버지가 붉은 군대장교가 된 덕분에 좀 더 나은 생활을 했으나 아버지가 군대에서 돌아온 후 우파(Ufa)라는 곳에 가게 된다. 거기서는 추위와 배고픔을 겪으며 힘든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만남을 하는데 바로 오페라 하우스다. 평소 오페라를 좋아하던 누레예프의 어머니가 누레예프를 데리고 몰래 공연장으로 들어가 공연을 관람한다. 이 공연을 본 뒤 누레예프는 발레리노가 되기로 결심을 한다.

3.2. 학교생활

파일:bio.jpg
누레예프의 어린시절

학교와 외부 선생님들께 포크댄스와 발레를 배운 누레예프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레닌그라드로 가서 더 공부할 것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발레가 남자답지 않다고 여긴 아버지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한 그는 알레산더 푸쉬킨(Alexander Pushkin)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졸업할 때인 1955년에는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해 1958년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에서 솔리스트가 되어 활동하게 된다. 이후 여러 무대를 통해 팬클럽까지 생기는 등 높은 인기를 자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발레단에 있는 동안 누레예프의 까다로운 성격 탓에 종종 동료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3.3. 서방으로의 탈출

소비에트 정권은 정치적 이념에 따라 발레의 형식과 특징을 모두 바꾸어 놓는다. 당시 소비에트 발레는 공격적이고 야만스러운 소비에트 연방의 이미지를 아름다운 귀족문화를 지닌 나라로 바꾸어 놓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특히 해외 공연을 통해 보여준 러시아의 클래식 발레의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들은 큰 파문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큰 수입을 벌어들인 연방은 무용수들을 엄격하게 감시했는데 그들은 정부에서 정한 스케쥴대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누레예프는 이러한 정부의 행동에 환멸을 느끼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Nureyev Unzipped'
A brief survey of the life and career of the great Russian dancer

그러던 중 1961년 프랑스 파리 공연을 가게 된 누레예프는 파리에서 혁명을 일으킨다. 언론과 대중들은 그의 춤을 보고 '러시아 발레의 유리 가가린'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적인 파리 공연을 뒷전으로 하고 런던 공연을 위해 출국 중이던 발레단에게 KGB는 누레예프만 모스크바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이미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누레예프는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가 없었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출국 전 KGB의 눈을 피해 '망명'을 외치며 프랑스 경찰에게 몸을 위탁한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에서도 또 서방 세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무용수였기에 그의 망명은 큰 화제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사회주의 사회의 파행이 알려질까 두려워 그를 귀국시키기 위해 온갖 회유와 위협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교통사고로 위장해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3.4. 마고 폰테인과의 오랜 파트너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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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테인과 호흡을 맞추는 루돌프 누레예프
Tchaikowsky - Swan Lake - Rudolf Nureyev - Margot Fonteyn

서방 세계에 정착한 그는 승승장구하며 전 세계에서 활동하게 된다. 누레예프는 영국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Margot Fonteyn)과 20년 넘게 파트너로 호흡을 맞추면서 '지젤',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공기의 요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수많은 무대를 같이 공연했다. 둘은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고 훌륭한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1] 누레예프는 다른 무용수들과도 여러 공연을 했으나 최고의 공연은 마고 폰테인과 함께 했을 때였다.

훗날 두 사람은 따로 활동하게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폰테인이 경제적으로 힘들어 할 때 누레예프가 도와주기도 했다.[2]

3.5. 에릭 브룬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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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인 에릭 브룬과 함께

서방 세계로 탈출한 후 누레예프는 자신이 평소 동경하던 로얄 코펜하겐의 수석 무용수 에릭 브룬(Erik Bruhn)과 만난다. 서로의 성격과 춤 스타일이 너무나 달랐으나 둘은 에릭 브룬이 죽기 전인 1986년까지 25년간 함께한다. 대놓고 동성 파트너와의 관계를 오픈한 탓에 에릭 브룬과 누레예프는 둘이 만난 후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3.6.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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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남쪽에 있는 루돌프 누레예프의 무덤

당대 최고의 무용수로 인정받았고 특히 현대 무용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이 출연한 대부분의 무용 안무를 직접 짜면서 무용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니진스키와 마찬가지로 남성 무용수의 역할을 보조적인 역할에서 주인공으로 바꿔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무용수이기도 하다. 1983년 파리 오페라의 무용 감독으로 임명된 그는 1992년 마지막 안무를 맡은 '라 바야데르' 공연까지 활동했으며 1993년 초 에이즈로 생을 마감했다.

4. 활동

그가 활동했던 발레 무대만을 기재할 것.

5. 기타



[1] 당시 폰테인은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을 받고 있어서 뭔가 전환이 필요했는데, 소련에서 막 망명한 루돌프 누레예프와 파트너가 되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폰테인이 누레예프보다 19살이나 연상이라, 폰테인은 "어미양이 새끼양과 같이 춤추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 춤을 춰보니 호흡이 매우 잘 맞아서, 결국 그 시절 발레계 최고의 파트너로 인정받게 되었다.[2] 폰테인의 남편은 파나마 출신의 정치인이었는데, 정적에게 암살될 뻔했다가 살아났지만 총상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폰테인은 남편 치료비를 대느라 보통의 발레리나라면 은퇴했을 나이에도 계속 무대에 섰지만, 치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누레예프는 그런 사정을 알고 가끔 폰테인에게 거액의 돈을 보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