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3:47:49

레프 란다우

래프 란다우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역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rowcolor=#cd9f51> 1901 1902 1903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빌헬름 뢴트겐 헨드릭 로런츠 피터르 제이만 앙투안 베크렐
<rowcolor=#cd9f51> 1903 1904 1905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피에르 퀴리 마리 퀴리 존 라일리 필리프 레나르트
<rowcolor=#cd9f51> 1906 1907 1908 1909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조지프 톰슨 앨버트 마이컬슨 가브리엘 리프만 굴리엘모 마르코니
<rowcolor=#cd9f51> 1909 1910 1911 1912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카를 브라운 요하너스 판데르발스 빌헬름 빈 닐스 달렌
<rowcolor=#cd9f51> 1913 1914 1915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헤이커 오너스 막스 폰 라우에 헨리 브래그 윌리엄 브래그
<rowcolor=#cd9f51> 1917 1918 1919 1920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찰스 바클라 막스 플랑크 요하네스 슈타르크 샤를 기욤
<rowcolor=#cd9f51> 1921 1922 1923 1924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로버트 밀리컨 만네 시그반
<rowcolor=#cd9f51> 1925 1926 1927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제임스 프랑크 구스타프 헤르츠 장 페랭 아서 콤프턴
<rowcolor=#cd9f51> 1927 1928 1929 1930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찰스 윌슨 오언 리처드슨 루이 드 브로이 찬드라세카라 라만
<rowcolor=#cd9f51> 1932 1933 1935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 에르빈 슈뢰딩거 제임스 채드윅
<rowcolor=#cd9f51> 1936 1937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영국 국기.svg
빅터 헤스 칼 앤더슨 클린턴 데이비슨 조지 톰슨
<rowcolor=#cd9f51> 1938 1939 1943 1944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엔리코 페르미 어니스트 로런스 오토 슈테른 이지도어 라비
<rowcolor=#cd9f51> 1945 1946 1947 1948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볼프강 파울리 퍼시 브리지먼 에드워드 애플턴 패트릭 블래킷
<rowcolor=#cd9f51> 1949 1950 1951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유카와 히데키 세실 파월 존 콕크로프트 어니스트 월턴
<rowcolor=#cd9f51> 1952 1953 1954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펠릭스 블로흐 에드워드 퍼셀 프리츠 제르니케 막스 보른
<rowcolor=#cd9f51> 1954 1955 1956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발터 보테 윌리스 램 폴리카프 쿠시 윌리엄 쇼클리
<rowcolor=#cd9f51> 1956 1957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대만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존 바딘 월터 브래튼 리정다오 양전닝
<rowcolor=#cd9f51> 1958 1959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미국 국기(1959-1960).svg
파벨 체렌코프 일리야 프란크 이고르 탐 오언 체임벌린
<rowcolor=#cd9f51> 1959 1960 1961
파일:이탈리아 국기(1946-2003).svg.pn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에밀리오 지노 세그레 도널드 글레이저 로버트 호프스태터 루돌프 뫼스바우어
<rowcolor=#cd9f51> 1962 1963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헝가리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레프 란다우 유진 위그너 마리아 메이어 한스 옌젠
<rowcolor=#cd9f51> 1964 1965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찰스 타운스 니콜라이 바소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 리처드 파인만
<rowcolor=#cd9f51> 1965 1966 1967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줄리언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 알프레드 카스틀레르 한스 베테
<rowcolor=#cd9f51> 1968 1969 1970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루이스 앨버레즈 머리 겔만 한네스 알벤 루이 네엘
<rowcolor=#cd9f51> 1971 1972
파일:헝가리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데니스 가보르 존 바딘 리언 쿠퍼 존 슈리퍼
<rowcolor=#cd9f51> 1973 1974
파일:일본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에사키 레오나 이바르 예베르 브라이언 조지프슨 마틴 라일
<rowcolor=#cd9f51> 1974 1975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앤서니 휴이시 오게 보어 벤 모텔손 제임스 레인워터
<rowcolor=#cd9f51> 1976 1977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버턴 릭터 새뮤얼 팅 필립 앤더슨 존 밴블랙
<rowcolor=#cd9f51> 1977 1978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네빌 모트 표트르 카피차 아노 펜지어스 로버트 윌슨
<rowcolor=#cd9f51> 1979 1980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스티븐 와인버그 무함마드 살람 셸든 글래쇼 제임스 크로닌
<rowcolor=#cd9f51> 1980 1981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벨 피치 니콜라스 블룸베르헌 아서 숄로 카이 시그반
<rowcolor=#cd9f51> 1982 1983 1984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인도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이탈리아 국기(1946-2003).svg.png
케네스 윌슨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 윌리엄 A. 파울러 카를로 루비아
<rowcolor=#cd9f51> 1984 1985 1986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시몬 판 데르 메이르 클라우스 폰 클리칭 에른스트 루스카 게르트 비니히
<rowcolor=#cd9f51> 1986 1987 1988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하인리히 로러 요하네스 베드노르츠 카를 뮐러 리언 레더먼
<rowcolor=#cd9f51> 1988 1989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멜빈 슈워츠 잭 스타인버거 한스 데멜트 볼프강 파울
<rowcolor=#cd9f51> 1990 1991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svg
제롬 프리드먼 헨리 켄들 리처드 테일러 피에르질 드 젠
<rowcolor=#cd9f51> 1992 1993 1994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폴란드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캐나다 국기.svg
조르주 샤르파크 러셀 헐스 조지프 테일러 버트럼 브록하우스
<rowcolor=#cd9f51> 1994 1995 1996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클리퍼드 슐 프레더릭 라이네스 마틴 펄 데이비드 리
<rowcolor=#cd9f51> 1996 1997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더글러스 오셔로프 로버트 리처드슨 윌리엄 필립스 스티븐 추
<rowcolor=#cd9f51> 1997 1998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클로드 코엔타누지 대니얼 추이 로버트 러플린 호르스트 슈퇴르머
<rowcolor=#cd9f51> 1999 2000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러시아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마르티뉘스 펠트만 조레스 알표로프 허버트 크뢰머
<rowcolor=#cd9f51> 2000
파일:미국 국기.svg
잭 킬비
}}}
}}}}}}}}}
[ 21세기 ]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3> 2001 || 2002 ||

}}}}}} ||

<colbgcolor=#000><colcolor=#fff> 레프 다비도비치 란다우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Lev Davidovich Landau
파일:external/www.fmclass.ru/pic.jpg
출생 1908년 1월 22일
러시아 제국 바쿠현 바쿠구 바쿠
(現 아제르바이잔 바쿠)
사망 1968년 4월 1일 (향년 6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직업 이론물리학자
부모 아버지 다비드 르보비치 란다우
어머니 류보피 베니아미노브나 가르카비란다우
형제자매 누나 소피야[1]
학력 바쿠 대학교 (물리학·수학 / 중퇴)[2]
레닌그라드 대학교 (물리학·수학 / 준석사)
레닌그라드 물리공학 연구원 (물리학 / 박사)
소속 하리코프 공과대학교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분야 이론입자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
주요 업적 란다우 게이지
링크 파일:스코푸스.png
종교 유대교무종교(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2.2. 해외 유학2.3. 소련 귀국2.4. 스탈린 독재정치에 대한 항의 및 숙청2.5. 석방 및 소련의 핵개발 참가2.6. 말년
3. 저술 교과서 목록4. 연구방면5. 란다우 목록6.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people.bu.edu/Dau_38-58.jpg
KGB에 남아있던 머그샷.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Lev Davidovich Landau

소련판 폰 노이만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학자이다. 노이만과 마찬가지로 란다우는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으로 물리, 화학, 공학의 여러 분야에 손을 뻗어 각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소련에서 그가 쓴 교과서가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국에서는 대학/대학원 교재로 사용될 정도. 노이만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천재성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20대 후반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었다. 노이만과 비슷하게 비교적 일찍 사망하기는 했는데, 노이만보다는 운좋게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둘 다 유대인. 사실 노이만은 수학을 주로 연구했고, 란다우는 물리학을 주로 연구하여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이 조금 안맞기는 하지만[3], "소련판 폰 노이만 (soviet von Neumann)"이라는 별명은 란다우가 소련의 원폭과 수폭의 개발의 이론적 계산을 완수하여, 맨하탄 계획에 참여한 노이만과 비슷한 역할을 했음에 착안한 한 과학사학자의 평가이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두 명 모두 손으로 이런 복잡한 계산을 해야만 했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908년 1월 22일 카스피해에 있는 바쿠에서 유대-독일계 러시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쿠의 유전에서 일하는 공학자였고, 어머니는 내과의사였다.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가 과학자로 그리고 교육자로 성장하는데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61년 봄 모스코바 물리 공학 연구소에서의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영재가 아니었다고 했지만, 어릴 때부터 수학에 천재성을 보였고, 13세에 미적분을 마스터했다. 12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김나지움에 들어간 1년만에 3년과정을 건너뛰어 학교를 졸업하는 비범함을 보인다. 외국어도 능해서 독일어와 프랑스어[4]는 어릴때부터 매우 능했다고 하며 영어는 훗날 유럽에 체재하며 배웠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리다고 판단하여, 란다우는 1년 간 Baku Economic Technikum[5]에 다니다가, 14세인 1922년 바쿠 대학에 입학하게 되며, 이곳에서 물리뿐 아니라 화학과 수학에 대해서도 공부한다.[6]

1924년 16살에 란다우의 재능을 파악한 교육당국의 방침에 따라 소련 최명문대학의 하나인 레닌그라드 대학(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으로 전학하였다. 1910년대 빈에 있는 볼프강 파울리가 그랬던 것과 같이 란다우도 일반상대론에 깊이 매료되었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르빈 슈뢰딩거에 의한 양자역학의 글을 읽고 대단한 감명을 받게 된다.

그중 특히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일반 상대론에서 공간-시간의 곡률과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1927년 19살의 나이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을 위해서 레닌그라드 물리공학 연구소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곳은 1년 전(1926년)에 그가 시간제 학생으로 공부했던 곳이고, 이때 이원자분자에서의 스펙트럼의 강도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고, 이어 1927년 밀도 행렬을 이용한 시스템의 양자 상태를 처음으로 기술했다고 한다. 이때가 아직 20세가 안되었을 때이다.

2.2. 해외 유학

21세가 되는 1929년 소련 교육부의 국비를 받아 해외유학을 할 수 있었고 6개월 예정으로 서유럽의 여러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당시 현대물리학의 대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란다우는 1년 반동안 외국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괴팅겐에서는 아인슈타인과,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와, 케임브리지에서 폴 디랙과, 그리고 취리히에서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특히, 코펜하겐의 보어의 이론 물리 연구소의 학문적 분위기는 그에게 큰 감명을 주게 되어, 란다우는 끝까지 보어를 스승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후, 그는 1933년과 1934년 두 번 더 코펜하겐을 방문하게 되고, 후에 그가 외국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어가 1934년 1937년, 1961년에 소련을 방문하는 등 보어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보어는 란다우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록펠러 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 원래 6개월간 계획된 이 연수를 연장해 1년간 연수를 더 할 수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란다우는 Peierls와 양자전기역학과 상대론적 양자이론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논문을 편찬하고 캐임브리지에서는 금속이론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금속에서 축퇴된 이상적인 전자가스는 란다우 반자성(Landau diamagnetism)의 양자 현상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2.3. 소련 귀국

1931년 서유럽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와서 1931년 레닌그라드 물리 기술 연구소에서 일했고, 1932년 하르코프로 옮겨서 그곳의 새로 조직된 우크라이나 이공학 연구소의 이론 부의 책임자가 된다.

동시에 그는 하르코프의 물리학 기술연구소와 Mechnic Building 연구소의 책임자였다. 1934년 그는 그의 학위논문에 대한 Defend 없이 수학과 물리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게 되고, 1935년 교수가 된다. 하르코프에서의 기간은 란다우가 가장 심도있고, 다양한 연구활동을 한 시기로 그 당시 란다우의 과학적인 활동의 범위는 그가 한 공부의 목록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936년 한 해동안에 공부한 것이 일종 위상 변환 이론, 초 전도체의 중간 상태 이론, Coulomb interaction에서의 운동 방정식, 단원자 분자의 상호 작용 이론, 저온에서의 금속의 특성, 소리의 확산과 흡수 이론, 초전도체에서의 광전효과 이론 등이 있다.

또한, 그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역시 하르코프이고, 그곳에서 소위 '이론기초(theoretical minimum)'의 프로그램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론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것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모두 9가지의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두 개는 입학시험과 같이 작용하는 것으로 미적분, 텐서해석, 군론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시험이고, 나머지 일곱 개는 란다우 강좌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물리분야에 관한 것을 테스트하는데, 란다우가 이 프로그램을 하는 기간동안 단지 43명의 사람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란다우의 관점에서 제대로 물리학을 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적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7] 또한, 하르코프에서 그는 '이론 물리학 강좌'와 '일반물리학 강좌'의 전반을 만드는 것을 시작하여 Lifshitz와 함께 공동작업하여 1950년경에 '이론물리학 강좌'라는 4000페이지에 달하는 8권의 방대한 책을 완성하게 된다.[8]

1937년 봄, 란다우는 모스크바로 옮겨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건의로 설립된 물리문제 연구소 이론 부분의 책임자가 되어 그의 인생이 끝날때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는 그의 다양한 활동이 그 성과를 거두는 시기로, 실험 물리와의 깊은 상호협력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quantum fluid 의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란다우의 초유동 이론은 관찰된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후에 실험에서 밝혀지게 된 새로운 현상을 예견하기도 했다.

2.4. 스탈린 독재정치에 대한 항의 및 숙청

란다우는 20대 중반에 이미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고 하르키우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지만, 부모가 부르주아인 반동집안 출신이었고, 해외에 지인들도 많은데다가, 장기간 해외체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서방 간첩의 사보타지에 편집증적인 의심을 보인 소련 공안당국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란다우는 표르트 카피차의 요청을 받고 1937년 2월 우크라이나 하르코프에서 모스크바의 이론 물리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는데 그가 이직한 직후에 하르키우 대학교는 대숙청의 올가미가 덮쳤다.[9] 란다우는 그가 이직한 후 발생한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 사건[10]에서 자신의 이전 동료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에 분노한 란다우는 1938년 4월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이 작성한 스탈린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전단을 자신이 편집하여 동료 물리학자들에게 돌렸다. 란다우는 그 문건에서 저 인간백정(스탈린)이 히틀러랑 뭐가 다르냐고 서기장 동무를 깠다.

대숙청 와중에 이런 행동은 자살적인 것이었고, 즉각 이론 물리 연구소에서 해고 후 1938년 5월 27일에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감방에 갇혔다. 하지만 1939년 5월 29일,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온 표트르 카피차[11]가 서기장 동무와 라브렌티 베리야 NKVD 국장에게 란다우의 결백과 신분을 보증하며. 란다우 죽으면 나도 때려친다는 편지를 보냈고 란다우의 재능을 아꼈던 닐스 보어도 코펜하겐에서 스탈린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아무 죄가 없어도 공안기관의 의심을 받으면 처형될 수 있는 대숙청기간에 출신성분이 부르주아인 학자가 "인민의 태양"인 스탈린을 파시스트 악당인 히틀러와 비교하는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빼도박도 못하고 사형을 받을 뻔 했으나 카피차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었던 보어까지도 구명운동에 나서자 스탈린도 란다우를 살려주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꼭 필요한 인재라 판단되면 살려주는 경우도 있었던 서기장 동무였기에 란다우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12]

사실 란다우는 운이 매우 좋은 편이었는데, 보어의 탄원도 효과가 있었겠지만[13] 스탈린이 란다우의 구명운동에 나선 카피차를 매우 총애했기 때문에 이런 대역죄를 저지르고도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카피차는 소련 성립 후 교육 받은 1세대 과학자로, 영국으로 유학가서 현대물리학의 대가였던 어니스트 러더퍼드 아래서 사사했고, 러더퍼드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도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영국에서도 자국에 주저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카피차는 공산주의가 싫어 서방에 주저 앉은 많은 러시아 과학자들과는 달리 영국의 유혹을 뿌리치고 소련으로 귀국했고, 소련에 현대물리학을 이식하는데 큰 공헌을 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스탈린은 카피차의 연구활동을 돕기 위해 당시 농업실패로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 와중에서도 3만파운드라는 거액의 외화를 들여 그가 일했던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에 맞먹는 과학실험 장비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1945년 소련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스탈린 앞에서 카피차와 NKVD 부장인 라브렌티 베리야는 말다툼을 하는데, 스탈린은 카피차의 손을 들어줄 정도였다.

2.5. 석방 및 소련의 핵개발 참가

1939년 4월, 란다우는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이 혐의는 그의 사후인 1990년에야 공식적으로 증거부족으로 종결되었다. 훗날 두 달만 늦었어도 자신은 옥사했을 것이라고 혹독한 감방경험을 이야기했다. 이어 연구소에서도 복직하고, 1946년에는 소련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1940년대부터 소련은 맨하탄 계획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고르 쿠르차토프를 총책임자로 앉혀 핵개발을 시작했다. 란다우도 소련의 핵개발에서 30대 소장과학자로서 참가, 이론적 계산에서 여러 돌파구를 뚫었고, 소련은 성공적으로 원폭수폭을 개발하게 된다. 이 공로로 대조국전쟁 이후 스탈린 훈장도 받았고, 스탈린 사후에는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1946년 여친 콩코르디아가 임신하자 결혼했다.

1955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0년대 수많은 연구업적을 내는 한편,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일련의 과학자들과 함께 소련 지도부에 보내는 편지를 보내 사이비 진화이론으로 소련의 농업을 말아먹은 트로핌 리셴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의 권위를 업은 리셴코의 영향력은 1960년 중반까지도 계속된다)

1950년대, 40대 중반에 그는 이미 소련 물리학계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있었다. 소련에는 그보다 나이 많은 선배 대가들이 많았지만, 소련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다만 소련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은 그의 동년배 과학자들인 이고르 탐, 일리야 프랑크,파벨 체렌코프가 체렌코프 현상으로 1958년 최초로 수상하였다. 당시는 핵물리학이 물리학계의 대세였기 때문에, 핵물리학자들인 이들이 먼저 수상하게 된 것이다.

2.6. 말년

1962년 1월 7일, 란다우의 차가 마주오는 트럭에 충돌한다. 그는 다발성 골절로 심하게 부상을 입고 석 달간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14]

많은 의료진과 주위 동료의 노력으로 57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목숨은 구했지만 학자로서의 생명은 끝나버렸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기까지의 6년간 그는 병석에 있었고, 처음에는 인지능력이 갓난아이처럼 퇴화했으나 끊임없는 재활로 주위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회복하기는 했으나, 연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은 되돌아오지 않았다.[15]

그는 명목상으로만 물리 문제 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 책임자였을 뿐, 아무런 창의적인 학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란다우는 이 부상 때문에 1962년 노벨물리학상[16]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다.

60세가 되는 1968년 4월 1일에 장폐색증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출혈이 심해서 사망했다. 사후 노보데비치(Novodevichy) 묘지에 매장되었다.

3. 저술 교과서 목록

많은 물리학의 대가들이 자기 연구만에 몰두하고, 교육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란다우는 교육에도 특별히 신경을 써서 학부생 레벨에서부터 대학원생 레벨까지의 다양한 종류의 교과서를 남겼다. 이들 교과서는 러시아 및 러시아 영향권의 국가에서는 현재에도 물리전공 대학생의 교재로 쓰이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번역판이 참고자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한 일반인을 위한 대중 과학 서적도 몇 권 공저했다.

파일:Course_of_theoretical_physics_by_Landau_and_Lifshitz.jpg

Landau and Lifshitz Course of Theoretical Physics
vol. 1: "Mechanics".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2896-0)
vol. 2: "The Classical Theory of Fields". L. D. Landau, E. M. Lifshitz, (4th ed. ISBN 0-7506-2768-9)
vol. 3: "Quantum Mechanics: Non-Relativistic Theory".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3539-8)
vol. 4: "Quantum Electrodynamics". V. B. Berestetsky, E. M. Lifshitz and L. P. Pitaevskii, (2nd ed. ISBN 0-7506-3371-9)
vol. 5: "Statistical Physics Pt. 1".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3372-7)
vol. 6: "Fluid Mechanics". L. D. Landau, E. M. Lifshitz, (2nd ed. ISBN 0-7506-2767-0)
vol. 7: "Theory of Elasticity".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2633-X)
vol. 8: "Electrodynamics of Continuous Media". L. D. Landau, E. M. Lifshitz and L. P. Pitaevskii, (2nd 0750626348)
vol. 9: "Statistical Physics Pt. 2". E. M. Lifshitz, L. P. Pitaevskii, (1st ed. ISBN 0-7506-2636-4)
vol. 10: "Physical Kinetics". E. M. Lifshitz, L. P. Pitaevskii, (1st ed. ISBN 0-08-020641-7)

다른 책들
"General Physics, Mechanics and Molecular Physics". A. I. Akhiezer, E. M. Lifshitz (ISBN 0-08-009106-7)

국내에서는 1권을 시작으로 번역이 진행 중이나... 더디다. 더욱이 영어 중역판이라는 한계도 있다. 하기사 러시아 유학 경력의 이론물리학 박사가 국내에 있어야 많이 없겠지만 말이다.[17]

4. 연구방면

란다우는 현대물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5. 란다우 목록

란다우는 마이너스 로그 스케일(0에서 5까지)로된 물리학자 목록을 만들어 유지했다. 수치가 낮을 수록 위대한 학자이다. 뉴턴에 최고값 0, 아인슈타인에 0.5 를 매겼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슈뢰딩거, 루이 드 브로이, 막스 플랑크, 보스, 위그너등에 1점을 줬다.란다우 자신에게는 2.5를 매겼다가 노벨상 수상 이후 1.5까지 올렸다. 사실 1점을 준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란다우가 유럽시절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다. 동료들을 높인걸로 봐서는 란다우는 의외로 상당히 겸손한 스타일인듯. 천재급을 제외한 물리학자들은 목록에 들어 갈 것도 없이 그냥 5점.

6. 기타


[1] 1906년생.[2] 레닌그라드 대학교로 편입학.[3] 오히려 리차드 파인만이랑 란다우를 비교하는게 더 적절한 듯. 두명 모두 현대 물리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고, 물리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비슷하다. 둘다 노벨상 수상자이며, 유대인이라는 것도 비슷하다.[4] 어릴 때 유대인 학교에 다녔는데, 이 러시아의 유대인 학교는 주로 독일어나 이디시어로 가르쳤기 때문에 당연히 독일어에 능했을 것이다 프랑스어는 혁명전 러시아 상류층들의 상용어였다. 부모가 상류층이었으므로 당연히 란다우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5] 김나지움 정도 되는 듯.[6] 물리-수학 학부와 화학 학부를 복수전공했다. 나중에 화학 학부는 전공을 포기하지만, 생애 전반에 걸쳐서 화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한다.(ex: 열역학의 란다우 퍼텐셜 등)[7]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중 일부는 시험을 통과하는데 모든 기력을 쏟은 관계로 바로 물리학계에서 사라진 사람이 많았지만, Pomeranchuk, Lifshitz, Khalatnikov, Abrikosov와 같이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도 있었다.[8] 아래 저술 목록 참고.[9] 당시 스탈린의 무리한 농업 집단화때문에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반스탈린-반소련 감정이 팽배해 있었다.[10]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УФТИ)의 과학자들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전단을 발포한 사건.[11] 저온물리학 연구에 대한 공로로 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12] 그래도 과학기술 분야는 이런 숙청의 물결에서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편이다. 서기장 동지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것은 소련의 공업화와 대조국전쟁 승리를 통한 초강대국으로의 발돋움인데, 이 과정에서 공업화의 선봉에 설 이런 과학기술 분야 인재들은 없어서는 안될 이들이라 이런저런 경로로 목숨을 부지하고 복권되는 경우가 다른 업계에 비해 꽤 많았다. 또한 굴라그 내에서도 따로 연구할 수 있는 방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서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창립자인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반동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과학자들의 탄원으로 20년형으로 감형되었음에도 끝내 옥사하는 등 눈물겨운 사연도 적지 않다.[13] 부하린 같은 경우는 스탈린 본인의 친구였고, 서방의 여러 유명 지식인들이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구명운동을 벌였음에도 처형되었다.[14] Dorozynski, Alexander (1965). The Man They Wouldn't Let Die(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사나이)를 참고하라. 1962년 란다우의 자동차 사고 이후, 물리학자 사회에서 그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한 과정을 다룸. 시도 자체는 성공해, 1968년까지 란다우는 살아있었다.[15] 죽을 때까지 치매상태로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재활을 계속하여 병석에서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자신의 노벨상 수상을 알게 된 후 란다우 목록에서 자신을 2.5에서 1.5까지 높일 정도로 인지능력이 돌아오기는 했다.[16] 노벨상은 사고가 있던 그해 11월 응집에 관한 이론, 특히 액체 헬륨에 관한 개척자로써 노벨상을 받게 되었는데, 노벨상은 죽은 사람에게 줄 수 없으므로 서둘러서 주었다는 소문이 있다.[17] 러시아 물리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의 물리학부와 모스크바 물리 기술 연구소 합쳐서 1년에 한국인이 1-2명 입학할까 말까다. 그것도 이건 학부 기준이고, 박사 과정을 여기로 진학하는 한국인은 3-4년에 한 명 나오는 수준.[18] 후에 미국에 망명하여 미국의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