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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05:21

라이따이한

1. 개요 2. 배경3. 강간 피해설
3.1. 문제점
4. 차별과 편견5. 해결 방안6. 일본군 위안부와의 차이
6.1. 한국군 참전과 일본군 참전의 차이
7. 여담8. 관련 문서

1. 개요

Lai Đại Hàn / 𤳆大韓[1]

베트남 전쟁 시기에 베트남으로 파견된 대한민국 국군 혹은 한국인 노무자와 현지인들 사이에서 혼인 관계로 태어난 자식들을 베트남에서 부르는 명칭.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강간의 경우 태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바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현지 국제결혼을 통한 것이며 정확한 숫자는 추산하기 힘들지만 최소 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미군과의 결혼을 추천했기 때문에 미군과 결혼은 더욱 많아서 베트남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최소 2만에서 최대 10만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2. 배경

베트남전의 복잡한 배경으로 인해 그때 한국에서 태어난 이들도 전쟁이 끝난 뒤 대부분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2] 당시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나뉘어 전쟁 중이었고 한국군과 한국 노무자들은 남베트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973년 모두 철수하게 되는데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이들의 운명도 비참하게 뒤틀리게 된다.
중앙일보 정치 실화 청와대 비서실에 연재된 기사에 따르면 1975년 베트남 패망 당시 한국정부는 일반의 인식과 다르게 이러한 한/베트남 혼혈들에 대한 정책을 수립했고 이들이 한국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면 교민철수 행렬에 넣어주었다. 문제는 사이공 함락이 너무나 긴박하게 일어난 터라 일부 외교관 마저도 탈출에 실패했다는 점[3], 한국 대사관에서 파악한 교민+라이따이한의 수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탈출을 요청했다는 점,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교민들이 전혀 무관한 현지인들에게 거액을 받고 라이따이한들의 자리를 매매하는 바람에 막상 탈출해야 할 2세들이 탈출하지 못함 등의 이유로 남겨졌다고 한다.

베트남으로 파병된 참전자들은 라이따이한 문제를 군인보다는 전역한 한국 출신 노무자들에 의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에 대한 이유로는 한국군이 전술기지 내에서 엄격하게 통제된 생활을 했다는 점[4], 베트남 파병 한국군의 베트남내 복무기간 (Tour of Duty)이 1년이 약간 안 된다는 점, 당시에는 군인들이 현지에서 제대 후 기술자로 정착하거나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 혹은 아예 기술자로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다만 반드시 엄격한 통제가 이뤄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데, 실제 파병 한국군의 증언으로 한국군도 막장인 장교나 부사관이나 사병이 무단으로 나가 폭행사건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적발된 케이스는 헌병대로 넘겨 처벌했으며, 실제로 일부 부대는 부대원들이 만에 하나 사건을 일으킬까봐 '알아서' 윤락업소로 사병들을 교대로 보내게 해주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5]참고로 베트남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인 '콩까이'는 원래 이런 윤락업소 여성들을 일컫는 은어였다.[6]

참전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지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민간인 신분으로 자유롭게 지내면서 높은 확률로 '현지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스로 인정하는 이들도 꽤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현재도 일부 남성들이 동남아의 몇몇 나라에서 벌이는 것과 비슷하다.

미군 헬기 조종사로 백마부대에서 근무한 미군 출신의 증언을 따르자면 (48 AHC 공격 핼기 중대, 화력지원이나 부상자 수송임무를 맡음) 영내에서는 한국 사병들은 부대를 나가는 절차 자체가 엄격하고 도시에 있는 윤락업소 등은 비싸서 한국군 사병 월급으로는 택도 없었다는 것이다. 대신 영관급 장교들은 도시로 나가는 것을 몇번 보았지만 그들이 윤락업소를 찾아간 건지 아니면 다른 볼일이 있어서 간 건지는 모른다고 한다. 일단 나트랑과 닌호아에 주둔한 백마부대 한정이지만 상황상 다른 부대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보인다.

3. 강간 피해설

라이따이한 중 일부가 한국군에 의한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주장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전시에 베트남 해방 전선(베트콩)은 한국군을 포함해서 자신들이 적대시하는 모든 베트남 파병군이 고문, 학살, 강간 등의 전쟁 범죄를 밥먹듯이 저질렀다고 선전하는 게 매우 흔했다.

다만 실제 강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증언이 있으며, 실제로 강간죄로 처벌받은 군인들도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쟁 중 점령군인이 현지 여성을 강간하는 일은 어떤 전쟁에서건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초대 공동대표로 있는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연구를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한데, 베트남전에서의 성범죄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베트남전에서의 성범죄와 살상에 대해 한국이 일본에 요구하듯이 사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9년 1월 '라이따이한의 정의'라는 단체가 # 영국 하원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입지를 다지면서 이 문제에 대해 영국 유력인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유엔 인권위에 제소하여 일단 50명의 라이따이한 DNA를 한국에 보내어 베트남 파병 한국군의 DNA 자료와 비교하여 한국 핏줄을 찾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최종 목표를 대한민국 정부의 인정과 사과로 설정하고 밀어붙이고 있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 정부에 DNA 샘플을 보내겠다고 했으나 어떤 종류의 협조도 거절당했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라이따이한과 대조할 DNA조사군과 개인정보를 알려줘야 하는데 베트남 파병 장병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없으면 국내법과 충돌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베트남 전쟁의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낮에는 손 흔들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마을인데 밤이 되면 땅굴에 숨어있던 베트콩이 튀어나와 수류탄 죽창 등으로 부대원들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눈이 뒤집혀 베트콩을 잔인하게 토벌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밑에 땅굴이 있는데 신고하지 않았다는 건 이 마을 사람들이 먹여주고 숨겨줬다는 것이고, 베트콩이 딱히 군복을 입거나 하는 것도 아니라서 마을 사람 일부가 베트콩일 수도 있기 때문에, 무기 안 들었다고 단순히 무고한 피해자라고 볼 수도 없다.[7]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 가족이나 친구가 한국군의 손에 죽게 되면 베트콩을 은근히 편들게 되는 등, 온갖 방법으로 뒤틀린 베트남 전쟁은 이 사람이 적인지 아군인지,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무고한 베트남 사람들의 살해, 강간 범죄, 고문 등이 벌어진 배후에는 이런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편향된 인식과 분노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3.1. 문제점

한국의 관련 단체들이 제대로 진상조사를 하려고 해도 베트남 정부에서 거의 협조를 해주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는 예전부터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은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공고히 해왔고, 이는 베트남 전쟁이 본인들의 자랑스러운 승전의 역사이고 베트남 통일의 토대가 되었다는 조작인 것도 있지만, 북베트남(현 베트남 정부의 뿌리)에 의한 남베트남 인사 대규모 숙청과 민간인 학살, 강간. 한국 정부를 정당한 정권으로 노골적으로 부정시킨 베트남 파병 국군 강제 납북 같은 위선질이 같이 드러나 현 베트남의 정부의 명분을 흔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베트남 정부가 보기에 한국 단체들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기도 한다.

애초에 이 문제는 당시 참전 동맹국이었던 미국과의 입장 문제와 참전용사들의 명예 문제, 그리고 일본의 억지 물타기 등이 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4. 차별과 편견

전쟁 때의 라이따이한이라면 헤어짐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치더라도 이후에 베트남과의 경제 교류 재개 이후 태어나게 된 신 라이따이한들 또한 적지 않다. 라이따이한과 그 어머니들은 편모 슬하에서 남편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사는 것도 힘든데 자국에서도 심한 차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혼혈이 암묵적으로 차별받는 것과 비슷하다.

민족주의공산주의를 주 사상으로 하는 새로운 베트남에서는 이들은 그들 부모가 외세와 결탁하여 태어난 출신 성분이 나쁜 자식들로 취급된 것이다. 일설에는 베트남 정부에서 라이따이한 아이들의 진학을 제도적으로 막았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자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들의 어머니도 한국어로 치면 화냥년 정도로 끔찍한 욕을 듣는 일이 많다고 한다.

5. 해결 방안

아버지 찾아주기, 교육지원 등 라이따이한에 대한 지원은 주로 민간단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라이따이한 남성이 재판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일도 있지만 2006년 국적 부여가 검토된 적이 있을 뿐 정부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은 아직 없다.[8] 절대 다수의 라이따이한들은 한국으로부터 그 어떤 처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베트남과 수교가 제기되면서 모 잡지에 관련 이야기를 어느 선교사가 연재한 것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주민등록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아버지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아버지란 작자들이 책임지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문제의식을 갖고 책임지는 자세로 해결책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드문 예지만 어느 파병 한국군은 20년이 지나서 베트남으로 찾아가 과거 관계를 가졌던 여성을 찾아갔고, 커버린 아들까지 만나 재회를 하고 사죄와 같이 아주 베트남으로 가서 재혼한 경우도 있다. 그 외에 한-베트남 수교가 이뤄진 후 베트남으로 돌아와서 상대 여성과 자식을 찾던 한국인 남성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 중에는 위 사례와 마찬가지로 다시 합친 사례도 종종 있는 듯 하다.

반대로 베트남과의 수교 이후 친부를 찾아 한국으로 온 라이따이한을 통해 남편이나 아버지의 베트남인 현지처의 존재를 알고 가정이 깨진 사례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건 남자 쪽 책임이 있으니 라이따이한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건 억지다.

근본적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민간에서는 대한민국의 기독교 단체의 지원에 의해서 직업 훈련 학교 등의 지원 시설이 설립되었고, 2세, 3세를 위한 무상 직업 훈련과 한국어 교육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이 실시되기도 했다.[10]

다만 현재도 베트남에 거주하는 베트남 파병 참전장병들은 라이따이한 아버지 찾아주기 등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베트남이 적화통일하면서 모든 한국사람들이 나몰라라 하면서 도망간 게 아니고 정말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두고 간 사람들도 있기에 힘들게나마 재회를 하는 경우도 있다.

6. 일본군 위안부와의 차이

일본극우혐한 세력들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사마다 라이따이한을 자주 언급하며 일본군 위안부의 물타기용으로 라이따이한 소재를 쓰고 있다. 이들은 라이따이한을 한국판 위안부라 왜곡하여 알리거나 인식하고 있다. 또한 혐한 상당수는 라이따이한을 학살 사건이나 학살 장소로 오해하는 등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오직 위안부를 부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 뿐이다. ##

라이따이한은 어디까지나 한국인과 남베트남인 사이에 태어난 2세들을 칭한 명칭이며, 이들이 베트남 내에서 겪는 차별 대우와 한국인 아버지들의 책임이라는 주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책임이라는 주제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안이지만 이를 동일시하며 어떻게든 우리만 잘못한 게 아니라 한국도 잘못했다 혹은 다른 쪽도 한 것이니 우린 잘못 없다는 식의 정신승리를 하며 책임회피와 물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와 달라 라이따이한 문제는 피해 여성들이 담론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라 이후 출생한 사람들이 담론의 중심으로 언급되는데 괜히 이러는 양상이 나온 게 아니다. 인권, 성노예 등 착취 문제가 주된 담론이 되는 위안부 성노예 문제와 달리 라이따이한은 강압적인 성관계 외에도 자발적인 매춘, 현지처, 동거 문제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즉, 라이따이한 문제로 한국을 비난하고 싶으면 베트남 파병 국군이 납북된 것을 가지고 비난해야 하는데, 그럴 정신머리가 없으니,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나 죽어라 내뱉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뿐만 아니라 수 많은 전쟁 역사를 보면 강간은 전쟁마다 있었지만 이런 사건, 사고들은 병사 개인의 일탈이었고 자체 조사를 벌인 뒤 군사 재판으로 처벌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는 병사 개인의 일탈이 아닌, 성병으로 인해 군사력 저하를 우려해서 국가가 직접 주도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6.1. 한국군 참전과 일본군 참전의 차이

7. 여담

8. 관련 문서



[1] '大韓'이야 '대한'을 의미하고, '𤳆'는 쯔놈문자인데, 경멸적인 어감으로 '혼혈, 잡종'을 의미한다. 男(사내 남)과 來(올 래)가 한 글자로 이뤄진 것이다. 일부 기기에선 베트남 문자가 정상적으로 표시되지 않는다.[2] 상식적으로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어머니와 둘이 남겨진 가정의 삶이 쉬울 리가 없다. 더군다나 그때 베트남은 적화통일된 상태였으니 이에 대한 차별은 덤.[3] 중앙정보부 무관인 이대용 공사와 몇명의 외교관, 그리고 100여 명의 교민은 결국 탈출에 실패한다. 이대용 공사 일행은 몇년 뒤에 겨우 추방의 형식으로 오게 되고 교민들은 1년 뒤 호주나 태국을 통해서 귀환한다.[4] 우리나라 비무장지대의 GP초소 생활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하다.[5] 아예 6.25때처럼 국군 위안부를 만들까 논의하기도 했다.[6] 베트남어로 꼰가이con gái(昆丐)는 아이+여자, 즉 소녀, 딸이라는 뜻으로 단어 자체가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즉 정상적인 표현이다. 다만 조선인의 일본식 발음인 조센징 또한 단어 자체에는 비하적인 표현이 없지만 당시의 상황도 그렇고 화자들이 비꼬고 무시하는 태도로 한국인을 대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비하적인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 당시 한국인들에게 꼰가이=윤락업소여성 이었던 것.[7] 때문에 제네바 협약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전투를 벌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한 마을에서 게릴라 한 명이 평상복을 입고 지나가는 군인 행렬에 폭탄이나 기관총 등을 이용해 일시에 큰 사상자를 낸 다음, 주민들 틈에 숨어버리면 방금 전우가 죽은 군인들은 사람인만큼 큰 공포와 분노에 휩싸이게되고 폭력적으로 게릴라를 색출하게된다. 그리고 색출할 시간이 없거나 사상자가 많은 등 충격이 크게 되면 그냥 주민들을 전부 몰살시키고 지역에서 이탈한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8] 사실 이들이 현재는 엄연한 베트남 국민인 이상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전원에게 국적 부여' 같은 조치를 취하는 것은 현실 국제 정치에서 논란의 여지가 크다.[9] 라이따이한과 모친들이 겪은 어려움, 한-베트남 수교 이후 이들을 둘러싼 여러 사실을 한꺼번에 알 수 있는 사례이기에 기재.[10] 관련기사 1 2[11] 쩐 티 킴 응안의 킴(kim)도 실은 金의 베트남식 독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