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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9:48:52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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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Bartolomé de las Casas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rtolomedelascasas.jpg
출생 1474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 세비야
사망 1566년 (향년 81세)
카스티야 연합 왕국 마드리드
국적
[[카스티야 연합 왕국|]][[틀:국기|]][[틀:국기|]]
종교 가톨릭
직업 수도자
소속 도미니코회
서명
파일: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서명.svg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

[clearfix]

1. 개요


행적을 설명하는 Extra Credits 영상.

스페인수도자, 사제, 역사가. 도미니코회 소속 수도자, 아메리카 최초의 수도자[1]로 "인디오의 수호자"라 불린다.

그의 활동은 비록 근대적 인권 개념이 아닌 신앙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그의 활동으로 인한 성과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권을 상승시킨 역사적 분기점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운동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성공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7월 20일이다.

2. 생애

1474년 세비야에서 소상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497년에 그라나다에서 군대에 복무했으며, 1502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2번째 항해에 동행하였다가 영지를 받았다. 스페인에 귀국해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1510년에 아메리카로 돌아간다.

1513년에 군종 신부로서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쿠바 정복 등 많은 탐험에 참가하였지만, 그 탐험에서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함부로 대하면서 학살하는 만행을 목격하였다. 탐험에 참가한 공으로 원주민 농노를 받는다.

라스 카사스가 쿠바에 오기 1년 전에 쿠바에서는 타이노인(Taino) 아투에이(Hatuey)[2]가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여 항전하다 쿠바에서 쿠엘라르에게 잡혀 야라(Yara)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화형에 처해지기 직전에 스페인 종군 신부가 아투에이에게 와서 "세례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라.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과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며 그에게 개종을 권했는데,[3] 아투에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종군 신부에게 "죄 없는 내 아내와 딸을 강간하고 죽인, 내 동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그 스페인인들도 그러면 천국에 갔느냐?"라고 물었고, 종군 신부는 "당연히 세례 받았으니 죄사함 받고 천국에 갔다"고 말하자 아투에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그럼 나는 그런 천국에 가지 않겠다. 그런 잔인한 인간들 내 죽어서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인간들이 없는 지옥이 나에게는 차라리 천국이다"라고 대답하며 개종을 거부했고, 화형을 당해 고통스럽게 죽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이 아투에이의 일화를 자신이 쓴 원주민 파괴에 대한 보고서에 기록하면서 "이런 게 우리 주님과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저 신대륙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행동으로 해서 얻은 명예고 영광이란 말이냐"라고 한탄했다. #

1515년에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원주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1516년 11월에 서인도 제도의 총독으로 원주민 실태 조사 의원을 맡아 떠났다. 1519년 2월에 열린 스페인의 의회에 참석하여 카를 5세 앞에서 스페인 사람과 원주민들이 협력해서 신대륙에 '자유 인디오 도시'를 세우는 계획을 발표하여 승인받았다.

1520년 12월에 다시 신대륙으로 떠나서 스페인 식민자들과 원주민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밝히면서 협력하여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방안을 내세우지만 양쪽 모두의 반발로 1522년 1월에 실패로 끝났다.

1523년에 소속 수도회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생활에 매진하다가, 1526년에 <변명의 역사>를 저술했다. 1531년, 1534년, 1535년에 마드리드에 있는 원주민 통치기구인 인디아스 자문위원회에 엔코미엔다[4] 제도를 이용하여 원주민을 억압하는 인물과 기관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냈다.

1537년에는 <유일한 길 : 모든 사람을 참된 종교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정복되지 않은 원주민들의 영토[5]로 가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교하였다. 1542년에 원주민 파괴에 대한 짧은 보고서를 저술하였으며, 11월 20일에 카를 5세가 엔코미엔다의 세습을 금지하는 새 법률을 발표하게 된다.

멕시코치아파스 교구[6] 주교로 임명되자 1544년 7월에 아메리카로 가서 1545년 1월에 스페인 고해신부들에 대한 훈계와 규정을 저술하고, 그 규정에 따라 시행했지만 1545년에 신자들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1547년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며 <서인도의 역사>를 저술하였다.

1550년 8월에는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에게 "그들도 인간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누구도 그들을 함부로 할 권리가 없으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취해야 한다"고 반박하여 1551년 이 논쟁에서 사실상 승리하였다. 하지만 엔코미엔다들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의 혹독한 생활은 변함없었다. 또한 이 논쟁에서 그는 흑인 노예를 도입하여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노예 상태에서 구하자는, 지금으로서는 많이 당황스러운 논리를 내놓았다(...)# 정확히는, 라스카사스는 인디오들이 흑인에 비해 근력이나 지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노예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라스카사스의 시대까지 유럽에서는 흑인은 근력과 지구력이 뛰어나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로 흑인들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며 후회하고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고 한다.[7]

1562년에는 <인디오의 역사Historia de las Indias>의 서문 부분만 출판하였다. 1566년 7월 17일에 마드리드의 아토차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사망하였으며, <인디오의 역사>는 그의 뜻에 따라 1602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문부터가 "하느님께서 스페인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인도에서 자행한 파괴 행위 때문이며, 스페인을 파괴하려는 하느님의 생각은 명백히 정당하고 그것은 40년이 지나면 분명해질 것"이라는, 스페인인으로서는 매국노라고 불려도 할 말 없는 언급도 하였다.[8] 이 책은 적국인 프랑스영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어 스페인을 공격하는 요소로 쓰였다.

3. 평가

그의 적극적인 원주민 권익 옹호 활동으로 인해 중남미에서는 물론 스페인 내부에서도 대체로 평가가 좋은 인물이다. 라스카사스의 평판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태동한 19세기 이전 16, 17, 18세기에, 특히 라스카사스를 계승해 인권론과 국제법에 관심이 많았던 살라망카 학파를 중심으로 훌륭한 스페인의 지식인이자 교회의 아들로 좋게 평가한다. 라스카사스가 공부했던 살라망카, 성직자로 일했으며 토론에 참여했던 바야돌리드 등 스페인 각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나 각종 지명들이 있다.

그러나 조국인 스페인에서는 비판도 좀 있다. 특히 콩키스타도르의 행위를 고어물 수준으로 잔인하게 기록했는데 진위여부는 차치하고 하필 라스 카사스가 자신의 기록을 총집대성해서 저술한 1542년(공식출판은 세비야에서 1552년에 이루어졌다)에는 콩키스타도르들이 여전히 아메리카에서 활동하던 시기인데다 콩키스타도르들도 라스 카사스의 저술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왜 자기들을 그런식으로 묘사했냐며 라스 카사스는 살아있을 때에도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훗날에도 스페인에서 메넨데스 피달 같은 일부 학자들, 자국 중심적 성향의 스페인인들은 라스카사스가 따지고보면 다른 유럽인들도 다를 바 없었던 짓을 유독 스페인만 잘못한 것처럼 매도했다며 비판적으로 보았다. 참고로 피달은 1869년생이고 1968년에 졸했으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사람이다. 심지어 라스카사스에 대한 비판은 말년인 1960년대에 했다. 이 때 미국에선 마틴 루터 킹 목사로 대표되는 흑인민권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였다.[9] 이는 19세기 들어 스페인도 다른 유럽 국가처럼 이전보다 강경한 인종주의에 기반해 좀더 폐쇄적이고 노골적인 국익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이 대두해 라몬 메넨데스 피달을 비롯한 많은 자유주의, 좌파 지식인들도 이러한 영향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 국가 이전의 16~17세기 근세(early modern)에는 아직 본격적인 생물학적 인종주의의 근간이 되는 유전학 같은 자연 과학적 토대도 없었고, 민족주의가 기껏해야 그 사상적 토대나 다져지는 시대였으니 종교적 정체성과 이해타산만 맞아 떨어졌으면 문화와 민족간의 차이가 의외로 상호간 교류에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부정적인 시각도 오히려 상당히 뒤늦은 근대와서 형성되었으며 지금은 그리 주장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일시적 평가였고, 오히려 본인이 살았던 16세기에서 라스카사스는 '광야에서 혼자서 박해받으며 외로운 정의를 주장한 아웃사이더'는 결코 아니었다. 라스카사스가 항변한 가톨릭적 반인종주의는 오히려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에선 안토니오 몬테시노스를 비롯한 도미니코회의 선배들이 이미 토대를 닦았고, 동시대에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같은 신학자, 법학자들이 이론적으로도 체계를 잡았으며 스페인 왕실이나 유럽 가톨릭 교회에선 더 주류에 가깝고 권력자들도 옹호했던 시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베리아 식민제국들의 신대륙 정복지에서 이루어진 학살과 학대는 결국 스페인 본토 안에서야 듣기좋은 소리 어이쿠 라스카사스 선생님하면서도 막상 이권이 걸려있는 아메리카 현지에 깊숙하게 개입할 능력이나 의지는 부족했던, 실천과 집행력의 문제에 따른 이중성과 어느정도는 불가항력인 신구대륙 미접촉 질병 문제[10] 같은 복합적인 요소가 크지, 스페인 본토에서 어쨌든 입으로나마 반성, 자숙하는 목소리가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미국의 노예제와 20세기까지의 흑백 강제 분리, 유럽 대륙의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국가관, 인종관은 오히려 생물학적 차원에서 유색인종은 근본적으로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혔던 19세기, 20세기 초반에서나 조성될 수 있었다. 오히려 라스 카사스가 활동했던 시절의 세풀베다가 보여준 강경한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은 사실 당대로도 다수 의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달 본인으로 두고 말하자면 이런 강한 내셔널리즘, 스페인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긴 했지만 19세기 스페인 자유주의 정치판에서부터 미국-스페인 전쟁, 보르본 왕조 몰락, 제2공화국 탄생, 스페인 내전, 프랑코 독재 정권까지 격동의 스페인 근현대사 온갖 못볼 꼴을 다보며, 나름 당시 스페인, 특히 노년의 프랑코 정권의 악독한 정치적 탄압에 맞서 왕립 스페인어 학회 의장이라는 학자로서 최고로 명예로운 자리도 갖다 버리고, 클라우디오 산체스-알보르노즈, 아메리코 카스트로 같은 해외에 망명 나가있는 동료 학자들도 도와주곤 했던, 자기 시대에서는 양심과 문제 의식을 포기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 메넨데스 피달이 살았던 시대 자체가 스페인인들 입장에선 좀 비관적으로 보면 18세기 이후 끊임 없이 몰락해가는 자국의 쇠퇴사에서도 제국 완전 해체, 가난, 내전, 독재로 인해 가장 밑바닥에서 "스페인은 유럽의 아프리카" 따위 비하적인 담론과 이에 따른 방어적 마인드, 민감함 또한 극에 달했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후세의 종교인들, 사회운동 진영 사이에서는 해방신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기도 한다.

4. 기타



[1] 현재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2] 쿠바인들 사이에서는 그를 '아메리카의 첫 반란자'로써 서구 세력의 침략에 맞서 싸운 원주민 영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동상이 쿠바 동부 바라코아에 세워져있는 등, 쿠바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아비바 촘스키, 『쿠바혁명사』, 정진상 옮김, 삼천리, 2014, 37-39).[3] 그러니까 개종하면 살려준다도 아니고 죽일거긴 한데 개종하면 천국갈 수도 있다 였던 것이다. 다만 당시 아타우알파의 예시처럼 개종했으면 화형보단 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줬을 가능성은 있다.[4] '위탁'이라는 의미이다. 지주들이 국왕과 계약을 맺어 토지와 원주민들을 할당받고 이를 세습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의 목적은 국왕이 지주들을 직접 통제하기 위함이었다.[5] 지금의 코스타리카의 골포둘세 근처의 투수틀란[6] 1964년에 산크리스토발데라스카사스 교구로 명칭 변경.[7] 흑인 노예들의 인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한 성직자가 없던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는 성 베드로 클라베르가 있다.[8] 그리고 그 예언은 아니나 다를까, 실제가 되었다. 스페인의 강압적 정치는 스페인 제국의 멸망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펠리페 2세이베리아 연합은 포르투갈에게 부담만 되었다. 카스티야의 지속적인 포르투갈 식민지에 대한 무관심과 중앙집권화 시도, 영국과의 외교관계 악화로 분노하던 포르투갈은 30년 전쟁 중이던 1640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스페인군과 관료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언했으며, 60년 만에 스페인-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은 와해되고 포르투갈에는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섰다. 이와 비슷하게 카스티야 중심의 강압 정치와 종교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세금 부담에 짓눌린 카탈루냐는 포르투갈의 독립에 자극을 받아, 프랑스 루이 13세의 지원을 기반으로 1640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652년까지 무려 12년이나 지속되어 스페인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641년에는 안달루시아, 1647년에는 남이탈리아의 속령인 나폴리 왕국, 1648년에는 아라곤 본토가 모반을 꾀했으며, 스페인은 이 모든 반란 기도를 진압하기 위해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여기에 30년 전쟁의 패전으로 1648년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프랑스와 계속된 전쟁으로 1659년 플랑드르 남서부의 아르투아와 페르피냥이 속한 로세욘(루시용) 지방을 할양해야 했다.[9] 공교롭게도 킹 목사와 피달은 사망한 연도도 똑같다.[10] 물론 '어느 정도 불가항력'이란 게 스페인, 포르투갈 현지 극우들 하는 소리처럼 이베리아 식민제국들의 악행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순 없다. 아무리 유럽발 질병들이 파괴적이었다 해도 전쟁과 착취, 전통 공동체 붕괴와 수많은 유랑민 초래로 인해 면역력이 형편없이 떨어져 그리 질병에 쉽게 픽픽 죽어나간 건 이베리아발 콩키스타도르의 착취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