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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텔레비전/프로그램/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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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KBS TBC MBC

1. 개요2. 참고 문헌3. DTV 동양텔레비전 (1964.12~1965.11)
3.1. 1964년
3.1.1. 개국 주간 프로그램3.1.2. 정규 프로그램
3.2. 1965년
3.2.1. 정규 프로그램
4. JBS 중앙방송 (1965.12~1966.7)
4.1. 1966년
4.1.1. 정규 프로그램
5. TBC 동양방송 (1966.8~1980.11)
5.1. 1966년
5.1.1. 정규 프로그램
5.2. 1967년
5.2.1. 정규 프로그램
5.3. 1968년
5.3.1. 정규 프로그램
5.4. 1969년
5.4.1. 정규 프로그램
5.5. 1970년
5.5.1. 정규 프로그램
5.6. 1971년
5.6.1. 정규/특집 프로그램
5.7. 1972년
5.7.1. 정규/특집 프로그램
5.8. 1973년
5.8.1. 정규/특집 프로그램
5.9. 1974년
5.9.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0. 1975년
5.10.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1. 1976년
5.11.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2. 1977년
5.12.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2.1.1. 협력 제작 프로그램
5.13. 1978년
5.13.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4. 1979년
5.14.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5. 1980년
5.15.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5.1.1. 제작 취소 프로그램
5.15.2. 폐국 주간 프로그램

1. 개요

2. 참고 문헌

3. DTV 동양텔레비전 (1964.12~1965.11)

3.1. 1964년

3.1.1. 개국 주간 프로그램

3.1.2. 정규 프로그램

3.2. 1965년

3.2.1. 정규 프로그램

4. JBS 중앙방송 (1965.12~1966.7)

4.1. 1966년

4.1.1. 정규 프로그램

5. TBC 동양방송 (1966.8~1980.11)

5.1. 1966년

5.1.1. 정규 프로그램

5.2. 1967년

5.2.1. 정규 프로그램

5.3. 1968년

5.3.1. 정규 프로그램

5.4. 1969년

5.4.1. 정규 프로그램

5.5. 1970년

5.5.1. 정규 프로그램



5.6. 1971년

5.6.1. 정규/특집 프로그램



5.7. 1972년

5.7.1. 정규/특집 프로그램

5.8. 1973년

5.8.1. 정규/특집 프로그램

5.9. 1974년

5.9.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0. 1975년

5.10.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1. 1976년

5.11.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2. 1977년

5.12.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2.1.1. 협력 제작 프로그램

5.13. 1978년

5.13.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4. 1979년

5.14.1. 정규/특집 프로그램


5.15. 1980년

5.15.1. 정규/특집 프로그램







[91]
5.15.1.1. 제작 취소 프로그램

5.15.2. 폐국 주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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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양텔레비전 DTV의 개국 특집 드라마. 거기에 국내 첫 녹화 드라마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비디오테이프 가격이 비싸 남아있는 방송자료는 없다. 가장 오래된 드라마는 아래에 소개된 아씨 마지막회. (다만 개국특집 쇼는 남아있다.) 거기에 편집 기능도 없었는데, 이에 대한 일화는 생방송 항목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2] 국내 최초의 TV 일일 드라마. 다만 지금의 완전한 일일드라마와는 달리 주2~3회 방송되었다고 한다. 단막극과 주간극이 주류였던 당시 상황에서는 이정도도 진일보 한것이다. 한명숙이 부른 주제가가 유명.[3] 독일의 제약회사인 바이엘 주식회사의 한국 법인인 한국바이엘 약품에서 협찬.[4] 우리나라 법정 드라마의 효시로도 꼽히는 드라마이다. 법정 드라마인 만큼 대사의 양이 엄청나게 많았고, 당시 해설을 맡았던 변호사가 실수로 NG를 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스튜디오에 에어컨도 없어 여름이면 배우와 스탭들이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배우들 사이에서는 "오뉴월 염천에 신세계백화점에서 바이엘 극장이나 찍어라"가 악담이었을 정도라고 한다.(...)[5] 한국 최초의 수사드라마. 유명 영화배우 황해(배우)와 장혁(본명 장현곤)이 주연이며 김순철이 나중에 형사진에 합류했고, 수사반장보다도 6년이나 앞선다. 이순재가 여기서 강간범역을 포함한 범인역을 33번이나 맡은적이 있다(...). 당시엔 배우들이 대부분 악역을 기피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담당PD가 범인역을 할 배우를 구하지 못해 괴로워하자 PD와 친분이 있던 이순재가 "뭘 그렇게 고민해? 내가 해줄게"라고 말하며 자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배우들이 악역을 기피할만도 했던 것이, 드라마 '아씨'에서 막장 남편 긍재역을 맡은 김창세는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이름을 아예 김세윤으로 개명하고(...), 박주아, 이계인, 윤여정, 이정길 등도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았다가 곤경을 치룬 적이 있다.[6]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회사가 협찬 한 것이 맞다.[7] 당시에는 드물었던 국제결혼을 소재로한 드라마였다. 이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8] 원래 타이틀은 '일요극장이라는 타이틀이었지만, 당시 유명 작가였던 '유호'의 작품을 방송하는 전용 프로그램 으로 변모하자 타이틀을 유호극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드라마 타이틀에 작가의 이름을 차용하는, 지금 시점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이다. 1970년 전후에 일요일 저녁 시간대에 방송했으며, 5년간 총 250회가 방송되었다. #작가 유호와 유호극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를 참조. 이 프로그램에서 1971년 8월 21일부터 '돼지'라는 작품을 방영했는데, 어느 시골대가의 머슴인 '돼지'가 우직한 성품 하나로 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면서도 주인 영감과 가족을 위해 온몸을내던져 살아가는 얘기로 인기를 끌었다. 원래 50회가 방송예정되어 있었는데, 26회로 갑자기 축소되었다. 그 이유를 알고봤더니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북측대표가 "요즘 남조선에 볼만한 TV 프로가 '돼지'밖에 없다"라고 말한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이'돼지'라는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고 한다.[9] 한국 TV 연속극의 기념비적인 대히트작. 1970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고, 이 작품 이후 각 방송사에서 연속극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아씨가 인기를 끌자 TBC는 일일연속극을 하나 더 만들어서 2개를 편성하기 시작했고, 이후 1972년에는 하루 3개로 늘어났다. 이후 10분짜리 드라마, 코미디 드라마들까지 가세하면서 1975년에는 하루에 드라마가 5개까지 방송하는데 이르렀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로 곧 줄어들더니, 폐국 당시에는 달동네 1개만 방송했다.[10] 방송은 마지막회만 남아있지만, 대본은 상당수 남아있어 1997년에 리메이크를해 방송했다는 카더라가 있다.[11] 아씨가 히트하자, 일일극 블록을 하나 더 만들었는데, 그 첫작품이 '딸'이었다. 유호 작가가 집필을 맡았으며, 김재형PD가 연출했으며, 안은숙이 주연을 맡았다. 70년 8월부터 71년 9월까지 300회 넘게 방송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2] 아씨의 후속 일일연속극. 1961년 개봉했던 동명의 영화의 리메이크작이다.[13] 이름처럼 해태제과에서 스폰서를 해 주었다.[14] 1971년 12월 8일에 '알뜰부인 덜렁부인'의 후속으로 방영된 고전 해학극으로, 1주에 5회가 방송되었는데, 이 5회가 서로 한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고, 이 주제가 매주 바뀌는 것이 이 드라마의 특징이었다. 정선달 역은 김성원, 정선달 부인 역은 선우용녀, 사미자가 무당 역할을 맡았으며, 1974년 11월 15일에 종영되었다.[15] 1972년 4월 3일부터 동년 10월 6일까지 방영한 고부갈등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김창세(김세윤), 강부자, 선우용녀 등이 출연.[16] 원래는 '조선여인 5백년사'가 올바른 표기지만, 이때만 해도 '이씨 조선'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던 때였기 때문에 '이조여인 5백년사'라고 했다. 이에 대해 논쟁이 있는데, 해당 항목 참조.[17] 1972년부터 1979년까지 14개작품을 방영한 연속사극 드라마. 후일 MBC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를 집필한 신봉승 작가가 극본을 맡았고, 사극 연출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김재형 PD가 연출을 맡았다. 타이틀에서 볼수있듯 여성을 주요인물로 설정해 조선시대 여인상을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갔으며, 정사보다는 야사나 창작위주로 전개되었다.[18] 1번째 시리즈. 연산군의 일대기를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그리움으로 재해석한 일일연속사극. 1972년 8월 28일부터 1973년 6월 29일까지 방영. 신봉승 작가의 사극 데뷔작이다.[19] 1972년 10월 9일부터 1973년 3월 2일까지 방영된 연속극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김민자와 이낙훈이 주연이었다. 당시 국내최초로 TV드라마에서 시한부 인생을 다룬 작품이었다.[20] 1972년 3월, 서울특별시경찰국에서 형법 330조(야간주거침입절도)를 바탕으로 발족한 절도범 전문 수사대인 330 수사대의 비화를 다룬 드라마. 그러나 330 수사대는 일부 수사요원들이 소매치기 조직과 결탁하여 뇌물을 상납받는 등의 비리 혐의가 적발당하는 흑역사를 남기고 1975년 9월 해산당했다.[21] 1973년 3월 13일부터 동년 9월 21일까지 방영된 일일연속극. 화전민촌의 여인상을 담은 드라마로 고은아(본명 이경희) 등이 출연했다.[22] 문숙(본명 오경숙)이 주연을 맡은 홈드라마.[23] 여간첩 김수임의 이야기를 다루는 반공드라마였다.[24] 1974년 9월에 방영을 시작한 수사극, 주인공 박주임역은 배우 박병호가 맡았었는데, 드라마가 종영된 이후에도 형사에 같은 배역으로 계속 출연했다.[25] 개국 초기에 방송된 일요단막극 TV 지정석, TV 소설(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좁은 문, 안네의 일기같은 번안 드라마를 방송했다)과 1967년에 방송된 TBC 극장의 후신으로, 국내 순수 문예작품들을 드라마화 해서 방송하는 단막극으로, TV 문학관, 베스트셀러극장의 조상격에 해당한다.[26] 여보 정선달'의 후속으로 방영된 연속사극 드라마.[27] 1975년 2월 16일부터 1975년 5월까지 방영한 연속사극.[28] 1975년에 방영을 시작했으나,#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의 사랑이야기가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게다가 불륜을 다루고 있어서(...) 퇴폐풍조를 확산시킨다는 이유로 방영이 중단되어 버렸다.[29] 방송 초반에는 토요일에 방영되었기 때문에 타이틀이 '토요무대'였다가, 76년 4월 개편으로 금요일로 이동하면서 금요무대가 되었다.# 참고로 금요무대 이후 고정된 시간대의 단막극은 없었다. 다만, 아래에서 서술할 테마드라마를 비정기적으로 편성하기 시작했다.[30] 1976년 1월 3일에 방송된 신년특집극.[31] 1976년 8월 20일 방영. 장미희의 데뷔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거기에 MIPTV에 출품되기도 하였다.[32] 일요일 저녁 7시에 방송한 수사극 시리즈이다. 당시 MBC 수사반장의 맞불 성격이 강했었다.[93] 이 시리즈의 뿌리는 1975년 4월 19일부터 <억보>의 후속으로 편성된 <형사>이다. 당시 극본은 윤대성이 맡았으며 매주 일요일 오후 7시 55분에 방영했다.[94] 그러나 MBC <수사반장>에 밀려 방영 6개월만인 10월 4일에 방영을 중단했다.[33] 1975년 6월 2일부터 방영을 시작했던 연속극. 평범한 직장여성이 수십억원의 유산을 물려받고 하루아침에 딴세상을맞지만 사랑과 엄청난 유산사이에서 안개처럼 가리워진 연속살인사건에 휘말린다는 이야기였다.[34] 1975년 7월 21일부터 1975년 11월까지 방영한 연속극.[35] 1975년 8월 3일부터 방송했던 연속극. 6.25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했다.[36] 1975년 8월 4일부터 방송했던 연속극. 격동기를 살아온 현대 노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37] 1975년 토요일 저녁 7시에 방송된 대공수사극으로, 형사 폐지되고, 1978년에 만년형사로 부활할 때까지 그 공백을 매꾸어준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당시 MBC의 113수사본부의 맞불 성격이 강했다. 심지어 방영시간도 비슷했다. # 폐국 후에는 KBS에서 계속 방영되었다가 1983년에 종영.[38] 같이 삽시다 공식계정에서 업로드한 1979년 12월 28일과 12월 29일에 연말특집 3부작의 방영분이다.[39] 1980년 6월 28일 방영분으로,특이하게도 프롤로그 형식으로 이야기 전반부가 나온다음에 타이틀이 나오고, 광고(영상에서는 짤렸지만, 타이틀이 나온후 갑자기 전원주가 나오는데, 그게 광고가 짤린 흔적이다...)가 나온다. 이는 70년대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되던 방식이다. 참고로 이 영상은 당시 출연배우였던 배우 정운용이 직접 유튜브에 업로드한 것이다.[40] 70년대 말부터 방송된 주간단막극이다. 매주 다양한 주제로 부부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더 다양하고 흥미로운 부부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 종종 시청자들을 대상으로한 극본 공모도 자주 했었다. 이순재가 남편 역할로 거의 고정적으로 출연하다시피 했다. 방영 당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당시 신문사들의 TV주평 코너에서 호평을 쏟아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신문사의 TV주평 코너는 TV를 견제하는 기능으로써 방송에 대해 혹평일색 이었다. 드라마는 식상하고, 쇼 프로그램은 경박하기 그지없다, 볼만한 교양 프로가 없다가 이 코너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거기서 호평을 보냈을 정도면 적어도 수작 이상이라는 이야기이다. 최초 방영 당시에는 일요일 저녁 7시 45분대에 방송했고, 이후 주말연속극 신설후 계속 평일 심야 시간에 방송되었으며, 여기저기 방영시간대를 옮겨 다니다가 목요일 밤으로 시간대가 고정되었고, 1980년 9월 개편부터 폐국 당시까지 목요일 밤 9시 45분에 편성되었다. 폐국 후 KBS 2TV에서 계속 방영하다가 1981년에 종영되었다. 후속은 드라마게임[41] 창립 13주년 기념 공모 당선작#[42] 1975년 12월 1일부터 방송했던 연속사극. 한글고전소설 '매화전'을 각색했다.[43] 1976년에 방영한 매일연속사극. 1871년 신미양요 이후 100년을 그리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신미양요 이후 100년을 다룬다는 당초 계획과는 다르게 일제강점기로 진입조차 하지못하고 구한말만 다루고 끝났다. 사실 이 드라마 자체가 "민족사관 정립을 위한 프로그램 신설"이라는 정부지침에 따라 편성된것이다.#[44] 흥선대원군과 기생 화선의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이다.[45] 개화파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46] 갑오개혁으로 해방된 노비들이 무악재 싸리비 장수로 사회에 뛰어드는 내용이다.[47] 방송사상 최초의 주말연속극인 작품이다. 1976년 정부는 '76지침'을 내리면서 시간대별 프로그램 편성 규제 및 일일연속극에 대한 규제를 가했는데, 이에 TBC는 '주말에는 자율편성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주말에만 방송하는 연속극을 만든것이다. 그 해 4월 17일부터 방영되었고 처음에는 토요일에만 방영되었으나 10월 9일부터 마지막회까지는 토/일 양일 방영으로 확대되었다. 이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각 방송사별로 주말연속극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인기가 대단해 "바쁘다 바빠"라는 유행어도 여기서 나왔고, 드라마에서 저축을 강조하는 인물이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저축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77년 3월 27일에 종영되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TBC가 여의도 사옥을 이 드라마의 광고 수익으로 지었다는 말이있을 정도였다.[48] 창립 10주년 기념 천만원 고료 극본 공모 당선작이다.이덕화의 사극 데뷔작이기도 하다.#[49] 박길라(본명 박경옥)의 데뷔작이다.[50] 박씨전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추정된다.[51] 1977년 4월 2일부터 10월 8일까지 방영된 주말연속극. 1950년대에 히트했던 라디오 드라마 '청실홍실'의 리메이크 작. 정윤희장미희가 주연을 맡았다. '결혼행진곡'의 후속 주말연속극으로 방영되었다.[52] 박근형과 김형자가 출연한 드라마이다. 박근형은 원래 MBC 전속이었기 때문에 TBC에는 출연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차례정도 TBC로 잠시 이직해 드라마에 출연한적이 있다.[53] 1977년 6월 17일부터 10월 14일까지 금요드라마로 방영했다. 유명 극작가인 유호가 극본을 맡았으며, 하강일PD가 연출했다. 유지인, 노주현, 오현경이 주연배우로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다. 방영당시 높은 인기때문에 드라마 촬영도중 출연배우인 오현경이 수영복을 입은채 도망을 가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장미희, 정윤희가 출연해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청실홍실'과 함께 2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본격적으로 개막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54] 대원군역으로 장용이 출연했다는 기사와 왕비 간택 장면이 등장했다는 기사로 보아서 흥선대원군 집권기를 다루는 드라마였던듯 하다. 장미희가 1인 2역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55] 정윤희가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이다.# 방영도중 실제 외동딸인 여고생들이 정윤희를 찾아오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56] 1977년 10월 15일부터 1978년 3월 5일까지 방영. 배우 이낙훈이 그동안의 중후한 이미지를 벗고 '찰리백'이라는 코믹한 역할을 연기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주요 주연은 이낙훈, 홍세미, 이순재였다.[57] 1930년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인기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했다.[58] 1977년 11월 7일부터 1978년 1월까지 방영한 청춘드라마이다. # 쇼쇼쇼 MC로 유명한 정소녀가 이 드라마에 출연했다.#[59] 최초의 한일합작 드라마.[60] 1978년 1월 16일부터 그 해 9월 30일까지 방영된 일일연속극. 노주현, 한진희, 이낙훈 주연으로 나전칠기를 소재로 하였으며 항상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을 되풀이하고 그들에게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한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렸다.당시 작품의 고증 및 연출에 참여했던 이칠용씨의 회고 방영 당시에 시간대를 여러번 옮겼는데, 처음에 8시 20분 연속극으로 시작해 이후 8시 40분 연속극으로 시간대를 변경했고, 또다시 시간대를 옮겨 최종회까지 9시 35분 연속극으로 방영되었다.[61] 1978년 1월 16일부터 5월 15일까지 9시 35분에 방영된 연속극으로, 배우 고은아의 복귀작이었다.# 신생아가 병원에서 바꿔치기 되는 다소 막장스러운 스토리로 인해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방송윤리위원회 로부터 경고처분을 받았다.# 이어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극중대사로 또다시 경고처분을 받았다.#[62] 뿌리' 방영 이후 천편일률적인 일일극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고, 대형화된 TV 드라마 및 미니시리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다. TBC도 이에 편승해 <테마드라마>라는 이름의 대형 단막드라마 프로젝트를 통해 드라마의 대형화 및 다양화를 시도하였다. 각 작품들의 작품성도 대단히 뛰어났고, 시청률도 높았다. 한국 TV프로그램의 대형화는 테마드라마, 그리고 80년대 MBC의 제1공화국쇼2000, KBS의 TV 문학관100분쇼로 이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테마'드라마인 만큼, 환경문제 특집이나 3.1절 기념 특집, 노인문제 등 주제성이 강한 작품이 많다. 앞서 나왔던 대춘향전도 넓게 보면 테마드라마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집이었기 때문에 방영시간이 딱히 정해져 있던것은 아니고, 8시, 9시 또는 10시에 정규 방송을 취소하고 방송했다.[63] 정윤희, 한진희, 김형자 주연.# 구혜영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다.# 방영당시 드라마 각색을 놓고 원작자와 제작진의 의견충돌이 있었다.#[64] 1978년 3월 11일부터 1978년 6월 18일까지 방영. 유지인, 장미희, 서미경, 정소녀, 노주현, 임성민 주연이었다. 역경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호스티스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관심을 끌었다. 바니걸스가 주제곡을 불렀다.##하지만 이전까지 방영되던 주말연속극들의 인기가 워낙 넘사벽 이었던지라,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65] 본격 검객물을 표방하는 대하사극이다. 일지매와 비슷한 내용이었다고 한다.[66] 엄마안녕의 후속 일일극이었다. 정투기에 열을 을리는 복부인가정에 들어온 화전민 가정부의 이야기를 통해 금전만능의 세태를 비관한는 내용이었다.# '아씨' 등 수많은 히트 드라마를 연출했던 고성원 PD가 연출을 맡았다.[67] 1978년 6월 24일부터 1978년 11월 5일까지 방영. 가족들을 부양하기위해 자기를 희생해가며 젊음을 바쳐온 한 여인이 순진한 청년과 사랑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68] 1978년 7월 30일에 방영한 납량특집극. 장미희와 노주현이 출연했으며, 장미희가 천년 묵은 구미호로 열연을 펼쳤다. 이후 거듭된 재방영 요청끝에 8월 6일에 다시 방송했다.[앵콜방송] 재방영.[70] 1978년 11월 11일부터 1979년 3월 11일까지 방영한 주말 연속극.[71] 1978년 12월에 김세윤 주연의 <만년형사>로 방영을 다시 시작했다.## 초기에는 금요드라마로 편성되어 방송시간이 금요일 밤 10시 40분에 형사반장 역이 오현경이었다가 1979년 4월 8일부터 제목도 <형사>로 바뀌면서 일요일 오후 7시 45분으로 시간을 옮겼고, 형사반장에 박병호, 형사진 역에 이동진 대신 임동진을 넣는 등 개편을 가했다. 방영당시 주요주연은 김세윤, 박병호, 임동진이었다.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1980년에 납량특집으로 방영된 장미희, 이순재 주역의 얼굴 없는 미녀#. 후에 영화화도 되었다. 1980년 3월 30일 방송한 '종말'편에서는 초저녁 시간대에 정사 장면을 적나라하게 방송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폐국 후 KBS에서 계속 방영했다가 1983년 개편 때 <형사기동대>를 거쳐 1986년 초에 <형사>, 하반기에 <형사 25시>로 각각 변경하여 방영되었다가 1990년에 종영되었다.[72] 1979년부터는 2개월마다 1편당 6편씩 제작했다.[73] 1979년 3월 17일부터 1979년 9월 30일까지 방영했으며, 장미희와 김세윤, 유지인이 주연이었다. 방영 당시 타이틀영상 방영당시 주연배우인 장미희가 해외 영화 촬영 이후 늦게 귀국하는 바람에 스케줄이 펑크나고, 대본을 수정하는 사건이 있었다.# 방영당시에 내용이 비현실적이고 답답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또한 극중 라이벌 관계였던 유지인과 장미희가 카메라 밖에서도 서로의 라이벌 관계를 의식한다는 소문이 있었다.#[74] 이미숙의 첫주연작이다.[75] 1979년 6월 18일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방송된 일일연속극이다. 시골 소녀 곰례(정윤희)가 서울 도심 빈민가의 다리가 불편한 김영섭(노주현)에게 시집오면서 일어나는 각종 에피소드와 역경,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에 초점을 맞추던 그동안의 드라마와는 다르게 도심 빈민가를 무대로 소외계층을 주인공으로 삼아 큰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다가 주,조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함께 10.26, 12.12사태로 통금시간이 앞당겨지면서 사람들의 귀가시간이 앞당겨진 덕택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5개월 후 달동네를 집필한 나연숙 작가의 작품이다.#[76] TBC에서 방영된 특집사극으로, 이 작품을 매년 작가와, 연출, 배역을 달리해 다른 각도로 해석된 면을 보여주려 했으며, 10년 이상 장기방영할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폐국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TBC는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춘향을 뽑기 위해서 매년 <대춘향 선발 공모대회>를 열었는데, 1979년에는 대회를 다 치뤄놓고 정작 극에는 출연시키지 않았다. 1979년 1회는 창사 15주년 특집으로 방송되었고, 이때 춘향 역은 장미희가, 이몽룡 역은 한진희가 맡았고, 김재형PD가 연출을 맡았다.[77] 1979년 10월 13일부터 1980년 3월 16일까지 방영. 김수현 작가[95]가 극본을 썼으며, 김민자, 이순재, 한진희, 연운경, 정윤희, 이덕화, 김미영, 여운계 등이 출연했다. 3대 독자인 집에서 4번의 유산을 겪은 고독한 여인을 다루고 있다. 김민자가 이 작품으로 1980년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수상했다.[78] 당시에 TBC가 여의도 사옥으로 이전하면서 '평일 100분 와이드 드라마' '테마방송극'이라고 홍보 하면서 신설한 드라마 시간대이다. 주말연속극처럼 이틀 단위의 드라마 편성을 평일에도 시도한 것이다. 또한 주제성 강한 작품을 10부작 한정으로 편성해 그동안의 연속극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두 타이틀만 방송하고 금요연속극으로 변경했다.[79] 현재까지 공개된 영상은 없지만,[96] 대신 당시 대본이 인터넷상으로 공개되어 있다.# 방영 당시에 일본 소설 표절 의혹이 있었다.#[80] 1980년 3월 16일부터 9월 30일까지 방송된 개화기를 배경으로한 일일연속사극이다. 최초 타이틀은 동녀 미사였으나, 극 중반부터 의녀 미사로 타이틀을 교체했다. 천대받는 남사당패출신의 여자가 다섯 사내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기구한 운명속에서도 첫사랑의 순정을 끝내 지켜낸다는 이야기이다.# 최초 '동녀미사'시절에는 주인공 미사인 정윤희가 남사당패에 속해있던 시절을 배경으로 다루었고, 이후에 미사가 의병에 참여하면서 바뀐 제목이 '의녀미사'이다. 이 드라마의 주연을 맡은 정윤희와 노주현은 야, 곰례야가 끝나기 전에 이 드라마에 투입되었고, 이 때문에 한 동안 TBC의 일일연속극 시간대(밤 8시 20분, 밤 9시 35분)에 두 사람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었던 시기가 두 달 가량 지속되었다.[97] 참고로 이 드라마가 TBC에서 마지막으로 방송한 연속사극이다.[81] 1980년 3월 29일부터 1980년 8월 31일까지 방영. 전작에 이어서 김수현 작가가 또 극본을 맡았다. 최화정의 데뷔작으로 이 드라마가 끝나고 얼마후 방영을시작한 금요극 아롱이 다롱이도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다. 3회 연속으로 쉬지않고 극본을 쓴 셈이다.[82] 전작인 '욕망'에 이어서 장미희가 주연으로 나왔다.[83] <야, 곰례야> 후속으로 방영한 9시 40분대 연속극이다. 박완서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각색에 실패하여 극의 내용이 이상하게 흘러갔고, 결국 실패작이라는 냉혹한 평가를 받으며 쫓기듯 종영했다. 당시 TBC는 일일극을 2개로 유지하는 대신, 내용의 건전화를 꾀하겠다고 했으나, 이 작품 이후 9시대 연속극은 폐지되었고, 매일연속사극이 방영되던 8시대에 일일극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다만 이렇게 쫓기듯 종영하고 9시대 일일극이 폐지된데에는 복잡한 속사정이 있는데, 1980년 9월에 발표된 '방송 자율정화 결의안'에 일일극은 1개만 운영할것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84] 1980년 6월 2일부터 10월 7일까지 평일 저녁 6시 30분에 방영되었던 어린이 야구 드라마. 강수연, 안정훈 주연.[85] 낙도 이린이들의 생활의 그린 드라마로, 이상현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1980년 7월 21일과 22일 밤10시에 남량특집으로 방영했다.# 극중에 "학교 종이 돈돈돈/어서 모이자/선생님이 손 벌려/봉투 달랜다""아버지는 나귀 팔아/술받아 먹고/어머니는 방망이 들고/쫓아 가시어/한 대 맞고 헬렐레/두 대 맞고 뻗었다/"라는 내용의 노래가 등장하는데, 교권을 침해하고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교육계의 비판을 받았다.# 작가인 이상현씨가 조선일보를 통해 작품내용에 해명을 하기도 했으나#, 교육계에서 방송윤리위원회에 제소할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TBC측에서 신문에 공개사과문을 기재하고, 부산지역 본방송 및 재방송 일정을 전면 취소하는 것으로 끝났다.#[86] 1980년 9월 1일에 신설된 주간 드라마로 월요일 밤 9시 45분에 방영. 방영 기간자체가 짧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들이 알려진게 없다. 방영당시 소개기사를 보면, "충효와 우리 역사속의 미담가화를 담은 『전설사극』을 새로 마련, 「드라머」를 통한 교도화를 꾀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언론통폐합 이후에 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비슷한 포맷의 전설의 고향이 이미 있어서인지, 이어서 방영하지 않았다.[87] 1980년 9월 6일부터 방영된 주말연속극이자 TBC 역사상 마지막으로 방영된 드라마. 언론통폐합 이후 12월까지 KBS 2TV에서 방송되었다. 여담으로 조용필 2집 타이틀곡인 '촛불'이 주제가로 사용되었다.[98] 정윤희, 한진희, 이순재 등이 출연했다. 드라마 내용은 상당히 어두운 편인데, 주인공인 정윤희가 암을 극복하면서 일어나는 부부간의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에 남녀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끝났다. 하지만 KBS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88] 1980년에 방송된 제2회는 추석특집으로 방송되어 춘향 역에 이경표, 이몽룡 역은 노주현이 맡았고, 아씨로 유명한 고성원PD가 연출했다. 1980년에는 대춘향으로 당선된 이경표가 춘향역으로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의 연출자이신 고성원PD의 회고에 따르면 왕PD는 정윤희를 춘향역으로 하자고 밀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PD 본인이 "작년에도 뽑아놓고 출연을 안시켰는데, 올해도 또 그러면 TBC의 자존심이 있지 이래서야 되겠느냐"며 이경표의 출연을 밀어붙였다고 한다.[89] 1980년 10월 1일부터 방송된 동양방송의 마지막 일일연속극. 나연숙 각본, 김재형 연출. 언론통폐합 이후 KBS1로 이동하였고 1981년 9월 5일에 종영되었다.[99][100] 원래는 1979년에 '테마드라마[101]'로 방영했었는데, 반응이 좋자 일일연속극으로 준비해 방영한것이다.# 1980년 당시에는 월~금 8시 35분과 일요일 밤 10시대에 방영되었다. 현재 KBS아카이브 옛날티비 채널에 TBC시절 방영분이 일부 올라와있다.[90] 이순재를 주역으로 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역시 KBS 2TV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 축복과 같이 통폐합때가 극의 최후반부였기 때문. 내용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코믹한 분위기의 드라마였다고 전해진다. TBC 당시에는 금요연속극[102]으로 방영되었으며, 김수현 작가가 작품을 집필했다. 이 드라마에도 전작인 욕망, 필녀에 출연한 장미희가 또 출연하면서 3번 연속으로 같은 시간대에 출연할뻔 했으나, 김수현 작가와의 갈등끝에 장미희가 드라마에서 하차하면서 김형자가 대신 투입되었다. #[91] 1980년 11월 28일 방영분의 11월 30일 재방송 당시 녹화 영상이다.[92] TBC의 마지막 어린이 드라마로 전작에 이어 안정훈이 주인공 장영실 역을 맡았다. 폐국 이후 KBS에서 끝까지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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