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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16:19:17

데메트리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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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조지아 왕국 2대 군주
დემეტრე | 디미트리오스 2세
파일:디미트리오스 2세.jpg
제호 한국어 디미트리오스 2세
조지아어 დემეტრე
라틴어 Demetrius II
별명 자신을 희생한 자(თავდადებული)
가족 다비트 7세(아버지)
그반사 카하베리제(어머니)
기오르기(형)
콘스탄틴 2세(동생)
마누일 1세의 딸(첫번째 아내)
솔가르(두번째 아내)
네이트라(세번째 아내)
다비트 8세(장남)
바크탕 3세(차남)
마누일(삼남)
이드가르(사남)
바이두(오남)
기오르기 5세(육남)
라사(장녀)
루수단(차녀)
자켈리(삼녀)
생몰 년도 1259년 ~ 1289년 3월 12일
재위 기간 1270년 ~ 1289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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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부 조지아 왕국 2대 군주.

2. 생애

동부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다비트 7세와 라차 공작 카하베르 4세 카하베리제의 딸 그반사 카하베리제의 아들이다. 형으로 기오르기, 동생으로 콘스탄틴 2세가 있었다. 1살 때인 1260년 아버지가 훌라구 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몽골군에게 참패한 뒤 달아났을 때, 어머니는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후 훌리구 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1268년 형 기오르기가 사망한 뒤 왕위 후계자가 되었으며, 1270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조지아 동부의 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훌라구 칸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일 칸국의 통제에 따라야 했기에, 그의 실권은 보잘 것 없었다.

그는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일 칸국의 원정에 동행했다. 이 시기에 15,000명의 조지아 군대를 지휘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해 두각을 드러냈다. 1281년 제2차 홈스 전투 때 몽골군은 패배했지만, 그는 나름대로 선전했으며 여러 전리품을 획득했다. 한편, 그는 최초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아흐마드 테퀴데르를 지지했으며, 뒤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몽골 불교도 신자들과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의 반발에 직면했던 아르군 칸에게도 충성을 다했다.

1288년, 아르군 칸의 명령에 따라 카스피해 연안의 다르반트에서 봉기한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일 칸국의 권신 부그하가 반역을 꾀했다가 발각당해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부그하의 아들은 그의 딸과 결혼했기에, 아르군 칸은 그도 역모에 가담했을 거라 의심하고 소환 명령을 내렸다. 조지아 총대주교와 조언자들이 소환에 응하지 말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몽골군이 조지아를 침략할 것을 우려해 소환령을 받아들였다. 그는 아르군 칸 앞에 도착한 직후 체포되었고, 1289년 3월 12일 모바칸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유해는 조지아로 이송된 뒤 므츠헤타에 묻혔다. 조지아 정교회는 그를 순교자로 여기고 성인으로 시성했다. 사후 다비트 나린의 차남 바크탕 2세가 동부 조지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생전에 3번 결혼했다. 첫번째 아내는 마누일 1세의 딸로, 슬하에 세 아들 다비트 8세, 바크탕 3세, 마누일과 딸 라사를 낳았다. 이후 몽골 공주 솔가르와 결혼하여 두 아들 이드가르와 바이두, 딸 자켈리를 낳았다. 그가 처형된 뒤, 그녀는 조지아를 떠나면서 이드가르와 바이두를 데려갔다. 바이두는 훗날 이복형제 다비트 8세의 사절로서 킵차크 칸국의 토흐타 칸을 찾아갔다. 딸 자켈리는 훗날 트라페준타 제국 제9대 황제 알렉시오스 2세와 결혼했다.

1280년경, 그는 세번째 아내로 조지아 삼츠헤, 아자라, 샤브셰티, 클라제티, 라지아, 타오, 콜라, 아르타아니, 자바헤티 등지의 통치자 베카 1세 자켈리의 딸 네이트라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훗날 조지아를 재통합한 군주 기오르기 5세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