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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4 17:32:02

다케나가 사건



태평양 전쟁 말엽인 1945년, 뉴기니 전선에서 있었던 일본군의 부대급 집단 투항 사건.

사실 전쟁에서 패배한 부대가 지휘관의 결단으로 부대 단위로 항복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 사건은 적에게 투항하고 포로가 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던 일본 제국군에서 발생한, 태평양 전쟁 기간 내내 유일했던 좌관급의 부대단위 투항 사례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으로서 기록되고 있다.
1. 배경2. 경과3. 여파4. 전후

1. 배경

1942년 코코다 트랙 전투의 패배와 뒤이은 연합군의 반격, 그리고 제해권 상실로 인한 보급 두절 등으로 뉴기니 전선의 일본군은 엄청난 곤경에 처한 상태였다. 증원도 보급도 없는 상태에서 이들은 후퇴도 항복도 없다는 일본군의 방침에 따라 호주군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이면서도 계속해서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 사건의 주인공인 보병 제329연대 2대대(이하 대대장의 이름을 따 다케나가 부대로 지칭)가 속한 일본군 제41사단은 중일전쟁이 격화되던 1939년 창설된 사단으로, 창설 이후 화북 지역에 주둔, 제1선 전투보다는 후방 치안유지 및 게릴라 토벌에 중점을 두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인 1942년 41사단은 중국 전선에서 남방 전선으로 전환 배치되어 솔로몬 및 뉴기니 전역을 총괄담당하는 제8방면군, 그 중에서도 그중에서도 뉴기니를 전담하는 제18군 산하로 배속된다.[1] 다만 실제 뉴기니 전선에 파병된 것은 1년 뒤인 1943년의 일인데, 이때는 이미 18군에 속한 다른 2개 사단(20사단, 51사단)이 호주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거의 괴멸된 뒤의 일이었다.[2] 때문에 가장 늦게 도착한 41사단이 18군의 주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면 방어에 전념해야 하는데 18군 지휘부는 공세를 부르짖었고 그 결과 41사단은 아이타페 일대에서 연합군에 공세를 걸었으나 상대는 호주군도 아니고 제대로 준비해서 들어온 미군이었고, 41사단은 20, 51사단과 마찬가지로 처참하게 패배한다.(1944년 7~8월 아이타페 전투)

이후 41사단 역시 기나긴 패주의 길을 걷게 된다.

2. 경과

아이타페 전투 이후 미군은 필리핀 탈환전을 위해 떠났고, 뉴기니 전선은 모두 호주군이 맡게 되었다. 미군에 비해 화력은 줄었다지만 이미 처참하게 패배하고 보급이 끊긴 일본군으로선 지연전, 후퇴전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1945년 3월 41사단 잔존부대는 동부 뉴기니에서 호주군에 쫓기고 있었다. 다케나가 마사하루(竹永正治) 중좌가 지휘하는 239연대 1대대는 패배, 굶주림, 질병, 뒤이은 호주군의 계속된 추격과 원주민의 습격 등으로 말이 대대지 병력이 약 50여 명까지 급감한 상태였다. 3월 하순경(일본군 공식 전사에서는 3월 24일) 다케나가 부대는 상급 부대인 239연대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이동방향을 변경했다. 이후 항복에 동참했던 다케나가 부대 장교의 회고에 따르면 연대로부터 추후 작전이나 이동 등에 대해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해서 자신들이 버려졌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4월 12일, 사실상 독자세력이 된 다케나가 부대는 식량 확보를 위해 인근 원주민 촌락을 공략, 일시적으로 마을을 점령했으나 식량만 일부 노획한 후 다음날 바로 철수했다. 이후 원주민들로부터 일본군에게 공격받았다는 연락을 받은 호주군은 즉시 해당 마을에 1개 소대를 파견하여 일본군 수색 작업을 펼쳤다.

4월 24일, 파견된 호주군 병력이 다케나가 부대와 접촉하여 소규모 교전이 발발했다. 이 전투에서 2명을 잃은 다케나가 부대는 겨우 후퇴했지만 호주군의 추격이 붙은 것을 알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때 부대원 중 한 명이 몰래 가지고 있던 연합군 측의 투항권고 삐라를 꺼내들었고[3] 다케나가 중좌 이후 간부들은 고민 끝에 항복을 결정했다. 이후에는 말이 엇갈리는데 간부들만의 결정으로 항복했다고 하는 증언도 있고, 간부들의 결정 이후 사병들을 소집해 항복 결정을 알린 후 동참 여부를 물었다는 말도 있다. 다만, 후자의 경우 동참하지 않을 경우 다른 일본군들이 그러하듯 수류탄으로 자폭해야 한다는 말이 덧붙여졌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다케나가 포함 간부들만의 의견으로 항복을 결정하고, 병사들에게는 죽기 아니면 항복하기 식으로 양자택일 강요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삐라 뒷면에 영문으로 항복조건 등을 적어놓은 뒤 기다란 막대에 걸어놓은 후 다시 은신했다. 며칠 뒤 호주군 정찰병들이 이를 발견하여 상부에 보고했고, 지휘부는 즉시 원주민 등을 통해 은신한 다케나가 부대를 찾는데 주력했다. 5월 2일, 호주군 정찰대가 다케나가 부대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다케나가 중좌는 호주군과 항복 조건을 협상했고[4] 5월 3일 다케나가 부대는 정식으로 투항한다. 장교 5인, 준사관 4인, 하사관 및 병 33인 총 42인이었다.

3. 여파

239연대를 비롯하여 일본군 상위부대들은 처음에 다케나가 부대가 실종된 줄 알고 여러 차례 연락하려 시도했다. 이 시도가 모두 무위에 그치자 전투 중 전멸로 추정했는데, 얼마 안 가 호주군이 일본군 진영에 다케나가 부대의 투항 사실을 알리며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를 뿌리자 진실을 알고 멘탈이 붕괴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18군 사령관 아다치 하타조는 자신의 부덕함으로 부하들이 항복이라는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며 천황 폐하께 불충을 저질렀다고 말 그대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사실 뉴기니 전역에서 안 그래도 불리했던 일본군이 더 심각하게 무너진 덕에는 아다치의 졸렬한 지휘도 크게 한몫했으니 본인의 부덕함이 맞기는 하다.(...)[5]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투항한 다케나가 부대원 42인은 모두 종전 시까지 무사히 살아남았다. 굳이 포로학살이나 학대 아니어도 질병 등으로 한두 명은 더 죽을 법도 한데, 다케나가 중좌가 항복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부대원들의 건강 및 체력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많이 기울였던 듯 다들 비교적 건강했다. 이후 부대원들 중 몇몇은 항복을 권유하는 라디오 방송이나 삐라 제작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지휘관인 다케나가 중좌는 당시 최고위급 포로였기에 마닐라로 불려가 특별대우(...)를 받으며 포로심문을 받았다.[6] 중좌긴 해도 낙오부대의 지휘관이었기에 고급 정보는 없었지만, 대신 일본군 장교로서 일본군의 조직문화와 일본인의 정신, 사상 등을 이야기했다. 이중에는 자신처럼 투항한 일본군을 직접 전선에 내보내어 투항권고를 하면 배신자로 사살될 것, 덴노를 죽이면 일본인들은 끝까지 저항할 것이지만 덴노가 항복하라고 하면 다들 군말없이 항복할 것, 국민들은 항복을 원하지만 군부는 항복을 거부할 것 등등을 이야기했고 이는 미군이 일본군과 일본인을 이해하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이후 뉴기니 전선에서는 다케나가 부대의 항복을 알리는 삐라와 방송 덕인지 종전 직전인 8월 중순에 중대장 선에서 20명 이하 단위의 집단항복이 두 차례 더 있었다. 이들 역시 포로심문에서 다케나가 부대의 항복의 영향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4. 전후

패전으로 군대가 해체되었어도 구 일본군 출신들과 일본 사회는 다케나가 사건을 애써 모른 채 했다. 일본 전사 연구나 전후 회고 등에서 다케나가 부대의 집단 항복이 언급된 건 패전 40년이 지난 1986년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던 사람들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패전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이들에겐 항복하지 않는 제국 육군, 포로가 되지 않는 제국 육군의 신화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장 다케나가 사건이 알려진 이후에도 18군 참모였던 호리에 마사오 참의원이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며 강하게 부정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 정신승리를 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별다른 여파는 없었다. 다케나가 본인도 전후에 잘만 취업해서 민간회사를 다녔고, 다른 부대원들도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어차피 일본이 패전했기에 공식적인 불이익을 줄수도 없었다. 다케나가는 1967년 사망했는데 장례식때도 육사 동기들 다수가 참석하여 다케나가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1] 이후 18군은 남방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어 종전까지 유지된다.[2] 20사단은 라에 전투, 51사단은 핀슈하펜 전투에서 호주군에게 처참히 박살나고 잔존 병력들은 굶주림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자연적으로 소멸했다. 특히 20사단의 경우, 뉴기니 전역 직전에 2만 5천에 달했던 사단 정원이 패전 후 귀국할 때에는 1,711명으로 줄어들어 생환율이 10%도 되지 못했다.[3] 일본군은 이런 삐라를 가지고 있다는 거 자체로도 처벌 대상이었다.[4] 다케나가 부대가 처한 사정상 엄청난 요구는 없었고 그냥 의례적인 투항한 부하들에 대한 안전 보장 정도였다.[5] 다케나가는 포로 심문에서 아다치 중장에 대해 매우 훌륭한 인격자라고 추켜세운 뒤, 전술적으로는 매우 무능하다며 극딜하기도 했다.[6] 오키나와 전투에서 좌관급 포로가 더 발생하긴 하지만 그건 6월 이후의 일이다. 다케나가는 태평양 전쟁에서 최초의 좌관급 일본군 포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