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23년 중국 베이징에서 신채호, 유자명, 이회영 등이 조직한 아나키스트 운동 단체.2. 다물단 기본 방침
일제로부터 독립을 획득하기 위하여 민족 자본주의를 고집하는 세력, 직접적인 무산혁명을 주장하면서 민족운동을 부인하는 세력, 세계의 혁명 계급으로서 민족해방을 주장하는 세력으로는 민족 대단결을 결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의 현재 입장에서 단결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독립을 쟁취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고 자본제도를 타파하여 민족 본위의 생활평등의 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1]다물단을 비롯하여 1920년대 중반경 만주지역 민족운동 계열의 일부가 지향하는 국가는 독재의 자본주의도 아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회주의도 아니었다.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이념이 구현된 국가였다.
3. 역사
1923년 중국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신채호(申采浩), 유자명(柳子明), 이회영(李會榮) 등이 조직한 다물단(多勿團)은 같은 해 상하이에서 배천택(裵天澤), 김동삼(金東三), 남형우(南亨佑), 한진산(韓震山) 등이 조직하여 베이징으로 옮겨온 국민당(國民黨)과 1924년 통합하였다. 명칭은 다물당(多勿黨)으로 하였고, 1925년 4월 베이징 마사묘(麻四廟)에서 조직 총회를 열었다. 단원은 50~60명이었다.1923년 1월, 의열단원 유자명이 신채호에게 단원들을 훈련하고 대외적으로 의열단의 존재를 내보이는데, 필요한 선언문을 써달라고 의뢰했다. 그 후 며칠 사이에 「조선혁명선언」이 탄생했다. 우당장과 동지들은 이를 받아 읽고는 감탄했다.
"역시 단재는 천재야! 명문 중의 명문인걸..."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 윤세주같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신흥학우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 투쟁 조직이었다. 이들의 의열 투쟁으로 세상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기에 발맞추어 다물단이 조직되었다. '다물'이란 말 자체가 '고토(故土)를 회복한다.'는 뜻이었다. 다물단의 선언문과 강령도 신채호의 작품으로 천하 명문이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의열단과 다물단은 그 인적 구성이나 투쟁방법, 주장하는 바가 모두 아나키즘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의열단과 다물단은 중앙 조직이 없었다. 모두가 일원으로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최근에 소개된 다물단 활동은 일면뿐이다 도 다른 몇몇 사람이 모여 다물정신을 받들고 행동에 나서면 그게 다물단이었다. 베이징의 다물단에는 심산 김창숙같은 유림 선비도 참여했고 우리 집에서는 남편 주명도 그 일원이었다. 특히 활동력이 강한 시숙부 이호영이나 시동생 이규준(이석영의 장남)도 다물단의 행동가였다. [3]
"역시 단재는 천재야! 명문 중의 명문인걸..."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 윤세주같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신흥학우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 투쟁 조직이었다. 이들의 의열 투쟁으로 세상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기에 발맞추어 다물단이 조직되었다. '다물'이란 말 자체가 '고토(故土)를 회복한다.'는 뜻이었다. 다물단의 선언문과 강령도 신채호의 작품으로 천하 명문이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의열단과 다물단은 그 인적 구성이나 투쟁방법, 주장하는 바가 모두 아나키즘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의열단과 다물단은 중앙 조직이 없었다. 모두가 일원으로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최근에 소개된 다물단 활동은 일면뿐이다 도 다른 몇몇 사람이 모여 다물정신을 받들고 행동에 나서면 그게 다물단이었다. 베이징의 다물단에는 심산 김창숙같은 유림 선비도 참여했고 우리 집에서는 남편 주명도 그 일원이었다. 특히 활동력이 강한 시숙부 이호영이나 시동생 이규준(이석영의 장남)도 다물단의 행동가였다. [3]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의 고구려 말인 다물은 용감(勇敢), 전진(前進), 쾌단(快斷) 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고, "입을 다문다."는 뜻도 있다. 즉, 불언실행(不言實行)[4]을 주지로 하여 밀정이라고 의심되는 사람을 처단하는 의열 투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4. 밀정 김달하 처단 사건
다물단의 대표적인 의열 투쟁은 베이징의 거물 친일파 밀정 김달하(金達河) 처단 사건이 있다. 국내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했던 김달하는 1916년부터 베이징에 살며 일제의 고급 밀정 노릇을 해왔다. 1922년부터는 김창숙(金昌淑)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1925년 3월 30일, 다물단원 이규학[5]과 이규준(李圭駿)[6]은 의열단(義烈團) 이인홍(李仁洪)과 이기환(李箕煥)[7]의 합동 작전으로 김달하를 처단하였다. 다물단은 김달하 처단 후 「악분자소탕선언(惡分子掃蕩宣言)」[8]을 국내 신문사에 우송하여 독립전쟁의 장애물이 되는 친일파를 처단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다물단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단원을 파견하였다.
| 서동일 선생의 묘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안장되어있다. 부인 최옥경(1950년 작고)과 함께 합장되어있기 때문에 묘비에는 먼저 작고한 부인 최옥경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
1925년 5월 서동일(徐東日)[9]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경상북도 일대에서 다물단의 선언서를 제시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다 10월경 체포되었다.
다물단의 활동은 만주와 국내에서 1920년대 후반까지 전개되고는 있으나, 1925년을 고비로 사실상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5. 단원
이회영 일가
- 이회영 : 이유승 대감의 4남
- 이석영 : 이유승 대감의 2남
- 이호영 : 이유승 대감의 6남
- 이규학 : 이회영 선생의 차남, 이종찬 광복회장의 부친.
- 이규준 : 이석영 선생 장남, 다물단 단장
국민당(영남파벌)
- 서동일 : 경북 출신 국민당, 군자금 모집
- 배천택 : 경북 출신 국민당
- 김동삼 : 경북 출신 국민당
- 남형우 : 경북 출신 국민당
- 한진산 : 경북 출신 국민당 한국광복군 제 5지대 선전부장 한형석의 부친이다.
- 유우국
- 김창숙 : 경북 성주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1925년), 서로군정서의 군사 선전 위원장, 1925년 8월 군자금조달
- 서왈보 : 함경북도 출신 비행사, 신채호를 단장인 대한독립청년단 군무장(軍務長) 전 의열단
- 김세준 : 박용만과 같이 행동
황해관 추천
- 이우민
- 최주영
그 외
6. 참고문헌
단행본『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한국독립운동사』 5(국사편찬위원회, 1969)
『한국독립운동사』 4(국사편찬위원회, 1968)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부, 1934)
이종찬, 나, 조계진, 한울, 2025
논문
박걸순, 「1920년대 북경의 한인 아나키즘운동과 의열투쟁」(『동양학』 54,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13)
박환, 「1920년대 중반 북경지역 다물단의 성립과 활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 33,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2002)
[1]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112쪽[2]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고경(高警) 제182호 다이쇼 15년 9월 30일 다물당에 대한 최근 정세에 관한 건」, 『정보』 1926, 655쪽[3] 이종찬, 나, 조계진, 한울, 2025, 301~302쪽[4] 말 없이 실행에 옮긴다[5] 이회영 선생의 차남[6] 이석영 선생 장남[7] 김원봉의 의열단계의 인물들로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에 따르면 이인홍과 이기환 둘 다 황포군관학교 4기이다.[8] 왜의 총독과 천황을 먼저 죽여야 하지만 조선인으로서 왜노의 혼을 가진 자를 먼저 소탕해야 한다."는 내용이다.[9] 서춘파(徐春波). 1923년 1월 중국 베이징에서 남형우, 배천택 등이 조직한 국민당(뒤에 다물단)에 가입하여 재정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국내에 파견되어 3회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3년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