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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1:48:45

루융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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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영상.jpg
중화민국 소환선무사
본명 노진하(盧振河)
정체 盧永祥
간체 卢永祥
한국식 독음 노영상
영문 Lu Yongxiang
자가(子嘉)
출생 1867년 10월 22일 청나라 산동성 제양현
사망 1933년 5월 15일 중화민국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천진무비학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주요 경력4. 참고문헌5.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안휘군벌의 주요 실력자로 절강성을 중심으로 한때 세력을 떨쳤으나 강절전쟁으로 몰락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67년 산동성 제양에서 태어났다. 1887년에 포귀경, 톈중위 등과 함께 산해관 무비학당에서 공부하다가 1890년에 군에 입대, 1895년에 천진무비학당에 들어가 졸업했으며 위안스카이의 신군 군관이 되었다. 1919년 북양 제3진 제5협통이 되어 청조에 대항한 여러 반란을 진압했다. 신해혁명 이후 육군 24사단장, 10사단장, 20사단장을 역임했으며 계축전쟁 진압에 참여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홍헌제제 때 1등 남작에 봉해졌다. 이후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가 운남에서 봉기하여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돤치루이안휘군벌에 소속되었다. 1915년 10사단장 겸 송호순열부사에 임명되었고 1917년 승진하여 송호순열사가 되었다.

2.2. 안직전쟁 ~ 회선 사건

1919년 송호지역 호군사 겸 제10사단장에 임명되어 육군상장으로 승진했다. 5.4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에 계엄령을 선포, 수업을 거부하는 대학생들을 퇴학시키며 강경히 진압했고 프랑스 조계지와 연합하여 전국학련, 상해학련을 탄압했다.

1920년 7월 절강독군에 임명되었고 12월에 송호순열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송호순열사를 맡았던 일 때문에 상하이가 속해있지 않은 절강독군이면서도 부유한 상하이를 계속 통치했으며 5.4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탄압했다. 1920년 안직전쟁으로 안휘군벌 정권이 물러난 이후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유일한 안휘군벌이었으며 독군폐지, 군대축소를 표방하며 연성자치론을 주장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동삼성순열사 장쭤린과 연대하여 직예군벌에 맞서 대항했으며 리위안훙 대총통이 직예군벌의 압력으로 하야한 이후 국회의원들에게 절강성으로 남하할 것을 촉구하며 헌법제정 운동을 전개했으며 직예군벌의 의원 선거 운동을 방해했다. 1923년 회선 사건 이후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중앙과 문서교류를 단절하여 치하의 회선을 거부한 국회의원을 규합하여 중국국민당, 봉천군벌과 연대하여 절강성을 반직세력의 중심지로 삼았다.

1922년 민군과 직예군벌의 공격으로 몰락한 복건독군 리허우지의 부하인 장치평과 양화소의 부대를 1924년에 받아들여 이들을 절강변방군 4사단 혼성여단으로 재편성하여 병력을 1만명이나 확충했다. 1922년 11월, 뤄원간 사건이 발생하자 차오쿤을 지지하였다.

2.3. 강절전쟁제노전쟁

1924년 강소독군 치셰위안과 복건독군 쑨촨팡의 공격으로 강절전쟁이 일어났고 절호연군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취임, 상하이 용화에 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분전했으나 패배하여 10월 13일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 얼마 후 펑위샹북경정변을 일으켜 차오쿤을 축출하자 10월 29일 심복인 허펑린과 함께 귀국하여 장쭤린으로부터 절호연군 총사령관직을 돌려받았다.

1924년 11월 24일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취임하자 12월 3일 직예군무독판에 임명되었으나 직예성을 확보하려는 장쭤린의 의도로 인하여 톈진회의에서 원래 기반인 절강성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응하여 1924년 12월 11일 소환선무사에 임명되어 봉천군벌 장쭝창과 함께 제노전쟁을 통해 치셰위안을 축출하고 1925년 1월 난징에서 선무군을 조직, 1월 16일에 강소군무선후사의에 임명되었다. 1925년 2월 선후회의가 개최되고 루융샹의 남하가 전란을 야기할지 모른다 하여 강소성에서 그의 취임에 반대하는 여론이 퍼지자 2월 27일 강소군무선후사의라는 직책을 영원히 폐지하자는 폐독 주장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 환영을 받았다. 이에 선후회의는 루융샹의 주장을 수용하여 전국적으로 폐독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었으나 돤치루이는 이를 묵살했다.

4월에 다시 강소독판에 임명되었고 강절전쟁에서 살아남은 부대를 수습하여 기반을 확보하려 했으나 군비도 병력도 장비도 턱없이 부족하여 사실상 봉군의 무력에 얹혀사는 처지가 되었다. 봉천군벌의 압력에 더 이상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루융샹은 8월 5일에 봉천군벌의 양위팅에게 강소독판을 물려주고 하야했다. 비슷한 시기 안휘독판 왕이탕(王揖唐)도 봉천군벌의 장덩쉬안에게 자리를 물러주고 하야했다.

2.4. 말년

1925년 손봉전쟁이 일어나자 톈진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은거하다가 1933년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주요 경력

절강성 역대 지방장관
2대 절강독군 3대 절강독군 1대 직예독리
양선덕 루융샹
(1920년 7월 ~ 1924년 10월 13일)
쑨촨팡
직예성 역대 지방장관
1대 직예독리 1대 직예독판 2대 직예독판
왕승빈 루융샹
(1924년 12월 3일 ~ 1924년 12월 11일)
리징린
강소성 역대 지방장관
독판 대행 1대 강소독판 2대 강소독판
한국균 루융샹
(1925년 1월 16일 ~ 1925년 8월 5일)
양위팅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