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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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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삼
金燦三
출생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군
사망 2003년 7월 2일 (향년 77세)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 / 학사)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 대학원 (지리학 / 석사 수료)
수훈 국민훈장 모란장 (2008년)

1. 개요2. 생애3. 김찬삼의 세계여행4. 여담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여행가, 교육자.

세계여행가로 유명하다. 교통이 열악했던 시기에 세계를 누비던 모험가였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실제로 만난적도 있다. [1]

2. 생애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생하였다.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숙명여고와 인천고 지리교사로 재직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원 지리학과를 수료했다. 그 후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강사-교수수도여자사범대학 지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은퇴 즈음에는 어린이용 TV 세계여행프로그램 해설도 했다. 그 외에 학교법인 동산학원 이사 및 이사장도 지냈다.

화객선[2]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오토바이를 타고 북미와 아프리카를 종횡하였다. 안 가본 데가 거의 없고 사진을 많이 남겼다.[3] 당시에는 냉전 시대고 국력도 형편없던 세계 최빈국 시절이라 비자가 안 나오는 곳도 많고 1,2차 여행 때엔 일부 공산국가에는 가지 못했는데, 나중에 80, 90년대에 갔다. 1992~93년까지 현대자동차써비스의 후원을 받아 현대 갤로퍼로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포함해 288일간 세계 여행을 했다. 당시 인도 등지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그 후유증을 겪다가 2003년 7월 2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2008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지금도 불안하다 하는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후진국의 당시 치안상태를 생각하면 목숨 걸고 다닌 지역도 많고, 실제로 속아서 따라갔다가 실랑이 끝에, 또는 격투하고 빠져나온 무용담도 나온다. 잘 데가 없어서 현지 경찰서를 찾아가 유치장에서 잔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맹수와 만나기도 했다. 노상강도를 만나 싹 털리고 구두 속에 숨겨 둔 필름만 건진 일도 있다. 내국인의 해외 여행이 금지이던 시절에 나갈수 있던 이유는 처음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알바해서 돈을 벌어 갔기 때문이다. 첫 여행을 시작한 50년대 말 당시, 한국의 국력은 전쟁 탓에 모든 게 사라지고 세계에서 가난하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최 빈국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일부 미 수교국과 공산권[4]을 제외한 거의 전 세계를 몸으로 때워가며, 재외 공관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거의 무전여행을 하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여행 중 굶기를 밥먹듯 하다 보니 먹을 게 있으면 사자나 호랑이처럼 한 번에 많이 먹고 또 한참을 버티기도 했다고 하며, 아프리카를 종횡단 두 번 했으면서도 큰 풍토병 걸리지 않고 무사하였으니, 생각하면 강철같은 체력을 가진 분이었다.

3. 김찬삼의 세계여행

일생의 명저인 여행기가 있다. 전 10권을 각 대륙/지역별로 나누었으며, 국배판 이상 대형 판형에 아트지 사진 인쇄, 두터운 하드커버 양장본이어서 가격도 비쌌다. 무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여행기이며, 원래는 "세계의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일간 신문에 연재하던 것을 모은 책이다. 1972년 삼중당에서 양장본으로 낸 이래 1981년 10권으로 완간했고, 1986년 한국출판공사에서 다시 냈다.

풍부한 사진, 거기에 종종 달리는, 현지의 문화, 역사, 사회에 관한 생생하고 심도있는 내용은 일반인 여행가들의 그저 슥 돌아보고 오는 기행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클럽 활동 인연을 이용해 처음 가본 곳의 현지인과 교류하기도 했다. 사실, 글씨가 작고 한자와 요즘 쓰지 않는 단어도 많으며 므흣한 내용이 조금 끼어 있어서 그렇지 (각국의 해수욕장풍경이라든지, 남태평양의 누드라든지, 아프리카의 나체족 마을 사진[5]이라든지, 정조대 특집이라든지), 몇 년 뒤에 출판된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보다 훨씬 나은 책.[6] 현재 시점에서 다시 읽어 보면 옛날 사람다운 서술도 보이고, 사실 관계가 틀린 데도 가끔 있다. 하지만 당시 정보로는 그 정도일 수밖에 없었고, 건너 들어 적은 일부 외 대부분 내용이 현지에서 듣고 보고 경험한 사실에 근거해 써 있다.

산업화로 많은 지역 문화와 자연 경관이 사라진 2020년대 현재에는 당시의 현지 문화와 경제 상황을 담담히 써 내려간 글과 수많은 천연색 사진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므로, 최초 연재부터 치면 70여 년, 출간부터 따져도 40년 이상 지난 현재에도 김찬삼 여행기의 가치는 퇴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 수급(자른 머리)을 말려 만드는 중남미의 장식품(싼싸: shrinked head, tzantza), 연기로 시신을 말리는 오세아니아 지역의 훈제 미라 등은 이미 사라진 문화이다. 특히 백인들은 잘 가지도 않는 여러 오지, 험지까지 가서 찍어온, 이미 사라진 경관을 보여주는 천연색 사진은 해당 각 나라에서도 요청할 만큼 귀중한 자료이다. 일단 그의 여행기에 나온 얘기, 사진들은 거의 다 한국 최초 소개이다.

내용이 워낙 좋고 재미있다 보니 70년대 신문 연재 당시에도 인기였고, 83년에 삼중당에서 대형 판본으로 나왔던 하드커버 컬러 양장본은 10권 한 질에 20만 원(2020년 환산 71만 원- 당시 대기업 대졸 신입 초봉이 25-30만원 정도였다)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당시 무려 1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90년대에 증보 개정판이 나왔으며 이후 절판. 21세기 이후 초판이든 개정판이든 중고도 보기 어렵고 15만원 이상 하며, 2008년부터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점차 디지털 파일 형태로 업로드되었으나 열람하려면 시간을 내서 국중도와 협약을 맺은 공공/대학도서관을 찾아가서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접속해야 한다. 수집 목적일 시엔 초판은 인쇄, 제본 기술이 안 좋을 때 나온 거라 구한다면 그나마 나은 개정판을 권한다.

4. 여담

그런데 21세기 이후 한비야빠니보틀 같은 이들이 여행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한비야의 글은 오류 투성이에 불법 탈법행위도 있으며, 대필 의혹도 있는 결점이 있고 빠니보틀은 2010년대 후반 유튜브 시장 활성화로 빛을 보고 TV 예능프로에서 유명해진 특별한 케이스이다. 반면 김찬삼의 여행기는 직접 겪은 사실인 정확한 정보와 쉽고 유려한 문장으로 그 격을 달리한다. 직접 찍은 귀중한 사진들, 90년대와 50~70년대의 대한민국 국격과 경제력, 정보력이라는 여행 환경 차이를 생각하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다만 2021년 이후 일부 기사에서 빠니보틀과 견주어서 재조명하기도 했다.#

5. 관련 문서



[1] 김찬삼의 세계여행 아프리카 편에 나온다.[2] 화물과 여객을 동시에 싣는 배. 카 페리도 일종의 화객선이다. 다만 당시의 국제 화객선은 화물선에 객실을 몇 개 마련해 둔 정도라, 여객 서비스가 형편 없었다.[3] 일부 직접 찍지 않은 사진도 실려 있었는데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임에도 그런 사진에는 꼭 "이 사진은 외국 잡지에서 옮겨 실었다"라는 캡션을 달기도 했다. 자신의 사진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인 듯[4] 왜 일부냐 하면, 내세우지는 않지만 실제로 공산주의국가로 분류되었거나 국교가 없는데도 우격다짐으로 국경에서 임시 여행 비자나 통과 비자를 받아서 들어간 나라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엔 공산국가를 허가 없이 방문했다가 국내 돌아오면 여지없이 간첩 취급, 안기부-감방행이었다. 한국 정보기관도 해외 정보가 어두워서 그냥 넘어가던 거였지, 정말 무모한 여행.[5] 촬영 금지인 나체 부족 사진으로, 현지인 남자들 성기가 그대로 사진에 나와 있다. 몰래 찍고 숨겨서 가져왔다고.[6] 먼나라 이웃나라는 어린이 대상 만화였고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지역 얘기라는 한계가 있다.[7] 공교롭게도 문화원 부지 근처가 조선시대 군사시설 영종진 터였는데, 1875년 운요호 사건 당시 일본군과 교전했던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