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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20 16:40:34

김장하

<colbgcolor=#000><colcolor=#fff> 김장하
金章河 | Kim Jang-ha
파일:김장하_경상대.jpg
출생 1944년 1월 16일[1] ([age(1944-01-16)]세)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장산리 노천마을[2]
본관 김해 김씨[3]
남성(南星)
학력 정동초등학교 (졸업)
동성중학교[4] (졸업)
경상대학교[5] (명예박사)[6]
가족 배우자, 슬하 4남매
경력 남성당한약방 대표
학교법인 남성학숙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진주신문 이사장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진주문화사랑모임 부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경상국립대학교 발전후원회장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영남대표
지리산생명연대 공동의장 겸 상임의장
진주오광대보존회 이사장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1. 개요2. 생애
2.1. 남성당한약방
3. 어록4. 이야깃거리5. 참고

1. 개요

침묵을 깬 김장하 선생이 불러온 거대한 파도! '어른 김장하' 명대사 모음.zip | 2023.01.11. 엠키타카 MKTK

대한민국기업인, 교육인, 시민활동가.

2. 생애

1944년 1월 16일 경상남도 사천군(현 사천시) 정동면 장산리 노천마을의 가난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다른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만 18세 때인 1962년에 약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전국 최연소로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하였다.[7] 1963년 사천군 용현면 석거리에 처음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인 1973년 진주시로 이전했다.

김장하는 한약방을 운영하여 벌어 들인 큰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으로 돌렸다. 일평생 동안 수많은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나눔을 실천해온 독지가였다. 진주 지역에서는 '김장하' 하면 후원 잘해주는 어른으로 통해서, 학비 지원이 필요한 가난한 학생이 있거나, 시민사회 운동에서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곧장 김장하 선생에게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하여, 이듬해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만든 일이다. 약 8년간 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학생 복지와 교직원 처우 측면에서 지역 최고 수준으로 지원하였다. 이후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 시설 건립을 완비한 뒤,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을 하여 공립학교로 전환시켰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는데, 지금까지 김장하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8]

그는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언론, 환경운동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조건없이 지원했다. 일찍이 진주를 기반으로 시작된 전국적 신분차별 철폐운동인 형평운동 연구에 관심을 기울여,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지원하였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9]의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다.[10] 국립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으며,[11]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사업도 계속하였다. 진주문화연구소와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문화사업 후원 및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외에도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고, 민족문제연구소를 후원하며 친일인명사전 제작과 진주 지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련 연구도 지원했다. 여성평등기금 조성을 통해 가정폭력 피해 여성 지원에도 힘썼으며, 호주제 폐지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여성 인권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는 은퇴를 앞둔 2021년에 재단을 해산한 뒤 남은 기금 34억 원[12]경상국립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다.
50년의 나눔, ‘시민의 스승’ 김장하 전 이사장 | 2022.06.16. KBS뉴스 경남

2019년 1월 김장하 본인도 몰랐던 생일잔치[13]에 진주 시민사회 각계각층 120명이 모였다. #

2022년 5월, 은퇴 후 아내와 4남매, 손주들과 함께 지내며, 등산을 즐기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돌아갔다.

2.1. 남성당한약방

1963년 사천시 용현면 신기리에서 처음 개원하였고, 1973년에는 진주시 장대동으로, 1977년에는 동성동으로 이전한 후, 2022년까지 운영되었다. 진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매출이 상당히 높은 한약방으로 소문난 곳이어서, 이곳에서 벌어들인 돈이 지역 사회 후원의 원동력이 되었다.

약값이 저렴한데도 불구하고, 품질 좋은 약재를 쓰고, 약의 효험도 좋다는 입소문이 나서, 연일 전국에서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새벽부터 대기 번호를 나눠 줘야 할 만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14] 얼마나 손님이 많았는지, 몰려드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노점들이 생길 정도였고, 심지어 기다리다 지친 이들이 근처에 있는 다른 한약방에 가서 약을 짓기도 해서 경쟁 가게들이 덕을 보았다고 한다.

2022년 5월 말, 김장하가 은퇴하면서 약 60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한약방 건물은 진주시에서 매입하여 복합문화공간 '진주 남성당교육관'으로 보존하기로 결정했으며, 2025년 10월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 김장하는 처음에는 자신을 기념하는 시설을 만들까 봐 거절했지만, 건물 2~3층은 일제강점기 진주의 형평운동과 소년운동을 교육하는 공간, 1층은 한약방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조성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허락했다고 한다.

3. 어록

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15]
나에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닌 이 사회에 갚아라.[16]

4. 이야깃거리

5. 참고


[1] [단디뉴스] 진주사람들 김장하 원장 생일날 모여 한목소리 “선생님 고맙습니다”[2] #[3] 동정공파 24세손 하(河) 항렬. #[4]사천여자중학교[5] 現 경상국립대학교[6] #[7] 설마 미성년자가 시험에 붙을 줄 그 누구도 상상도 못했기에 미성년자에게 자격증을 발급하는 절차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장하는 시험 합격 후 이듬해 1월 16일, 만 19세 생일이 되는 날에 자격증을 발급 받았다. 특히 이 시험은 해방 이후에 치러진 첫 시험이었는데, 이 다음 시험은 무려 13년 후인 1975년에 있었고, 지원 자격도 고등학교 졸업자로 강화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장하는 당시 시험에 합격하여 한약업에 종사하게 된 것도 운명이었다고 술회하였다.[8] 장학생 중 유명인으로는 문형배헌법재판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9] '옛'을 붙이는 이유는 폐간했기 때문이다. 현재 있는 진주신문은 이름만 같은 다른 언론사다.[10] 1억 5000만 원의 기금으로 '진주가을문예'를 신설해 매년 시와 소설 부분 수상자를 선정해 1500만 원의 고료를 지원하여 27회 수상자를 배출했다.[11] 경상대학교가 명예박사 학위를 주려하자 수차례 고사하다 개교 60주년을 맞은 2008년 대학측과 지역사회 인사들이 다시 설득에 나서자 마지못해 학위를 받았다.[12] 서경방송 주식 2만 주(평가액 28억 원) 포함[13] 김장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몰래 깜짝 생일 잔치를 계획했던 것.[14] 한창 때는 약방의 직원이 약 20명 가까이 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는데, 직원들의 월급도 다른 약방의 2~3배였을 정도로 처우가 좋았다고 한다.[15] #[16] #[17] 평생 그가 응한 인터뷰라고는 단 한번인데, 그게 바로 본인이 세운 명신고의 교지 창간호에 실린 학생기자들의 인터뷰다. 그러니까 정식 언론의 취재에 응한 적은 정말 없는 게 맞다. 여러 언론에서 수십 차례 그와 인터뷰하려고 했지만 그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MBC경남의 김현지 PD도 2년 전 촬영을 시도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고.[18] 김주완 기자 유튜브 채널[19] 원래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기자 초년생 시절인 1991년이라고 한다.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기부채납하는 모습을 보고 '큰 부자가 좋은 일 하네' 정도로만 생각하고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었다고. 이때 자동차가 없는 부자라는 말을 듣고 감명받아 본인도 차를 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99년 경남도민일보 창간 때 시민주주 요청을 했을 때도 진주신문 하나로 버겁다며 정중히 거절, 2013년 피플파워(경남도민일보 자매지인 월간지) 인터뷰도 거절당했다.[20] 퇴짜만 맞았을 뿐 별다른 인연이 없었는데도 김장하를 기자생활 내내 지표로 삼았다고 한다. 유혹이 일 때마다 ‘김장하 선생이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며 삼갔다고. #[21] 당시는 사학비리가 매우 횡행하던 시대여서, 재단을 소유한 집안끼리 학교의 각종 이권을 해먹는 일은 예사였고, 사립학교에 교사로 채용되려고 막대한 뇌물을 재단에 갖다바치는 일도 흔했으며, 각종 교직원 채용 청탁도 일상적이었다.[22] 1990년 무크지에 기고를 하고 원고료를 받았는데 그걸 지원한 사람이 김장하였던 것.[23] 2002년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 소속 한 정치인이 진주시장 후보로 나가야되니 선거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하러 오자, 자상한 목소리로 정치인이나 선거에는 지원하지 않으니 이해해달라며 타일렀다고 한다.[24] 어느 학생이 전국일주를 하고 싶으니 여행경비를 지원해달라고 찾아오자 거절한 일이 있으며, 이탈리안 레스토랑 창업 자금을 부탁하려고 찾아왔던 명신고 졸업생에게도 정중히 거절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그 젊은이는 거절을 하면서도 본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며 격려해 주는 김장하의 태도에 큰 깨달음을 얻어서 본인이 창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통해 요리 봉사와 기부를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25] 천석꾼 집에서 태어났으나 백정 인권을 위해 전 재산과 온몸을 바치고 말년에는 묏자리를 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장례 때는 전국의 축산업 협동조합 조합원 수천 명이 진주에 모여 함께 추모했다.[26] 이 에피소드가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와 <줬으면 그만이지> 책에 잘 소개되어 있다.[27] 정확히는 한 사람만 빼고 모두 고용을 승계하는 조건이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 한 사람이 학교 재단의 서무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장하의 친동생(김기하)이었다고. 일부러 동생은 사표를 쓰게 시켰다고 한다.[28] 사실 경남 지역에 이런 연유로 롯데에서 NC로 갈아탄 팬들이 꽤 많다. 한국프로야구에 광역 연고제가 적용됐던 1999년까지 경남은 롯데의 연고지역이었고 도시 연고제 도입으로 롯데의 연고지가 부산으로 국한된 이후에도 2010년까지 마산 야구장이 롯데의 제2 홈구장으로 지정돼 홈경기가 열렸기에 경남의 야구팬들도 당연히 롯데를 응원했다. 그러나 2011년 NC가 창원 연고팀으로 정식 창단되고 롯데가 구단 운영의 후진성을 개선하지 않자 다수의 경남 팬들이 NC로 갈아탔다.[29] 타 권역 MBC 지방국들이 채널을 1개 갖고 있는 것과 다르게 MBC경남은 뉴스는 엠뉴, 시사교양은 엠키타카, MBC경남 뮤직 등으로 유튜브 채널을 세분화해 운영중이다.[30] 이재명, 김장하 만나 "문형배랑 꽤 가까운 친구…좋은 제자 두셨다"[31] 이날 차담에 참석한 사람 중 안귀령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도 있었는데 일행 중 한명이 안 대변인이 12·3 내란 당시 국회의사당본관 앞에서 계엄군의 총을 붙잡고 저지한 얘기를 김장하 선생에게 전하자 김 선생이 이례적으로 정당인에게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