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0><colcolor=#fff> 김장하 金章河 | Kim Jang-h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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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44년 1월 16일[1] ([age(1944-01-16)]세) |
|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장산리 노천마을[2] | |
| 본관 | 김해 김씨[3] |
| 호 | 남성(南星) |
| 학력 | 정동초등학교 (졸업) 동성중학교[4] (졸업) 경상대학교[5] (명예박사)[6] |
| 가족 | 배우자, 슬하 4남매 |
| 경력 | 남성당한약방 대표 학교법인 남성학숙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진주신문 이사장 진주환경운동연합 고문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진주문화사랑모임 부회장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경상국립대학교 발전후원회장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영남대표 지리산생명연대 공동의장 겸 상임의장 진주오광대보존회 이사장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
1. 개요
| 침묵을 깬 김장하 선생이 불러온 거대한 파도! '어른 김장하' 명대사 모음.zip | 2023.01.11. 엠키타카 MKTK |
대한민국의 기업인, 교육인, 시민활동가.
2. 생애
1944년 1월 16일 경상남도 사천군(현 사천시) 정동면 장산리 노천마을의 가난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다른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만 18세 때인 1962년에 약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전국 최연소로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하였다.[7] 1963년 사천군 용현면 석거리에 처음 한약방을 개업했고, 10년 뒤인 1973년 진주시로 이전했다.
김장하는 한약방을 운영하여 벌어 들인 큰 돈을 개인을 위해 쓰지 않고, 지역사회를 위한 지원으로 돌렸다. 일평생 동안 수많은 사회운동과 자선사업을 하며 나눔을 실천해온 독지가였다. 진주 지역에서는 '김장하' 하면 후원 잘해주는 어른으로 통해서, 학비 지원이 필요한 가난한 학생이 있거나, 시민사회 운동에서 돈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곧장 김장하 선생에게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3년 학교법인 남성학숙을 설립하여, 이듬해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만든 일이다. 약 8년간 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학생 복지와 교직원 처우 측면에서 지역 최고 수준으로 지원하였다. 이후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 시설 건립을 완비한 뒤, 1991년 국가에 기부채납을 하여 공립학교로 전환시켰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는데, 지금까지 김장하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1000명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8]
그는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예술, 역사, 여성, 인권, 언론, 환경운동 등 지역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조건없이 지원했다. 일찍이 진주를 기반으로 시작된 전국적 신분차별 철폐운동인 형평운동 연구에 관심을 기울여,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지원하였다. 1990년대 시민주로 창간했던 옛 <진주신문>[9]의 주주·이사로 참여했고, 1995년부터 27년간 '진주가을문예'를 지원했다.[10] 국립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으며,[11]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사업도 계속하였다. 진주문화연구소와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문화사업 후원 및 장학사업도 꾸준히 진행하는 등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외에도 지금은 진주를 대표하는 지역서점이 된 진주문고가 어려웠던 시기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두 차례나 큰 도움을 주었고, 민족문제연구소를 후원하며 친일인명사전 제작과 진주 지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련 연구도 지원했다. 여성평등기금 조성을 통해 가정폭력 피해 여성 지원에도 힘썼으며, 호주제 폐지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여성 인권 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극단 '현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을 때도, 진주여성민우회가 창립될 때도 김장하의 도움이 있었다. 남명학, 진주오광대, 진주솟대놀이가 재조명되는 데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던 김장하는 은퇴를 앞둔 2021년에 재단을 해산한 뒤 남은 기금 34억 원[12]을 경상국립대학교 발전기금재단에 기탁하며 사회에 환원하였다.
| 50년의 나눔, ‘시민의 스승’ 김장하 전 이사장 | 2022.06.16. KBS뉴스 경남 |
2019년 1월 김장하 본인도 몰랐던 생일잔치[13]에 진주 시민사회 각계각층 120명이 모였다. #
2022년 5월, 은퇴 후 아내와 4남매, 손주들과 함께 지내며, 등산을 즐기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돌아갔다.
2.1. 남성당한약방
1963년 사천시 용현면 신기리에서 처음 개원하였고, 1973년에는 진주시 장대동으로, 1977년에는 동성동으로 이전한 후, 2022년까지 운영되었다. 진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매출이 상당히 높은 한약방으로 소문난 곳이어서, 이곳에서 벌어들인 돈이 지역 사회 후원의 원동력이 되었다.약값이 저렴한데도 불구하고, 품질 좋은 약재를 쓰고, 약의 효험도 좋다는 입소문이 나서, 연일 전국에서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새벽부터 대기 번호를 나눠 줘야 할 만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14] 얼마나 손님이 많았는지, 몰려드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노점들이 생길 정도였고, 심지어 기다리다 지친 이들이 근처에 있는 다른 한약방에 가서 약을 짓기도 해서 경쟁 가게들이 덕을 보았다고 한다.
2022년 5월 말, 김장하가 은퇴하면서 약 60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한약방 건물은 진주시에서 매입하여 복합문화공간 '진주 남성당교육관'으로 보존하기로 결정했으며, 2025년 10월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 김장하는 처음에는 자신을 기념하는 시설을 만들까 봐 거절했지만, 건물 2~3층은 일제강점기 진주의 형평운동과 소년운동을 교육하는 공간, 1층은 한약방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조성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허락했다고 한다.
3. 어록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15] |
나에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닌 이 사회에 갚아라.[16] |
4. 이야깃거리
- 그의 호인 남성(南星)은 유학자이셨던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 김장하 선생은 '남성(=남두육성, 南斗六星)은 목숨(壽)을 맡은 별이라고, 남성이 비치는 곳에서는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약방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다들 오래 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 독서광이다. 한약방에서 업무를 볼 때도, 늘 책을 옆에 두고 시간 날때마다 읽었다고 한다. 본인이 중학교만 졸업한 후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평생 독서를 통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 일도 주저하지 않아서, 1990년대에 이미 컴퓨터를 한약방에 들였고, 직접 컴퓨터 학원도 다녔다고 한다. 2000년대에는 책을 사서 포토샵을 공부하기도 했다고.
- 많은 후원을 하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으로 유명하다. 셀 수 없이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지만, 장학생 명단을 따로 공개하지도 않았고, 장학생 초대 행사를 열지도 않았으며, 누군가 도와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식으로 물으면 아예 입을 닫아버리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만 일관했다. 장학생들의 모임을 결성하는 일도 반대했다. 특히 그는 돈을 주면서도 어떤 간섭이나 주문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누구를 돕게 되어도 보도자료 등을 일체 내지 않았으며, 여러 후원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되었을 때도 주목받는 자리를 사양하고, 늘 가장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 무엇보다 언론사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17]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18]가 그를 소개하기 전까지 진주 지역 바깥에서는 그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19] 김주완 기자가 2015년에 포털사이트 다음의 뉴스펀딩을 통해 채현국, 방동규, 김장하 등을 조명하는 글을 연재하면서 적지 않은 반향이 일었고, 이후 이 연재글들이 <별난 사람 별난 인생>이라는 책으로 엮여 나왔다. 김장하를 다룬 부분은 이 책의 한 챕터였다. 이 책에서 '그분의 삶을 제대로 기록하여 그의 삶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울림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다짐을 썼던 김 기자는[20] 이후 그 결심을 지켜 7년 넘게 꾸준히 김장하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취재를 하였고, 결국 김장하 선생을 본격적으로 다룬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이 출판되었으며, 동시에 MBC경남의 김현지 PD와의 협업을 통해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도 함께 완성되었다. 제작 뒷이야기 김주완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사람의 숫자만 대략 10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김 기자는 취재 과정 중에 김장하와 함께 산을 오르거나 모임에 참석하면서 곁에서 그를 바라봤고, 카메라도 없이 갔다가 핸드폰으로 부랴부랴 촬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 #2, #3, #4
- 그가 왜 학교를 설립했고, 왜 헌납했는지는 1991년 8월 그의 명신고등학교 이사장 퇴임사를 보면 알 수 있다."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 명신고등학교를 건립할 때, 진주시와 인근 지역의 젊고 실력있는 교사들을 스카우트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교사를 채용할 때 세가지 조건을 걸었다고 하는데, 그 원칙이 '친척은 한 사람도 안 쓰겠다', '돈을 받고 한 사람도 채용하지 않겠다', '권력에 굽히지 않겠다'였다.[21] 결국 이 원칙이 학교를 경영하는 내내 지켜졌다. 심지어 어느 교사를 채용하고 난 후, 지역의 국회의원으로부터 "아는 사람이 명신고에 가게 되었으니, 확실하게 잘 해달라"라는 말을 듣게 되자, 곧바로 해당 교사의 채용을 취소시킨 일도 있을 정도였다. 이후 난리가 나서, 교육부에서 보복성 감사가 내려오고, 학교를 이잡듯이 잡았던 일까지 벌어졌는데, 결국 감사에서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게 되자, 학교 특정 부서의 인력 규모가 규정보다 부족하다는 작은 트집을 잡는 수준에서 끝났다고 한다.
- 학교의 이사장으로서 학생과 교직원의 복지는 최고 수준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좋은 학습 환경을 위해 교실의 조명 설비까지도 신경 썼으며, 별도의 인쇄 시설까지 학교에 설치해 놓고, 구하기 힘든 각종 문제집과 참고서에서 발췌한 다양한 학습 자료들을 품질 좋은 고급 종이에 대량으로 복사 및 인쇄를 하여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나눠 주게 했다. 심지어 학생들의 보충수업비까지 대신 내어 줬다고.
-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후인 1992년, 김장하가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자로 선정되었을 때도 "약방을 비울 수 없다"라며 훈장 전수식 참석을 거절하여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관선 경남교육감이 "내 목이 달아난다"고 사정사정한 뒤에야 겨우 참석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통해 대중에 널리 알려진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도 김장하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친 '김장하 장학생'이었다. 문 재판관은 2019년 본인의 인사청문회에서도 김장하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낸 바 있다. # 문 재판관은 <줬으면 그만이지> 책이 발간되었을 때도 본인의 블로그에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며 독후감을 포스팅하였다. #, @
-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을 돕다보니 도움받은 사람들이 자신들끼리 서로 모르는 채로 만나서 인연을 맺기도 했다. 특히 신기한 사례가 김장하가 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을 할 때 함께 일했고 가정폭력 피해 여성 쉼터를 운영한 정행길 소장. 그녀의 남편 강춘성 전 경남도의원은 옛 진주신문에서 필진을 맡았었는데 알다시피 김장하가 후원한 신문이고, 이 부부의 사위는 권재열 충남대 의대 교수인데 알고보니 김장하 장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를 취재해 세상에 알린 김주완 기자 본인 역시 간접적으로 김장하의 도움을 받은 적 있으며, 이를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22]
-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활동을 이어왔지만 언론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고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5년 첫 민선 진주시장 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압도적으로 그를 진주시장 시민후보로 추대했는데, 그는 후보를 제안하러 오는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해 버리기도 하는 등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며 주변에서 경상남도문화상이나 진주시문화상, 경남교육대상을 추천하려고 해도 못하게 하거나 '본인이 싫다는데 왜 하려고 하느냐'라며 극구 사양했다는 일화가 있다.
- 평생 많은 기부를 했지만 돈을 빌려주는데도 나름의 원칙이 있어서 도움을 거절한 사례도 있다. 정치인 선거자금은 절대 지원해주지 않으며,[23] 개인적인 사업자금이나 경비 같은 것도 안 준다고 한다.[24]
-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와 관련하여 민족문제연구소를 오랫동안 후원해 왔는데, 이 때문에 일부 극우 세력의 색깔론 공격을 받기도 했다. <어른 김장하> 다큐를 보면, 어떤 극우 성향의 사람이 김장하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김 선생과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난하면서, "빨갱이 짓 하고 다니지 말라"며 궤변을 늘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상대방이 쌍욕을 섞어가며 그렇게 비난하는데도, 김 선생은 "나를 자세히 모르고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라면서 담담한 말투로 대응하기만 했다.
- 형평운동에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강상호[25]가 서거한 뒤, 40년이 다 되도록 아무 흔적도 없이 버려졌던 그의 묘소를 재정비하고, 표지판과 비석을 만들어 세우는 일도 했다. 이 일에서도 역시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묘소의 비석 앞면에는 '백촌강상호지묘', 뒷면에는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작은 시민이"라고만 적혀 있는데, 김주완 기자가 취재를 통해 그 '익명의 작은 시민'이 바로 '김장하'였음을 밝혀냈다.[26]
- 평생 자가용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다. 명신고등학교 이사장으로 근무할 때도, 늘 학교에 자전거나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고 한다. 집도 따로 없이, 한약방 건물 3층을 집으로 사용했으며, 해외여행도 다닌 적이 없는데, 여행이라고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한 것이 전부라고 알려져 있다. 이 역시 6.25 전쟁 때 전사했다고 알고 있었던 친형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 2022년에 은퇴를 하여 한약방 문을 닫고 나서야, 평생 고생한 아내를 위해 30평대 아파트로 이사했다.
-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 유세중이던 노무현 후보가 김장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습적으로 한약방을 찾아가 만남을 가졌다. 이미 김장하에 대해 알고 있던 보좌관들이 사전 요청을 할 경우 무조건 거절한다는 걸 알아서 그냥 통보 없이 들어가서 만났던 것. 김장하는 노무현 후보가 갑작스럽게 찾아왔을 때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다른 손님들을 대할 때처럼 다방 커피를 마시며 환담했다고 한다. 노무현 후보는 만남이 끝난 뒤 김장하와의 면담을 주선한 김성진 당시 보좌관에게 "성진 씨, 정말 좋은 사람 만났다. 정치인을 만나 훈수 두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다." 라며 기뻐했다고. 이후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간담회에 김장하를 초청했는데 역시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훗날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한 뒤 봉하마을에 조성된 묘역에 박석을 남겼다. 문구는 '희망과 소신으로 이루고자 하신 일, 가슴에 새겨둡니다. 김장하 두손 모음'. #1, #2
- 명신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있던 1980년대 말, 전국적인 전교조 해직사태가 터졌을 때도,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교사도 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학교를 국가에 헌납할 때도, 모든 교직원을 그대로 고용 승계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고 한다.[27]
- 야구팬이다. 야구선수 故 최동원의 팬으로서, 과거 경남까지 연고권이 유효했던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했으나, NC 다이노스가 창원을 연고로 새롭게 창단하자 NC의 팬이 됐다고 한다.[28] #
- 다큐가 방영된 뒤 배주현 창원시 야구소프트볼협회 이사는 "이런 분이 NC 팬인 것이 코리안시리즈 우승보다 더 뿌듯하다"고 말했고, NC는 선수단의 사인이 담긴 유니폼을 전달하기도 했다. #
- 2025년 5월, 그의 제자 중 하나인 문형배 재판관이 퇴임 이후 김장하 선생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영상이 공개됐는데, 롯데 자이언츠의 오랜 팬인 문형배 전 재판관이 "저는 야구팀을 바꾸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최동원을 좋아했으면 계속 좋아해야지, 중간에 갈아 타시면 어떡합니까?" 라고 농담을 하자, 김장하 선생은 "자꾸 져봐. 그런 생각이 생기지." 라고 짧고 굵직하게 받아쳤다(...)
- 제5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MBC경남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교양부분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Wavve 오리지널 국가수사본부 등의 대형 화제작들을 꺾은 것이었는데, 백상예술대상에서 지역 지상파 방송국의 작품이 수상한 일은 <어른 김장하>가 최초였다고 한다. #
- 2022년 연말 MBC경남 유튜브와 TV를 통해 동시공개된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뒤 호평이 이어지자, 설 연휴 전국방송을 통해 해당 프로그램이 재방영되었다. 다큐를 만든 김현지 감독은 그를 "살아 움직이는 사회보장제도"라고 표현했다.
- 2025년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일에 문형배 헌법재판관(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결정문을 읽은 후 그에 대한 에피소드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어린 시절 문형배를 도와준 김장하 선생에 대한 그의 추억과 미담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탄핵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던 2024년 연말에도 짧게 안부전화를 했는데, '단디해라'라는 간단한 말을 전했다고 한다. # 문형배 재판관의 퇴임 이후인 5월 2일, 김장하 선생과 문 전 재판관이 다른 김장하 장학생들과 함께 오랜만에 만남을 가졌다.#1, #2
-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이후 문형배 재판관과의 인연이 널리 알려지면서 김장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자,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례적으로 극장에서 재개봉을 했고, 넷플릭스, 웨이브 등에서 서비스 중이던 <어른 김장하> TV 방영분도 역주행을 하여 국내 시청 순위 상위권에 들었으며, 김장하 선생을 다룬 책인 <줬으면 그만이지>도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올랐다.
5. 참고
[1] [단디뉴스] 진주사람들 김장하 원장 생일날 모여 한목소리 “선생님 고맙습니다”[2] #[3] 동정공파 24세손 하(河) 항렬. #[4] 現 사천여자중학교[5] 現 경상국립대학교[6] #[7] 설마 미성년자가 시험에 붙을 줄 그 누구도 상상도 못했기에 미성년자에게 자격증을 발급하는 절차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장하는 시험 합격 후 이듬해 1월 16일, 만 19세 생일이 되는 날에 자격증을 발급 받았다. 특히 이 시험은 해방 이후에 치러진 첫 시험이었는데, 이 다음 시험은 무려 13년 후인 1975년에 있었고, 지원 자격도 고등학교 졸업자로 강화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장하는 당시 시험에 합격하여 한약업에 종사하게 된 것도 운명이었다고 술회하였다.[8] 장학생 중 유명인으로는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9] '옛'을 붙이는 이유는 폐간했기 때문이다. 현재 있는 진주신문은 이름만 같은 다른 언론사다.[10] 1억 5000만 원의 기금으로 '진주가을문예'를 신설해 매년 시와 소설 부분 수상자를 선정해 1500만 원의 고료를 지원하여 27회 수상자를 배출했다.[11] 경상대학교가 명예박사 학위를 주려하자 수차례 고사하다 개교 60주년을 맞은 2008년 대학측과 지역사회 인사들이 다시 설득에 나서자 마지못해 학위를 받았다.[12] 서경방송 주식 2만 주(평가액 28억 원) 포함[13] 김장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몰래 깜짝 생일 잔치를 계획했던 것.[14] 한창 때는 약방의 직원이 약 20명 가까이 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는데, 직원들의 월급도 다른 약방의 2~3배였을 정도로 처우가 좋았다고 한다.[15] #[16] #[17] 평생 그가 응한 인터뷰라고는 단 한번인데, 그게 바로 본인이 세운 명신고의 교지 창간호에 실린 학생기자들의 인터뷰다. 그러니까 정식 언론의 취재에 응한 적은 정말 없는 게 맞다. 여러 언론에서 수십 차례 그와 인터뷰하려고 했지만 그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MBC경남의 김현지 PD도 2년 전 촬영을 시도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고.[18] 김주완 기자 유튜브 채널[19] 원래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기자 초년생 시절인 1991년이라고 한다.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기부채납하는 모습을 보고 '큰 부자가 좋은 일 하네' 정도로만 생각하고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었다고. 이때 자동차가 없는 부자라는 말을 듣고 감명받아 본인도 차를 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99년 경남도민일보 창간 때 시민주주 요청을 했을 때도 진주신문 하나로 버겁다며 정중히 거절, 2013년 피플파워(경남도민일보 자매지인 월간지) 인터뷰도 거절당했다.[20] 퇴짜만 맞았을 뿐 별다른 인연이 없었는데도 김장하를 기자생활 내내 지표로 삼았다고 한다. 유혹이 일 때마다 ‘김장하 선생이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며 삼갔다고. #[21] 당시는 사학비리가 매우 횡행하던 시대여서, 재단을 소유한 집안끼리 학교의 각종 이권을 해먹는 일은 예사였고, 사립학교에 교사로 채용되려고 막대한 뇌물을 재단에 갖다바치는 일도 흔했으며, 각종 교직원 채용 청탁도 일상적이었다.[22] 1990년 무크지에 기고를 하고 원고료를 받았는데 그걸 지원한 사람이 김장하였던 것.[23] 2002년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 소속 한 정치인이 진주시장 후보로 나가야되니 선거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하러 오자, 자상한 목소리로 정치인이나 선거에는 지원하지 않으니 이해해달라며 타일렀다고 한다.[24] 어느 학생이 전국일주를 하고 싶으니 여행경비를 지원해달라고 찾아오자 거절한 일이 있으며, 이탈리안 레스토랑 창업 자금을 부탁하려고 찾아왔던 명신고 졸업생에게도 정중히 거절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그 젊은이는 거절을 하면서도 본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며 격려해 주는 김장하의 태도에 큰 깨달음을 얻어서 본인이 창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통해 요리 봉사와 기부를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25] 천석꾼 집에서 태어났으나 백정 인권을 위해 전 재산과 온몸을 바치고 말년에는 묏자리를 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장례 때는 전국의 축산업 협동조합 조합원 수천 명이 진주에 모여 함께 추모했다.[26] 이 에피소드가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와 <줬으면 그만이지> 책에 잘 소개되어 있다.[27] 정확히는 한 사람만 빼고 모두 고용을 승계하는 조건이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 한 사람이 학교 재단의 서무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장하의 친동생(김기하)이었다고. 일부러 동생은 사표를 쓰게 시켰다고 한다.[28] 사실 경남 지역에 이런 연유로 롯데에서 NC로 갈아탄 팬들이 꽤 많다. 한국프로야구에 광역 연고제가 적용됐던 1999년까지 경남은 롯데의 연고지역이었고 도시 연고제 도입으로 롯데의 연고지가 부산으로 국한된 이후에도 2010년까지 마산 야구장이 롯데의 제2 홈구장으로 지정돼 홈경기가 열렸기에 경남의 야구팬들도 당연히 롯데를 응원했다. 그러나 2011년 NC가 창원 연고팀으로 정식 창단되고 롯데가 구단 운영의 후진성을 개선하지 않자 다수의 경남 팬들이 NC로 갈아탔다.[29] 타 권역 MBC 지방국들이 채널을 1개 갖고 있는 것과 다르게 MBC경남은 뉴스는 엠뉴, 시사교양은 엠키타카, MBC경남 뮤직 등으로 유튜브 채널을 세분화해 운영중이다.[30] 이재명, 김장하 만나 "문형배랑 꽤 가까운 친구…좋은 제자 두셨다"[31] 이날 차담에 참석한 사람 중 안귀령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도 있었는데 일행 중 한명이 안 대변인이 12·3 내란 당시 국회의사당본관 앞에서 계엄군의 총을 붙잡고 저지한 얘기를 김장하 선생에게 전하자 김 선생이 이례적으로 정당인에게 박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