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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19:25:51

김인섭(법조인)

김인섭
金仁燮 | Kim Insub
파일:kiminsub.jpg
<colbgcolor=#007899><colcolor=#fff> 출생 1936년
충청북도 영동군
학력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직업 법조인
소속 법무법인 태평양
종교 개신교(장로회)[1]
가족 배우자, 슬하 1남 3녀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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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변호사. 법무법인 태평양의 설립자.

2. 생애

1936년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서당에서 천자문을 두 달 만에 독파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명문 대전중학교에 응시해 합격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소문났다.

6.25 전쟁 기간 동안 추풍령중학교에 편입해 졸업한 뒤 충북 영동고등학교(3회)에 진학했다. 2학년 때 그를 눈여겨본 선생님들의 권유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러나 정작 교장 선생님은 그가 3학년을 마치지 않아 졸업증명서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교장 선생님 집 앞에서 기다린 끝에 등록 마지막 날에야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2]

1955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한 후 곧바로 군에 들어가 복무를 마친 뒤 가정교사를 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민복기 대법원장 딸을 가르치면서 민 대법원장과 친아버지 같은 인연을 맺었다.

대학 4학년이던 1961년 7월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 2차 시험에 응시했으나, 과락으로 고배를 마셨다. 재학 중 합격을 목표로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나 했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 법무장교를 많이 필요로 하면서 그해 12월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가 갑작스럽게 치러진 덕분에 재학 중에 합격할 수 있었다.[3]

1962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을 제1기로 수료한 뒤,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4] 1972년에는 서울고등법원 판사가 되었고, 1974년에는 대법원 재판연구관, 1977년에는 사법연수원 교수, 1979년에는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80년 서울지방법원 민사12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는 등 법원에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1967년 7월 '제3차 민비연 사건'이 터졌을 때, 김중태, 이종률, 박범진, 현승일, 김도현[5] 등 민비연 학생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려 주목을 받았다. 민비연 사건이란, 1960년대 중반 서울대 문리대 학생동아리 '민비연(민족주의비교연구회)'의 핵심 회원들이 불온 사상의 영향을 받아 학생 데모를 배후 조종하고 정부 타도를 기도했다며 중앙정보부가 그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운 사건이다.[6]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김인섭을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집 앞까지 찾아와 재판을 앞두고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억울한 누명을 쓴 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 외에도 판사 시절 직언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법원행정처장직을 대법관 중 한 명이 겸임하도록 한 것은 그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행정부처 출신이 법원행정처장을 맡고 있었는데, 행정부처 출신 행정처장이 공사 수주에 개입하고, 재판부에 압력성 청탁을 넣는다는 소문이 돌아 판사들의 원성이 높았다. 결국 그가 민복기 대법원장을 찾아가 직언을 한 이후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명예퇴직을 하게 됐고, 대신 서일교 변호사가 1977년 2월 법원행정처장으로 임용됐다. 1981년 김용철 대법관 이후로는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직을 겸임하게 되었다.[7]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득세하자 판사의 역할에 회의를 느껴 법복을 벗었다. 판사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어 대법관이 될 것이라고 점쳐지던 그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모든 사람이 말렸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국회에 출석해 그의 사직 이유를 국회의원들에게 설명해야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변호사로 개업한 지 6년 만인 1986년에 법무법인 태평양을 설립했다. 점차 다원화되는 사회 상황에서 소송 중심의 한정된 활동영역을 넘어서, 사업계획에서 계약체결 단계까지 모든 법적 자문을 할 수 있는 전문화된 국제 로펌을 설립하고자 했던 것.

법무법인 태평양 개소식에서 구성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첫째는 로펌이 영원히 존속해서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닦아서 넘겨주겠다는 것. 둘째는 65세가 넘으면 직업 변호사를 은퇴하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분에게 리더십을 넘겨주겠다는 것.

그 후로 태평양을 국내 굴지의 로펌으로 성장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로펌으로는 후발주자였던 태평양에 국내 최초의 유한책임제도를 도입하고 ‘수평적 문화’ ‘투명한 회계’를 내세워 태평양을 10여 년 만에 국내 최고 수준의 로펌으로 키워냈다.[8] 초창기에는 기성 법률가들을 모집해 규모를 키우는 대신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연수원 졸업생들을 영입해 내실을 다졌다. 그 후 성장기에 접어들자 인재들이 스스로 찾아왔다. 물론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았다.

만 65세가 되던 2002년에는 법무법인 태평양 개소식 당시의 약속을 지키고 대표 자리에서 은퇴했다. 아울러 본인 소유의 로펌 지분을 모두 태평양에 귀속시키고 '명예 대표 변호사'라는 이름만 갖고 떠났다. 모 로펌누군가와 비교되네... 지금은 굿소사이어티 등 시민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 법치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또한 '아호'를 빌려 재단법인 '동천'을 설립한 뒤 장학사업 등 각종 사회공헌활동도 펼치고 있다.

3. 가족관계

4. 여담



[1] 분당소망교회 성도[2] 아마도 교장선생님은 그가 재기가 너무 넘쳐 미리 브레이크를 걸지 않을 경우 오히려 망가질 것을 염려했던 듯함.[3] 당시 고대법대에서 민법을 가르쳤던 주재황 서울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훗날 대법원 판사가 된다)가 졸업을 미루고 한 학기 더 공부하라며 등록금까지 대줬다고 한다.[4] 청년 법관 시절이던 1965년에는 당시 고려대 재학생으로서 한일회담반대데모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던 이명박의 신원보증을 서준 일도 있다고 한다.[5] 전 문화체육부 차관, 서울시 강서구청장[6] 그 무렵 동백림 사건도 함께 터졌다.[7] 당시 고등법원 판사였던 김인섭이 민복기 대법원장을 찾아가 행정처장의 교체를 건의하니, 민복기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장은 재판하는 사람이 아니고 법원 살림을 하는 사람이니 행정을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대답한다고 했다. 그러자 김인섭이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행정을 잘 아는 판사들을 길러 내면 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8] 법무법인 태평양은 2017년 현재 변호사 숫자에서 김앤장, 법무법인 광장에 이어 로펌 랭킹 3위를 마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