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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00:01:22

김은중/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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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김은중의 클럽 선수 경력에 관한 문서.

2. 대전 시티즌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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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내초등학교시절 반대항 축구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 축구를 처음 시작했고 축구 명문 동북중-동북고를 차례로 거쳤다.

당시엔 이례적으로 동북고를 중퇴하고 1997년 드래프트에 참가해 당시 신생팀 대전 시티즌에 고졸 선수 우선 지명 선수로 지명돼 만 18세의 나이로 대전의 창단 멤버로서 프로 선수가 됐다. 원래 당시 수원 삼성 감독을 맡고 있던 김호 감독이 김은중을 데려오려 했었지만 실패하면서 김호의 아이들이 되지는 못했다.[1]

첫 시즌 당시 기준 K-리그 최연소 출장 기록[2]을 세우는 등 컵대회와 리그를 합쳐 14경기에서 무득점에 그쳤지만 김기복 감독에게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그 다음해인 1998년에는 팀의 주전 공격수로 도약하게 된다.

비록 1998년에도 29경기 3골 1도움으로 부진했고, 심지어 3골 1도움도 모두 조별컵에서 기록한 것이고 리그에서는 공격 포인트가 아예 없었지만 아직 어린 나이었던데다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보여준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김은중이라는 이름을 당대 최고의 유망주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해 불어닥친 1997년 외환 위기의 광풍 속에 팀의 스폰서였던 계룡건설, 동아건설, 동양백화점, 충청은행 중 계룡건설을 제외한 세 개의 기업이 파산해버리며 팀의 재정은 최악을 달리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김은중은 지원도 열악하고 선수층도 얇은 대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뛰게 된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리그와 컵경기를 합쳐 24경기 4골 1도움으로 전년에 비해 약간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김은중의 공격 포인트가 적은 것을 두고 김은중의 능력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가 뛰고 있던 팀이 대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의 대전은 그야말로 리그 최약체이자 최악의 선수층을 가진 팀이었다. 2000년에는 부상이 겹치며 20경기 4골 2도움에 그친다.

대전 시티즌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2001년 시즌이 다가온다. 대전은 이태호 감독을 새로 선임하며 팀을 재정비했고,[3] 비록 리그에서는 최하위에 그쳤지만 대전 시티즌은 이 해 클럽 창단 최초로 FA컵에 우승하며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때 포항 스틸러스와의 결승에서 당시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던 김병지를 뚫었고 결승골을 기록하며 대전의 대회 우승에 큰 공헌을 해주었다. 김은중은 50경기에 출전, 12골 5도움을 기록하며 그전 시즌에 팀에 합류한 이관우와 함께 팀을 이끌었고, FA컵 결승전에서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그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는 대전 시티즌에게 있어 최악의 해로 기억되는 2002년이었다. 대전 시티즌은 이 해 리그에서 단지 1승을 거두는데 그쳤고, 이태호 감독은 자진 사임했다. 마지막 남은 스폰서였던 계룡건설도 스폰서를 취소하며, 대전은 창단 이래 최악의 위기를 겪으며 팀의 존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전에는 김은중이 있었다. 김은중은 이 시즌 27경기에 나서 7골 1도움을 기록하며 이관우와 더불어 팀의 마지막 보루로 남았다.

너무나도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새로운 시즌이 다가왔다. 최윤겸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대전 시티즌은 대전시청을 새로운 스폰서로 삼고 리그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전에 기적이 일어났다. 2003년 대전은 말 그대로 경이로운 성적을 냈다. 전년도 최하위 팀이 6위로 올라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김은중과 이관우였다. 두 선수는 "은우"라 불리는 콤비로 활약하며 대전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단일 리그로 진행된 이 시즌, 김은중은 22경기에 출전해 11골 2도움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을 마크했다. 대전 시티즌의 홈구장 퍼플 아레나에는 연일 관중이 가득 찼다. 평균 관중 19,092명을 찍었고, 6월 18일 울산과의 홈경기에서 주중 최다 관중 43,770명을 기록했다. 대전에게도, 김은중에게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3. 베갈타 센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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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돈 없는 시민구단이었던 대전에게 김은중이라는 스타를 붙잡기에는 다른 구단의 유혹이 너무나 컸으며 결국 2003년 시즌 끝무렵 김은중은 J리그의 베갈타 센다이로 임대 이적하게 된다.

이 때 김은중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가 팀에 복귀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4. FC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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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4년 김은중은 구단 간의 협약에 의해 돌연 FC 서울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대전의 서포터 퍼플크루는 김은중 유니폼 화형식을 가졌을 정도로 당시의 충격은 대단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대전 시티즌으로 돌아온 김은중이지만, 이적 직후를 술회하는 과정에서는 퍼플크루에 대해 서운한 감정 역시 컸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프로는 돈이기에 프로 선수인 김은중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이해 가능하지만, 시티즌 팬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구단 최고의 선수를 내보내는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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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팀인 FC 서울에서도 김은중은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2004년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FC 서울 1호골을 기록하는 등 8골 2도움을 기록했고, 2005년에는 7골 7도움을 기록했다.[5] 두두, 박주영, 정조국 등이 부상과 슬럼프로 인해 제 몫을 다하지 못했던 2006년에는 14골 5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4골 2도움에 그쳤지만, 2008년에는 5골 4도움을 기록하며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 해냈다.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서울에서 그의 노련함은 큰 자산이었는데 특히 2008년 시즌 당시 플레이 오프에서 골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 FC 서울의 준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서울팬들이 당시 가장 좋아했던 스타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선수콜[6]도 있었을 정도이다.

5. 창사 진더

그리고 2008년 시즌 이후, 김은중은 FC 서울과의 주전 출장과 연봉에 대한 의견 차이로 재계약에 실패한다. FC 서울은 김은중을 FA로 시장에 내놓았고 당초 신생팀 강원 FC로 이적할것이 유력해 보였으나, 2004년 이전 선수는 FA 이적시에도 이적료가 발생한다는 조항이 발목을 잡아 K리그 내에서의 이적에는 실패하게 된다. 후에 전북과 선수 간의 합의가 끝난 상황에서 서울이 전북에 보내는 걸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MLS 등으로 진로를 찾아보던 김은중은 중국 창샤 진더로 진출하며 당시 다롄으로 이적한 안정환과 더불어 중국 슈퍼 리그에서 뛰게 된다.

창샤 진더에서는 열악한 팀 환경에도 불구하고 28경기에 나서 7골을 기록(컵 대회 1골 및 리그 도움 10개를 기록하면서 통합 8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팀 내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창샤의 왕"이라는 팬들의 찬사도 받았다. 우습게도 한국에서 당시에는 중국 슈퍼 리그듣보잡으로 여겨서인지 1시즌만에 나온 김은중이 못해서 나온 걸로 아는 이들이 많다. 오죽하면 김은중 본인조차도 베스트일레븐 지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넷에서 내가 못해서 방출된지 알더라~라고 비웃듯이 이야기했을 정도였다.[7]

6. 제주 유나이티드 FC

2009 시즌, 1년간의 창샤와의 계약이 끝나고 끈질기게 추가계약을 원하던 창샤를 거부하고 김은중은 다시 K-리그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한창 선수 영입에 열을 올리던 제주 유나이티드가 그를 영입했고, 많은 기대를 받으며 주장 완장을 차게 되었다. 그리고 32살에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맞이하며 K리그 역사상 10번째로 40-40 클럽에 가입했다. 공격 포인트 뿐 아니라 주장으로서의 역할도 성실하게 수행하며 어린 선수들을 잘 이끌어 박경훈 제주 감독의 신임이 대단하다고 한다.

제주에서 구자철, 배기종, 산토스, 네코 등과 공격진을 형성했고, 이외에도 박현범, 김호준, 홍정호 등 다른 이적생들과 젊은 선수들과의 맹활약에 힘입어 제주는 시즌 내내 선두권을 지켰고 분전 끝에 제주로 연고 이전한 이례 최고 성적인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8]

10월 31일 대구전에서 1골을 추가하며 통산 97골째를 기록했으며, 시즌 최종 성적은 13골 10도움으로 커리어 하이. 공격 포인트 23개로 에닝요와 함께 리그 공동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12월 20일, K리그 베스트 11 공격수 부분과 시즌 MVP를 수상하며 자기 인생 최고의 해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2011년 7월 2일 드디어 K-리그 100호골을 달성했지만 2011년 제주에서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미진했다. 구단 전력 개편을 시도한 제주의 의도와 주축 선수진의 은퇴 및 군 입대로 인해 구심점이 필요했던 강원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며 서동현과 맞트레이드로 강원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7. 강원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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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처럼 입단하자마자 주장직을 맡게 됐다. 트레이드 대상 서동현 이외에도 기존 강원의 주포인 김영후의 군입대 공백을 메워야하는 중책을 맡았다.

K-리그 대표 약체였던 강원의 12시즌 초반 선전을 이끌었는데, 대구와의 2차전, 인천과의 6차전에서 두 골씩 넣으며 강원의 2승을 얻어냈다.

그러나 초반 활약도 무색하게 스플릿 라운드의 과밀 일정과 백업 공격수의 부상과 용병 방출 등의 악재로 30대 중반 노장이 극심하게 2012년 여름, 1주일 2경기 풀타임을 소화해야했고, 이후 체력이 급격히 저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김학범이 등장해서 어느 정도 안정시켜 놓은 후반기에는 몇 경기 쉬다 조커로 역할을 바꾸고 경기력을 되찾았고, 34살 노장의 나이에 41경기 16골 2도움으로 팀내 최다 득점자 자리에 올랐다.[9]


2012년 11월 4일 리그 38라운드 대전과의 홈경기에서 K리그 통산 400경기 출장 대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2013 시즌 들어서 전반기 13경기 1골이라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있었던지라 결국 7월 28일, 포항 스틸러스로 5개월 임대 이적을 했다.

계약 만료가 2013년 12월 31일인걸 생각하면 사실상 완전 이적이나 다름 없는데, 사실 신임 대표가 된 임은주가 과거 심판 시절 김은중이 판정 시비가 붙은 나머지 너무 심한 욕설을 내뱉었던 탓에 둘의 관계가 좋지 못한 상태였기에 임대표 체제에서는 오래 못 갈 거라고 보는 사람이 상당했다.[10]

8. 포항 스틸러스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포항 스틸러스로 임대된 이후 원소속팀 강원과의 경기에는 나오지 못하고, 대구와의 경기부터 출전하기 시작했다. 포항팬들로서는 나름 K리그 레전드 중의 한 명인 김은중의 활약을 기대했으나 스플릿 1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부산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것 외에 뚜렷한 활약은 펼치지 못했다. 포항의 전술 자체가 원톱을 놓지 않는 제로톱 or 장신 타겟맨 박성호배천석을 놓는 원톱으로 갈리다 보니 김은중이 활약할 기회가 적었던 것이다. 그래도 꾸준히 교체멤버로 활약하면서 부족한 포항의 공격자원에 보탬이 되었으며 절친 노병준과 함께 유스 출신의 어린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포항에서 고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리고 2013 시즌 포항이 K리그 최초의 시즌 더블(리그 우승 + FA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그토록 고대하던 K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 대전, 서울, 제주, 강원을 거치면서 리그 MVP는 차지했어도 유독 우승컵과 인연이 없었는데 그래도 은퇴 직전에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어서 오랫동안 그를 응원해 온 팬들로서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포항과의 임대 계약 종료와 동시에 원소속팀인 강원과의 계약도 종료되는데 나이도 나이인지라 은퇴설도 나오는 중이다. 하지만 김은중 본인은 우승도 기쁘지만 자신이 만족할때 유종의 미를 거두며 은퇴하겠다고 밝혀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갈 의지를 보여줬다.

9. 대전 시티즌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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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드리블로 그라운드를 지배한다! 그가 돌아왔다![11]

2014년 02월 27일 친정팀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하였다. 원래는 가족과 함께 미국의 MLS로 이적할 예정이었지만 #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대전을 위해 돌아왔다고 한다. 다만 선수가 아닌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며 자신을 상징하는 등번호 18번을 그대로 받았다.

2014년 03월 30일 홈개막전에서 4:0으로 앞 선 후반 15분여를 남기고 10년 7개월만에 대전 소속으로 교체출전! 하였지만 동계훈련에 늦게 합류해서인지 다소 무거운 움직임을 보였다. 10년 7개월 만의 복귀에 한국 축구 프로 연맹에서 복귀 특별영상까지 제작하여 경기 시작전과 하프타임때 상영하고 하프타임때 후배들에게 축구화를 후원하고 홈팬들에게 싸인볼을 나눠주는 등 팀의 레전드로서 대접받고 팬들에게도 즐거운 추억을 선물했다.

3886일만의 대전 복귀전 기다리는 샤프 김은중



조진호 감독대행은 김은중 플레잉 코치가 동계훈련 참가가 늦어 몸상태가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며 몸상태가 올라오면 많은 경기에 출전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홈개막전 이후에도 팀이 안정을 필요로 할때 그리고 공격진들의 체력안배를 위해 간간히 교체출전하였다.

2014년 05월 21일 하나은행 FA컵에서 포천시민축구단을 상대로 홈에서 선발출장 동점골을 넣으며 대전 복귀골을 신고했지만 팀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그러나 3일뒤 2014년 05월 24잉 수원 FC와 홈경기에서 1:0으로 앞선 후반 종료 직전 아드리아노가 골키퍼를 제친상황에서 밀어준 패스를 받아서 빈 골대에 골을 넣으며 드디어 자신의 K리그 챌린지 첫 골을 기록하고 팀의 승리를 이끌며 지난경기에대한 아쉬움을 덜어냈으며, 특히 시즌 막판 아드리아노가 출전 정지 징계를 받으면서 주전으로 출전하였고, 부천 FC와의 경기에서 정석민의 골을 어시스트하며 대전의 조기 승격을 확정지었으며, 수원 FC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5:2 대승을 이끌며 2014시즌 대전의 K리그 챌린지 우승과 K리그 클래식 승격에 기여하였다.

대전 창단 이래 유이한 두 번의 우승을 함께한 유일한 인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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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후 대전의 서포터즈석 앞까지 뛰어 가서 팬들과 함께 환호하던 장면은 대전 팬들에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자 명장면으로 남게 되었으며, 강한 여운을 남겼다.
대전에게 두번째 우승을 선물하다

2014년 대전 시티즌이 우승을 차지하자 플레잉 코치로서 묵묵히 팀을 도운 그의 헌신도 조명되었다. # 대전 시티즌 항목의 2014년 클럽하우스 개관식에서 골키퍼 박주원 선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선수들에게 큰 형님 노릇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제대로 함을 보였다. 이후 1부리그로 승격하자 많은 팬들이 김은중이 팀에 남아 1부 리그에도 뛰어주길 바랬지만 은퇴를 선언했으며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의 상황에서 대전 소속으로 1부 리그를 뛰는 것으로 본인의 욕심이라고 생각했으며, 애초에 대전을 승격시킨 뒤 본인이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판단해서 은퇴를 마음먹은 상태였다고 한다.

10.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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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은중이 은퇴를 하면서 대전 시티즌 구단은 2015년 김은중이 코치로 부임한 AFC 튀비즈를 초청해 It's Daejeon 축구대회를 개최하면서 김은중의 은퇴식을 개최하려 했지만 메르스 여파로 취소되면서 1년 연기되어 2016년 6월 24일 개최되었다.

이날 경기에서 김은중은 전반전에는 튀비즈의 코치 신분으로 튀비즈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전반 종료 후 쉬는 시간에는 김은중의 영구 결번 제막식이 이어졌으며 김은중의 등번호 18번은 18년 동안 임시 결번으로 남게 됐고 팬들은 결번에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12]

또한 은퇴의 심경을 밝히면서 김은중은 참아왔던 눈물을 보였고 이를 지켜보던 대전 팬들 역시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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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들어서 대전 시티즌의 선수 신분으로 교체출전하였는데, 교체로 그라운드에 드러설 때 갑자기 그라운드의 모든 조명이 다 꺼졌고, 잠시후 대전팬들이 홍염을 통해 NO.18 김은중의 글씨가 보이도록 퍼포먼스를 펼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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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41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을 성공시키면서 축구 선수로써 마지막골을 성공시켰고, 골을 성공시킨 뒤 선수단 전원과 같이 단체사진을 찍은 세레머니를 펼쳤다. 이후 임준식과 교체로 아웃되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였다.






[1] 동북고를 중퇴했지만, 대전 구단의 배려로 대전 내 평생교육기관인 대전예지중고등학교에서 학력을 채웠다.[2] 이는 1년 뒤 정창근에 의해 깨졌다.[3] 당시 대전 시티즌의 감독이었던 이태호 감독 역시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고 공격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욱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전망된다.[4] 다행이라면 다행인게 대전 팬들은 이후 그밖의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며(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 인천 마스코트 폭행 사건 등) 이때처럼 단순 과잉 분노로만 현실을 대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김은중도 돌아와 팀의 첫 승격에 일조하며 명예롭게 은퇴했다.[5] 특히 박주영의 프로 데뷔골을 어시스트해줬다.[6] 샤프 샤프 샤프 샤프 골 샤프 골 샤프 김은중, 현재는 한승규 콜로 사용 중이다.[7] 같은 시기에 중국에 진출한 안정환 역시 중국에서 맹활약하며 당시 소속팀이었던 다롄 스더의 팬들에게 "다롄의 왕"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 쪽은 3개월 단기 계약으로 갔다가 재계약을 맺으며 2년 더 활약했다.[8] 다만 FA컵 준결승전에서 잔디가 발에 달라붙어 승부차기 실축하면서 팀은 결국 패배했다.[9] 하지만 그 중에 8골이 PK였다. 앞선 체력 저하 문제로 8번의 시도 중에 8번을 성공시킨 PK 기계 역할이기도 하얐다.[10] 일단 임은주가 단장 취임한 이후에는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이 옛날 일이라고 쿨하게 넘기며 웃는 장면이 영상으로 찍힌 적도 있지만 진실이나 속마음은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11] 장내 아나운서 소개 멘트였다.[12] 창단 당시 제작되었던 레트로 유니폼과 함께 새겨졌기에 의미는 컸다.[13] 리그나 FA컵 경기에서는 홍염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이날 경기는 친선 경기였기 때문에 홍염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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