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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3:35:54

김영덕/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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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록 조작3. 김성근에 가려진 투수 혹사4. 동료야구인들과의 관계5. 큰 경기에 약한 감독6.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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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덕의 평가를 다룬 문서.

2. 기록 조작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는 OB에서의 원년 우승, 삼성에서의 전후기 통합 우승, 그리고 빙그레의 강팀 도약 등을 비롯해서 분명 KBO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과 성적을 거둔 명감독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역량보다는 바로 기록조작.[1] 아래는 그가 지금까지도 비판받고 있는 문제의 '타이틀 만들어주기' 사례들이다.
이러한 타이틀 만들어 주기에 대하여 김영덕 감독은 "팀을 위해 엄청난 희생과 훈련을 따라온 선수를 위해 감독으로서 당연히 해줘야 하는 '배려'라고,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된다고 배웠다."고 밝혔다. 이는 난카이 시절 감독인 츠루오카 카즈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7]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거리낌 없이 이렇게 할 거라고 한다. 타이틀을 만들어주는데 자신은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8][9]

또 절대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바로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10] 1984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전기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상태에서[11] 만만해보이는 롯데를 후기리그 1위 겸 한국시리즈 상대로 밀어주기 위해 시즌 막판 노골적인 져주기를 했다.

당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서술하면 OB는 해태와, 삼성은 롯데와 2연전을 남겨두고 있었다. OB가 전승을 거두고 동시에 롯데가 1패라도 찍으면 OB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OB가 의욕 없던 해태를 상대로 이미 2승을 거둔지라, 사실상 삼성의 선택에 따라서 롯데와 OB 중에서 한국시리즈 상대가 갈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삼성의 선택은 당연히 롯데였다. 롯데도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최동원을 포함한 주력 선수들은 빼서 거저 먹으려 들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지라고 내보낸 삼성의 2군 선수들이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결국 육안으로 뻔히 보이도록 조작을 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나 마지막 2차전은 후기리그 우승팀을 결정하는 경기라고 전국에 생중계된 덕분에 전국의 시청자들이 이 어처구니없는 작태를 목격해버린다. 중계진들조차 "이 따위 경기를 중계해야 된다는 게 부끄럽다"고 했을 정도.

아무튼 껄끄러웠던 OB 대신[12][13] 비교적 약체인 롯데와 한국시리즈를 치르게 됐지만, 정작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의 초인적인 나홀로 4승에 힘입은 롯데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했다.[14] 그렇게 김영덕과 삼성은 욕은 욕대로 다 먹고 우승도 놓치는 최악의 굴욕을 맛보았다.

명감독이긴 하지만 위의 사례처럼 '기록'에 지나치게 집착한 면이 있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5] 이외에 강병철[16], 김성근[17]과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

1983년 OB 베어스 감독에서 사퇴하자마자 곧바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취임한 것도 자신이 이끌었던 팀을 버리는 모양새가 되면서 비판을 받았고, 이 일로 OB 선수단과도 사이가 나빠지면서 경기 도중 자신을 놀리는 OB 선수와 싸움을 일으키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먼저 감독 제안이 온 김성근의 삼성 이적을 만류하고선 자신이 가로채듯이 그 자리에 앉았다는 설도 있는데 이 점에 관해선 삼성이 오히려 두 사람 모두에게 감독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등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는 김영덕이 야구계를 떠난 이후 사실상 은둔생활을 하는데 비해 김성근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김성근 측의 입장만 부각되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감독의 기록조작으로 타이틀을 챙긴 송진우, 이만수 역시 기자단 투표로 받는 타이틀은 놓치는 대가를 치렀다. 송진우는 골든글러브, 이만수는 시즌 MVP. 이외에도 자신이 감독으로 재직했던 북일고 출신 선수들을 특히 밀어주어 현재의 '천안북일고 성골'이라 불리는 인맥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18]

다만, 그 유명한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망언은 본인이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기자들의 소설인지 아니면 지금에 와서 비난이 계속 되니까 말을 바꾼 건지 의문이었는데, 근래 들어서 드러나는 정황들을 보면 기자의 소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9]

3. 김성근에 가려진 투수 혹사

김영덕김성근은 둘다 일본 출신의 야구인이며, 혹사 문제에 있어서는 둘 중 어느 쪽도 자유롭지 않다. 박철순의 혹사가 김성근의 혹사 방식과 비슷하다는 서술이 기존에 있었으나, 사실 둘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김성근의 혹사 사례는 익히 알려져 있으나 김영덕은 시대가 더 앞서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조금 독특한 부분으로, 김영덕의 혹사 대상이 된 선수들은 묘하게도 롱런한 케이스가 많아서 해당 부분이 가려진 것도 크다.

김영덕의 대표적인 혹사 사례는 빙그레 이글스 시절 송진우한용덕이 대표적이다. 송진우는 1991년 36경기 11승 10패 11세이브 184 1/3이닝, 48경기 19승 8패 17세이브 191 1/3이닝을 던졌다. 한용덕은 1991년 31경기 17승 6패 2세이브 201 2/3이닝, 1992년 29경기 9승 11패 3세이브 186 1/3이닝을 던졌다. 비슷한 시기 김성근의 대표적인 혹사 선수인 김성길은 1991년 52경기 16승 12패 18세이브 188이닝을 기록했으며, 200이닝을 넘어간 선수는 없었다. 경기수와 이닝수를 보면 어느 쪽은 김영덕 쪽의 기록이 높고 어느 쪽은 김성근 쪽의 기록이 높다. 혹사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둘 다 장난 아니게 굴린 스타일.

초창기 마무리 투수를 굴린 기록도 비슷하다. 김성근 OB의 최대 히트 상품이라면 한국 최초의 마무리 투수였던 윤석환이었다. 그리고 김성근이 그렇게 나오자 1985년 김영덕도 권영호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한다. 1984년 윤석환의 기록이 57경기 12승 8패 25세이브 146이닝, 1985년 권영호의 기록이 54경기 6승 6패 26세이브 174 2/3이닝이다. 이닝을 우선으로 보느냐 경기를 우선으로 보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굳이 따지면 김영덕의 혹사가 더욱 심하였다.

오히려 당시 에이스들의 기록을 보면, 김성근 휘하의 계형철은 1984년 29경기 14승 4패 174이닝, 1985년 34경기 11승 11패 2세이브 194이닝, 김영덕 휘하의 김시진은 1984년 39경기 19승 11패 2세이브 215이닝, 1985년 47경기 25승 5패 10세이브 269이닝으로 김영덕의 혹사가 더욱 심하였다. 심지어 김영덕 휘하에서는 김시진뿐 아니라 김일융 또한 1984년 38경기 16승 10패 3세이브 222이닝, 1985년 34경기 25승 6패 226이닝으로, 원투 펀치가 모두 200이닝을 넘기며 전체 선수단 중 200이닝을 넘긴 선수가 한명도 없는 김성근과 크게 대비된다.[20]

사실 그 시대의 감독들은 어느 누구도 혹사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김성근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과정에서 그 대표적인 맞상대였던 김응용, 김영덕 등에 대해 이상한 옹호가 나오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다. 그저 그 시대에는 다들 그렇게 혹사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일 뿐이고, 그에 대한 미화나 옹호가 나와서도 안 되겠지만 비판 또한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동료야구인들과의 관계

김영덕은 원래 그렇게 활발한 성격이 아니었으며 위의 일들로 인한 비난 때문에 야구판에서 사라진 이후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도 2009년 정민철의 은퇴식 날 그의 싸인이 적힌 야구공이 등장하기는 했다. 감독 은퇴 이후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나마 최근에 가끔 야구장에서 야구관람을 하는 모습만 포착될 뿐이었으나, 2012년 7월 21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과거 이글스의 레전드들을 초대하는 자리에 등장, 올스타전 시구를 했다.[21]

대체적으로 동시대를 살아온 원로 야구인들과는 편한 사이가 아니었다. 특히 같은 재일교포 출신에 교토 고향 후배이기도 한 김성근과는 이상하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은 본래 상당히 좋은 사이였다. 1959년에 처음으로 만난 두 사람은, 당시 난카이 호크스 선수였던 김영덕이 같은 재일교포였던 김성근에게 야구 용품 지원 등의 도움을 주었고, 이후로 한국에서는 한동안 이웃으로도 지냈을 만큼 인연이 깊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대략 1982년 이후로 볼 수가 있다.

OB 창단 감독으로 취임할 때 조창수, 강병철 등을 코치로 데려오려 했지만 조창수김동엽의 부름을 받고 해태 타이거즈 코치로 갔고, 강병철은 감독으로 있던 동아대학교 와의 모종의 계약 관계 때문에 모두 불발되며[22] 결국 구단 측의 천거로 영입한 코치는 투수코치 김성근과 타격코치 이광환이었다. 김영덕은 김성근에 대해 대놓고 거부감을 표시했으나 구단의 설득 끝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신일고 감독 사임 후 야인 생활 중이던 김성근에게 직접 "프로가 출범하는데 여기 저기 찔러보고 다녀야 일자리를 구할 것 아니냐. 난 너 싫다고 했는데 구단에서 뽑으라 해서 뽑았으니, OB로 오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수십 년 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23] 둘은 감독과 투수코치로서 1982년 원년 코시 우승을 차지하는 소득을 올렸지만, 구단 고위층이 투수코치였던 김성근을 신임했던 탓에 서로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당시 김성근 코치가 올린 투수를 김영덕 감독이 바뀌자, 김성근 코치가 짐을 싸서 조기퇴근하는 하극상을 일으켰고, 박철순 혹사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감도 없지 않다.

1983년 말 삼성 라이온즈 감독 제의를 받은 김성근이 김영덕[24]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담을 청하자 이를 들은 김영덕은 "거기는 내가 가고 싶은데?"라고 털어놓았다. 결과적으로 삼성 감독은 김영덕으로 낙점되었고 이에 OB 감독을 맡은 김성근과 OB 선수들의 감정이 크게 상하여 1984년 시즌 내내 OB와 삼성은 경기 중 난투극을 수 차례 벌일 정도로 앙숙지간이 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25][26] 두 사람은 사실상 별다른 교류 없이 노년을 보냈는데, 이후 김영덕의 부고 소식을 들은 김성근은 조문을 가서 "투수의 길을 새롭게 만들었다”며 “우리나라가 아무래도 처져있을 때다. 그것을 일본하고 대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만드신 분이다”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사상 최다 우승, 최다승 감독인 김응용과도 편한 사이는 아니었다. 1969년, 한일은행 야구단 감독 당시에 김영덕이 은퇴와 함께 바로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서 틀어졌다고. 게다가 두 감독이 각각 맡던 해태와 빙그레가 한국시리즈에서 자주 붙었으니 편한 사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한일은행 시절 후배였던 강병철은 그가 OB 감독 취임 때 데려오려고 시도했을 정도로 여러모로 탐내던 인물이었지만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미묘해졌다. 그래도 사이가 우호적이어서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 - 수석코치로 함께했으나 김영덕 감독 종신감독설이 돌며 사이가 틀어지고, 결국 불편한 관계로 끝났다.

하지만 김영덕 이후 삼성 감독직을 이어받은 박영길과는 우호적인 관계였다. 같이 실업리그 시대에서 명투수와 명타자로 활동했던 선수였고, 김영덕이 장충고 감독에서 물러났을 때 5년 후배임에도 박영길의 밑에서 코치를 맡으려고 했던[27] 이력이 있어 박영길은 이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롯데 감독에서 경질된 후에 김영덕 감독의 부름[28]을 받아 삼성 코치로 부임했다. KBO에서 코로나 이전에 원로들끼리 만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래서 코로나 이전까지는 정기적으로 만났었다고.[29]

그의 제자들은 그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평했다. 김영덕의 도움 덕분에 야구선수 생활을 이어갔던 한용덕 前 한화 이글스 감독, 이상군 천안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송진우스코어본 하이에나들 감독은 부고 소식을 듣고 고인과의 추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 이들과 유승안 등이 더해진 빙그레 제자들은 스승의 날이나 때가 되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김 전 감독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곤 했다. 22년 하반기까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난카이 출신이라는 인맥을 잘 활용, 이나오 가즈히사, 장훈 등 비슷한 나이대의 일본프로야구 레전드들을 재능기부 인스트럭터로 초빙하고, 난카이의 후신인 다이에의 마무리훈련 캠프나 일본 교육리그에 자신이 총애하는 젊은 선수들을 파견[30]해 젊은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도모했으며, 또 빙그레 감독 시절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적으로 투수코치를 두 명이나 선임하여[31] 각기 좌/우완 투수에게 맞춤형 교육을 시도하기도 했다.

5. 큰 경기에 약한 감독

기록조작과 한국시리즈에서의 약한 면모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지만, 그의 통산 승률은 0.596으로 이보다 높은 수치는 .606의 서영무(삼성 창단 감독)뿐이다. 그마저도 한시즌 성적이므로 실질적 페넌트레이스 역대 감독 승률 1위인 감독이었지만, 두산 베어스의 김태형감독이 4년간 .610이라는 경이로운 승률을 찍으면서 여기서까지 콩이었으나, 이후 4년 동안 김태형의 통산 승률이 0.561로 떨어지면서 2022 시즌이 끝난 시점에서는 1위가 되었다.

빙그레와 삼성 시절의 많고 많은(..) 준우승 때문에 콩라인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 우승감독으로 콩라인 멤버는 아니다. 다만 빙그레 시절로 한정하면 콩라인 맞다.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따지면 OB, 삼성(이쪽은 한국시리즈 안열리고 통합우승)도 포함. 일본 시절에도 일본시리즈 우승 경험을 했고.

그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 사례인 원년 1982년의 OB와 이후(삼성과 빙그레)를 비교하면, 그가 큰 경기에 약했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에이스의 활약' 여부였다. 1982년 OB 우승때는 그해 22연승에 빛나는 박철순이 한국시리즈에서도 훌륭한 투구를 보여주었고, 덕분에 우승까지 했다. 하지만 삼성 시절에는 김시진과 김일융이 1984년 롯데의 최동원, 1986년 해태의 선동열만큼 활약하지는 못했고, 특히 김시진은 끝내 새가슴을 극복하지 못했다. 빙그레에서는 한희민, 이상군 등이 나름 활약했지만 역시 선동열에 비할 정도는 못되었다. 그나마 1992년에 다승과 구원을 동시 석권한 송진우와 신인으로 대활약한 정민철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롯데의 마무리 박동희와 고졸 에이스 염종석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가 한국시리즈 등 큰 경기에 약했던 이유로 투수 기용면에서 조급증을 보였다는 것이 지적된다. 믿을만한 투수만 골라서 마구 돌려쓰고, 그들을 선발투수로 올렸다가 휴식기간도 안 챙겨준 채 구원투수로 올렸다가 하루나 이틀 뒤 다시 선발투수로 올리는 등 무리수를 두고, 심지어 경기 중반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에이스를 구원등판 시킨다든가 선발투수가 초반 페이스를 못 찾으면 너무 빨리 강판시켜서 투수운용 계획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등 조급증에 빠진 포스트시즌 운영을 보여줬다. 그래서 시리즈를 길게 보고 투수운용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다가 승부수를 띄워야 할 순간에만 전력투구를 하는 김응용강병철에게 단기전에서 번번이 당하고야 말았다. 또한 팀선수의 자발성을 제약하며 경기의 모든 순간을 통제하려는 그의 관리야구가 페넌트레이스에는 통했지만 포스트시즌엔 선수들을 주눅들게 만들어 역효과를 냈다는 지적도 있다.

6. 총평

위에서 나열한 사례(기록 조작, 져주기 게임, 특정 출신고 파벌 조성 의혹 등)로 인해 실력에 비해 꽤나 저평가받고 있으며 현역감독 시절 상대 감독들과의 불화로 인해 영 좋지 않은 평판을 받는 인물이다.[32] 하긴 자신이 선수들 타이틀 만들어 준다고(...) 자초한 면도 있으니 할 말은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초창기의 프로야구의 태동기를 이끌었던 명감독임은 틀림없으며, 비록 명장의 보증수표격인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짧은 개막리그였던 첫 해밖에 없어서 빛이 좀 많이 바랬지만, 전ㆍ후기리그 시스템 시절의 유일한 통합 우승, 수차례 패넌트레이스 우승 및 수차례 한국시리즈 준우승, 신생구단 빙그레 이글스를 초단기간 우승권 전력으로 이끄는 등의 성과만으로도 대한민국 야구에 결코 적지 않은 공로를 가진 능력있는 감독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위의 사례와 같은 재일 교포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오늘날 김성근과 더불어 꽤나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도 많은데, 실제로 그의 운용은 김성근에 비해서는 상당히 정공법적인 편이었으며, 타팀 야구팬에게도 강팀의 감독이라 항상 자신만만하고 때문에 좀 얄미운 면은 있었지만 경기에서 도발하거나 비신사적인 경우도 별로 없이 비교적 신사적인 이미지도 있었다. 다만 워낙 강팀의 감독을 맡았기에 약팀들 팬에게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감독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큰 경기, 우승을 다투는 라이벌팀과의 경기에서는 다소 집요한 측면도 있었고, 특히 한국시리즈 등 큰 경기에서는 상대편도 그렇지만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했기에 이때 자주 맞붙었던 팀들과는 다소 껄끄러운 이미지를 남기기도 했다.

프로야구 매니저빙그레 이글스 구단이 업데이트되면서 추가된 감독카드이기도 한데 기존의 감독과는 궤를 달리하는 투수운용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김성근 감독이 불펜 혹사형, 선동열 감독이 중셋마, 김경문 감독이 셋마 야구를 구사한다면 김영덕 감독은 마무리 체력+5의 히든에 힘입어 7회부터 마무리가 올라와서 세이브를 따는 중무리(?) 야구를 한다.[33] 그 덕에 중계와 셋업이 구제불능인 1990년도 이전 덱의 구세주로 조명되고 있다.

위에 언급된 인터뷰에서 박철순을 혹사시켜 OB 베어스를 우승시킨 것은 옛날 야구를 배웠던 탓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박철순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허나,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서 만나게 된 인생 최대의 위기를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밝혀 혹사에 대해 별 감각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34]을 샀다. 아니면 김성근이 아무리 원수지간이 되었어도 같이 늙어가는 입장이란 점과[35], 자신이 이글스란 팀에게 삼성 못지않은 애착이 있어서 립서비스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김응용이 김성근에게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김응용과 김성근은 김영덕과 김성근 같은 견원지간은 아니고, 1930~1940년대생 원로 야구인들 중에서는 그나마 사이가 좀 양호한 편[36].

[1] 김영덕이 감독으로 활동하던 당시는 인터넷이 활성화되기는커녕 인터넷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인터넷이 활성화된 후인 2000년대 이후 타이틀 만들어주기 논란이 있는 감독은 2005년 오승환의 승률왕과 배영수의 탈삼진왕을 밀어줬던 선동열, 2009년 박용택의 타격왕을 밀어줬던 김재박 등이 있는데, 이들조차도 김영덕에 비하면 별 거 아닌 일로 보일 정도. 그만큼 당시 김영덕의 타이틀 만들어주기는 수많은 야구팬들의 비판을 받았다.[2] 포수가 일어나서 손을 벌려야만 고의사구로 기록됐기 때문. 이제는 고의사구로 출루시킬 의사가 있다면 공을 던질 필요도 없다.[3] 당시 유승안과 홈런, 타점왕 경쟁을 벌이고 있던 김성한의 해태도 유승안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만루 찬스에서 김성한을 대타로 기용하는 등 비슷한 수법을 썼다. 결국 그해 홈런은 김성한, 타점은 유승안이 각각 1위를 나눠(?)먹었다.[4] 다만 저 당시 장효조는 삼성이 아니고 롯데 소속이었다.[5] 하필 해당 경기는 당시 송진우와 다승왕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이강철의 소속팀인 해태와의, 시즌 마지막 2연전의 첫 경기였다. 이에 이강철은 다음날 선발로 등판해 '공동' 다승왕이라도 수상해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지만, KBO 최초 한 시즌 40홈런 고지를 돌파하는 등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장종훈에게 결승 홈런을 맞고 패전했다.[6] 차이점이라면 오승환의 경우는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7] 당시 츠루오카 감독의 지론 중 하나가 "선수가 열심히 하면 감독은 이를 도와줘야 한다"였고, 이런 지론을 가진 감독 밑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김영덕은 기록 만들어주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츠루오카 외에도 코바 타케시, 노무라 카츠야, 나가시마 시게오 등 감독이 자팀 선수의 타이틀 수상을 위해 경쟁 선수에 대해 노골적인 견제를 하는 사례는 현대 야구에서도 종종 찾을 수 있었다.[8] 얼핏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된다. 백 번 양보해서 홍문종, 장효조 고의사구는 자팀 선수의 기록을 위해 타팀 선수 기록을 망친 거니까 그렇다 쳐도, 송진우를 위해 같은 팀 선수 한희민의 기록을 망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타이틀 경쟁 대상이 아니잖아 이는 결국 김영덕 감독이 업적에 비해 저평가받을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인정해버린 말이기도 하다.[9] 당시의 기준을 현대의 잣대로 판단하면 비난할 수 있는 일들은 얼마든지 많다. 일례로 학폭이 일상화 되어있던 시절과 지금 작은 학폭이라도 엄하게 다루는 현재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김영덕 본인은 에이스 투수가 300이닝 이상을 던지는게 당연한 시대에 선수생활을 했고 게임에 지면 병이 날아들고 버스에 불을 지르던 시대에 감독을 했다. 옛날사람과 옛날 사고방식을 현대의 잣대로 무조건 틀렸다, 잘못했다라고 비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대에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 미래에는 다들 잘못으로 기록될 수 있는 일도 쉽게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10] 전술했던 기록조작도 있지만, KBO 초창기의 명장이자 한국야구의 발전에 꽤나 공헌했던 그가 야구팬들 사이에서 저평가받는 결정적인 요인이다.[11] 당시는 전후기 리그로 나누어서 전기리그 1위와 후기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 치렀다. 1985년 삼성처럼 한 팀이 전후기 1위를 싹쓸이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바로 통합우승.[12] 이는 롯데보다 우수했던 OB의 전력뿐만 아니라 김영덕 감독의 전임 팀이었던 OB를 떨어뜨리기 위한 목적이 더해져 있었다. 그 결과 84년의 OB는 전후기 통합승률 1위와 동시에 KBO 역대 최저 평균자책점 기록(2.63)을 찍고도 한국시리즈 우승은커녕 진출 도전 자격조차 얻지 못한 희대의 사례로 남았다.[13] 여담으로, 역대 KBO 시즌을 통틀어서 팀 평균자책점 1위를 찍고도 포스트시즌에 못 나간 사례는 이 84년의 OB를 포함하여 단 세 번뿐인데, 4위였음에도 3위와의 승차 3경기 이상이면 준플레이오프를 생략한다는 시즌 규정으로 포스트시즌 컷오프를 당한 95년의 해태, 그냥 방망이가 워낙 답이 없어서(...) 10팀 중 7위로 마무리한 2017년의 LG가 끝이다.[14] 심지어 최동원은 이 한국시리즈에서 승리를 거둔 4경기만 나온 게 아니고 완투패 1경기가 더 있었다. 한국시리즈 최종 기록은 5경기 40이닝 4승 1패 ERA 1.80 WHIP 1.08.[15]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기록과 승리에 집착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승리지상주의에 더해 그것을 위해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까지 감행했던 전적 탓에 박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당장 김영덕과 비교했을 때 승리지상주의적인 면에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김성근김응용만 봐도 이래저래 많이 비난받기는 하지만 최소한 김영덕 수준으로 단순히 업적을 폄훼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지는 않는다. KBO 역대 최고 포수 논쟁에서 이만수박경완으로 많이들 싸우지만, 2010년대 최고팀 포수임에도 약물 복용 전과가 있는 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구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6] 앞서 말했던 종신계약설로 인해 불화가 생겨 결국 롯데 감독으로 돌아섰고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영덕을 이기자 구단 프런트는 강병철 감독과 바둑을 두는 등 책상 빼버리기김영덕 감독에게 나가라는 압박을 줬다. 근데 강병철 감독은 한화에서 혹사까지 동원한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승은 고사하고 5년간 가을야구를 2번밖에 못했다. 거기에 승률은 1할 2푼 넘게 폭락. 김영덕 감독 시절에 비한 이 초라한 전적에 빙그레-한화팬들은 매우 실망했고, 결국 1998년 시즌 도중 경질당했다.[17] 전술한 져주기 게임의 최대 피해자였던 당시 OB 감독이기도 하다.[18]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상군, 한용덕 등 일부 선수만을 두고 뭉뚱그려 해석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북일파, 비북일파의 갈등은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 실제로 김영덕 감독의 빙그레에서는 북일 출신의 조양근, 전대영보다 비북일 출신의 김용선, 진상봉 등이 더 많은 기회를 얻은 바 있어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19] 이후 인터뷰에서 "내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아구계가 당연히 그런 선택을 했다. 단지 내가 학연, 지연이 없어 표적이 되었을 뿐이다."라는 견해를 보였다.[20] 사실 김성근 휘하의 OB에서 200이닝 투수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당시 OB 투수진의 상황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데, 삼성의 김시진, 김일융이나 롯데의 최동원 같은 슈퍼에이스급 이닝이터 투수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여러 투수를 돌려가며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나마 OB에서 그런 역할을 맡길 수 있었던 박철순이 허리 부상으로 이탈한 탓에 꺼내들 수밖에 없었던 고육지책인 셈. 어찌 보면 쌍방울 감독 시절의 투수 운용과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21] 그가 생전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9년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OB 베어스 前 구단주)장례식 때였다.[22] 강병철은 김영덕이 빙그레 감독이 된 이후에 재회에 성공했지만, 끝내 두 사람의 사이는 파국으로 끝나고 만다.[23] 이후 김성근이 본인의 자서전(꼴지를 일등으로)에 기술한 바에 의하면, 이미 삼성에서 투수코치 제의를 받았으나 김영덕 감독이 "나와 같이하자"라는 으름장을 놔서 OB로 갔다고 한다. 즉 김영덕 감독이 삼성으로 가기 전까지 둘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24] 전술했듯 김영덕 역시 삼성에서 제의를 받은 상황이었다.[25] 이 와중에 OB감독으로 승진한 김성근과 수석 겸 타격코치 이광환도 야구관의 차이로 여러차례 충돌하였고, 결국 이광환은 수석코치직에서 물러나 일본미국을 오가며 3년 간 장기 연수를 떠났다. 이후 돌아와서 2군 감독을 하다가 끝내 김성근을 밀어내고 OB 감독을 차지한다. 계약 만료로 물러난 김성근은 바로 태평양 감독으로 재취업에 성공했다. 1982년 원년우승을 이끌어낸 김영덕-김성근-이광환 3자가 서로간에 감정의 골이 생겨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26] 흥미롭게도 셋 다 베어스(셋 다 감독), 트윈스(각각 2군 감독, 감독, 감독), 이글스(셋 다 감독)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이력이 있다.[27] 결과적으로 북일고 감독으로 가면서 무산되었다.[28] 김영덕은 타격지도는 박영길이 가장 잘 하니까 영입해야 한다고 윗 선에 주장했다고.[29] 다만, 김영덕이 박영길의 연락처를 저장하지 않았었는지 부고 소식을 TV를 통해 보았고, 조문을 못 가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남겼다.#[30] 당시 수혜자들 중 한명이 이상목인데, 이 일본 교육리그에서 다이에의 투수코치로부터 포크볼을 배워서 100승 투수이자 롯데 자이언츠금지어이자 90년대의 대표적인 연투형 투수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31] 좌완 이선희 코치, 우완 김명성 코치.[32] 다만 빙그레 팬들은 김영덕 감독에게 호의적이다. 사실 위에 언급되었듯이 빙그레 이글스 시절에도 기록조작 논란에서는 자유롭지 못하긴 하지만, 어쨌든 창단한 지 얼마 안 된 신생팀에게 별 기대도 안하던 한국시리즈 진출/정규 리그 우승이라는 영광을 가져다 준 감독이므로 긍정적인 인상이 더 강할 수밖에 없기 때문. 굳이 원망을 하려면 한국시리즈 상대팀당시 그 팀 감독을 욕하고 말지 다만 기록 밀어주기는 그렇다치고 져주기 게임 때문에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은 전적이 있는 만큼 마냥 칭송하기는 좀 그런 면이 있어서, 그냥 '왕년 리즈 시절을 이끌었던 명감독' 정도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33] 이전에 이것과 그나마 유사한 형태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대타인 외국인 감독이었는데, 이 경우는 타격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선발은 자력으로 버텨야 했다. 그리고 이 경우는 선발이 셋업이 나올 때까지 버티는 거라서 선발 7이닝-셋업 1이닝-마무리 1이닝의 형태가 많았다. 즉 선발에 대한 부하가 굉장히 크고, 적어도 셋업은 갖춰줘야 밥값을 한다. 대신 장타가 강화되기는 하지만.[34] 지금 50 ~ 60대 야구인들 중에서도 혹사에 대해 근성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80대 김영덕옹의 연배를 생각하면 혹사에 대한 개념이 당연히 다를 것이라 추정된다. 실제 일본야구에서도 올드 스쿨들은 근성론이나 웨이트 트레이닝 무용론등을 아직도 주장하는 할배들이 많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아무래도 혹사에 관대한 사상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35] 인터뷰를 할 때 기자한테 김성근에 대해 (당시) 현역 감독이고 하니 서로 감정 상하지 않도록 안 좋게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적도 있다.[36] 많이들 착각하는 사실인데 인터넷의 두 감독 빠와 까들이 원수지간인거지 정작 당사자들은 아주 친한 건 아니어도 그렇게 막장으로 틀어진 관계도 아니다. 물론 김성근의 호칭문제나 이중 오더 사건 등으로 인해 대략 21세기 전까지는 불편한 사이가 맞기는 했지만 2002년 한국시리즈를 기점으로, 둘을 제외한 원로 야구인들이 김인식과 강병철을 빼면 전부 은퇴했고 같이 늙어가던 입장인지라 그나마 사이가 예전보다는 양호해졌다. (애초에 둘 사이에 김인식이라는 가교가 있어서 진짜 어지간하지 않으면 완전히 파국으로 가긴 어렵다) 김응용이 은퇴 후 가진 인터뷰에서 한화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에게 덕담도 해준 적 있고 유명한 야신 발언도 풀버전은 "김응용:마치 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 / 김성근:그러면 신을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는가"인데 진짜로 앙숙이면 저런 식의 드립들이 오가지는 않는다. 게다가 2015년 올스타전 김응용 은퇴식 때도 김성근은 '최고의 감독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 줄 필요가 있다.'식의 덕담을 했다. 김응용과 진짜로 앙숙인 원로 야구인은 김성근이 아니라, 김응용의 한화 감독 시절 "나이 들어서 자꾸 욕심내면 안 된다"면서 공개적으로 비판할 정도였던 이광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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