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김동한 金東漢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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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백산(白山) |
출생 | 1892년 10월 8일 |
조선 함경남도 단천 | |
사망 | 1937년 12월 7일 (향년 45세) |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이란현 | |
학력 | 하바로프스크 육군유년학교 (졸업, 1911–?) 이르쿠츠크사관학교 (졸업, 1913–16) |
수상 | 훈6위경운장 (1936. 7. 10.) 훈6등단광욱일장 (1940. 2.)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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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1925년에 변절하여 눈에 띄는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으며, 1930년대 중반 만주 일대의 항일운동 방해와 대민통제사업의 핵심적인 주도자들 중 한명이다.[A]2. 생애
2.1. 변절 이전
1892년 10월 8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다.[2] 평양대성중학교를 나와 1910년에 이동휘를 따라 간도로 이주했다. 1911년 4월에 러시아 제국군 장교를 양성하는 하바로프스크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며, 1913년 4월에 이르쿠츠크사관학교에 입학해 1916년 3월에 졸업했다. 같은 해 이르쿠츠크 보병 제27연대 소위로 임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현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모스크바에서 공산당에 입당해 혁명 반대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B]1921년엔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 고려혁명군 장교단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동한은 트로츠키의 총애를 받았지만, 1922년 6월 반유대주의운동에 참여한 걸로 인해 당직을 박탈당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감옥에 수감되었다.[4] 1923년에 석방되어 우페이푸에 의탁했으나, 1924년 소련 홍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인도됐다.[A]
2.2. 변절과 그 이후
1925년 8월경에 조선에 귀환하게 되었다. 귀환한 후 조선총독부,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연을 맺으면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기 시작했다.[C]1931년 일제가 간도에 본인들의 지배력을 높이고자 민생단을 조직할 때 잠시 참여했으며, 조선총독부간도시찰반의 일원이 되어 몇몇 인물들과 간도룽징에서 선전활동을 벌였다. 1931년 말에 다시 귀국했고, 1934년 4월에 일제의 옌지 헌병대가 계획한 간도협조회의 설립을 주도했으며, 9월 6일 정식으로 조직해 선언, 규약, 강령을 제정했다. 간도협조회에선 본부회장을 맡았다.[A] 그 당시 일본 관동군 헌병사령부 연길헌병대장 가토 중좌와 연길독립수비대장 다카모리 중좌는 김동한을 내세웠고, 또 신뢰했다. 참고로 김동한은 조선인 출신으로 러시아어와 중국어도 잘했다.
그는 간도협조회를 총지휘하며 공산당원 및 항일부대원들을 살해, 체포하거나 전향시켰다. 전향자들은 간도협조회의 일원으로 쓰이거나 간도협조회 공작원에 투입돼 항일운동을 저지하는데 사용됐다. 그는 항일군, 항일세력 파괴공작에 힘썼다. 항일세력엔 정탐꾼을 보내기도 했다. 민간인들에겐 항일을 배척하고 일제의 치안숙정공작에 적극협력할 것을 강요하며 선전활동을 벌였다. 직접 부대를 인솔해 항일부대에 맞선 것도 수차례 했다.[A][9]
김동한은 여러 직책을 맡으며 각지에서 활동했다. 덤으로 항일세력이나 항일부대를 무너트리는 일도 착실히 진행했다. 한 예로 김동한은 1935년 10월 직접 공작원을 데리고 왕청현에 있던 중국 공산당 4개 지부를 파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1936년 2월 20일에는 항일유격대원 50명을 함정으로 유인해 투항시켰으며, 그해 7월 7일에는 동북항일연군 부대원 25명을 돈화현에서 사살했다. 이와 같은 김동한의 활동으로 투항 및 체포된 인원이 최대 2,500명을 넘겼다. 1934년 당시 동만주 지역 항일유격대원이 그가 투항 및 체포한 인원의 절반 정도인 1,253명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일제 입장에서 그의 활동은 무시할 수 없었다.
2.3. 사망
1937년 12월 7일, 김정국을 회유하려 치안공작반을 이끌고 그를 찾아갔으나, 이는 함정이었고 결국 사살당했다.[C]사후 장례가 치러졌고 각지에서 추도회가 열렸다. 1936년 7월 10일 훈6위경운장이 추서됐고, 1939년 12월 옌지공원에 간도협조회 기념비와 함께 본인의 동상이 세워졌다. 생전 훈공을 받고 매달 헌병 하사관 군조급 대우인 120원의 수당을 받았다. 야스쿠니 신사에 위패가 안치되었고, 1940년 2월 훈6등단광욱일장이 수여됐다.[A][B][C]
[A]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ㄱ–ㅂ" (2009), 김동한 부분[2] 정확히는 파도면 하서리 3번지다.[B] 임종금, "7화. 일제 위해 목숨 바친 김동한과 그 후예들", 「경남도민일보」, 2015.7.20., 2023년 1월 7일 확인[4] 그 당시 소련군 정치장교 가운데 10.3%가 유대인이었고, 김동한을 신뢰하던 트로츠키 또한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유대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반유대주의 활동으로 처벌받은 것.[A] [C] "김동한(金東漢)",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A] [A] [9] 그가 지휘한 간도협조회는 설립 1달만에 회우너 수가 1,000명을 넘었고, 1년 뒤인 1935년에는 6,411명으로 늘어났다. 김동한이 회장으로 있던 간도협조회는 대부분의 간부들이 항일운동 경력이 있거나 공산주의 활동 전력이 있는 조선인들이었다. 말 그대로 친일 변졀자들의 집합체였던 셈.[C] [A] [B]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