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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김광숙 金光淑 | Kim Kwang Suk | |
출생 | 1964년 1월 |
평양시 대성구역 | |
사망 | 2018년 1월 14일 (향년 53~54세)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전직 | 보천보전자악단 가수 평양학생소년궁전 예술창조과 성악지도교원 |
주요서훈 | 공훈배우, 인민배우 |
정당 | |
학력 | 평양인흥중학교 금성학원(북한)[1] |
가족 | 시아버지 전동우[2] 배우자 전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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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북한의 대표 가수였으며 단연 시대를 대표했던 가수이다.
2. 생애
20대의 김광숙 |
50대의 김광숙 |
학생 시절부터 노래에 소질을 보여 평양학생소년예술단에서 활동했으며 1983년 일본 공연에 참가했다.
평양인흥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청년예술단에서 성악배우로 활동하다가 1986년 보천보전자악단에 입단했다.
1988년 공훈배우 칭호, 199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80년대 북한에 전자음악 열풍을 불러일으킨 원조 가수이며 바로 다음해 전혜영이, 1990년대 초반 리경숙, 리분희, 조금화가 등장하여 전자음악 열풍을 일으켰다.
1983년 평양학생소년예술단 일본공연, 1991년 보천보전자악단 일본공연에 참가했다.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2011년 왕재산경음악단 공연, 2015년 추억의 노래 등에 출연하며 평양학생소년궁전 예술창조과 성악지도교원으로 있다가 심장마비로 2018년 1월 14일에 향년 54세로 눈을 감았다.
다음날인 1월 15일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죤에 부고가 났고 김정은이 직접 조화를 보냈다고 보도되었다.
외부 세계에는 전혜영, 리경숙이 잘 알려져 있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는 이들보다 인기 많은 가수였다고 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3. 대표곡
1991년 1집 앨범 |
- 잊지말자 우리 우정(1988)
- 빛나라 정일봉(1988)
- 생이란 무엇인가(1989)
- 사랑의 봄빛(1989)[4]
- 눈꽃이 핀 고향집(1989)
- 그리워(1989)
- 생의 흔적(1989)[5]
- 남해가의 붉은꽃(1989)
- 황금나무 능금나무 산에 심었소[6]
- 천리마 달린다[7]
- 장군별[8]
-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 푸른 버드나무(1990)
- 어머니 생각(1990)
- 친근한 이름(1990)
-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1991)
- 같이 가자요(1991)
- 그 이름 부르네(1991)
- 고향집의 봇나무(1992)
- 고향집 추억(1992)
- 우리의 아버진 김정일 원수님(1993)
- 그이의 한생(1993)
- 포전길 걸을때면(1994)
- 인민은 부르며 따르네(1995)
- 우리를 부러워하라(1997)
- 인민의 축원을 받으시라(1999)
- 아 그리움속에 기다림속에(1999)
- 사랑은 푸르다(프랑스 노래)
- 슬픈 천사(프랑스 노래)
- 브라더 루이(독일 노래)[9]
- 알로하 오에(미국 노래)
- 백만송이 장미(러시아 노래)
- 처녀는 서있네(러시아 노래)
- 말리노브카(러시아 노래)
- 스무글랸카(러시아 노래)
- 나의 트빌리시(러시아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