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00:26:43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초/등장인물


1. 왕가 웅(熊)씨2. 주요 명가
2.1. 소(昭) 씨2.2. 경(景) 씨2.3. 굴(屈) 씨2.4. 장(莊) 씨
3. 기타

1. 왕가 웅(熊)씨

2. 주요 명가

2.1. 소(昭) 씨

2.2. 경(景) 씨

2.3. 굴(屈) 씨

2.4. 장(莊) 씨

3. 기타


[1] 본래 제와 노-송-월은 적대 관계였지만, 이번 전쟁에 한해 서로 간의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초에 맞서 싸웠다.[2] 사실 웅량부 본인도 웅장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를 생각이 초기만 해도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지켜보자'고 생각하다가 당시 시점에서는 찬탈할 생각을 접은 상태였다.[3] 파나라 측에서는 웅량부를 찬탈자로 규정하고 언플을 시전했으나 파나라로 돌아선 상용, 찬탈자 타이틀이 붙어서 망설인 언을 제외하면 전부 웅량부를 지지했다.[4] 이외에도 초위왕 당시의 진나라와 초나라 공/왕실은 사돈지간이기도 하였다.[5] 머리가 나쁜건 전혀 아니지만 원 역사에서처럼 상당히 감정적이다.[6] 제이외교관인 이유는 합종군으로 가는 스노우볼링을 굴려주고 본의아니게 영탕런도 도운 제일외교관 영사가 있기 때문.[7] 코노스바의 카즈마 파티 중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했다. 사토 카즈마는 악조, 메구밍은 악구, 아쿠아는 위에 써놓았듯 웅괴로 등장했다.[8] 판정 중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서 AA 체인지와 관련된 판정까지 한 결과 바뀐 AA.[9] 황헐이 내부에서 반조정 세력을 진압하고 한중군이 반군을 혈전 끝에 격파하여 수도가 점령당하는 건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10] 아직 남양 일대가 진압당하긴 했어도 안정적인 상황도 아니었던 데다가 이는 반란 세력과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한중 세력을 동시에 숙청하는 빌미를 잡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초의 두 정예군이 반란을 일으킨 남양과 그걸 진압한 한중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나라를 말아먹을 결정이었다.[11] 사실 이건 웅횡이 영도에서 도망친다고 전권이 황헐에게 넘어간지 1년도 안 된 시점인 덕이 컸다. 아직 반란이 끝나지도 않았었고, 영도 경비는 실제로 반란 진압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황헐의 관할이었다.덕분에 웅횡은 판정 기회도 없이 허무하게 유폐당했다.[12] 겉은 병사지만 실제로는 황헐의 협박에 스스로 독이든 음식을 먹고 자결[13] 시기상 초의제 웅심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음[14] 항우의 반란을 핑계로 황제가 자신이 잠시 맡겠다고 말한다. 언제 돌려준다는 언급은 없었다[15] 아래의 강을과 함께 호가호위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16] 표면상으로 소해휼은 웅량부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17] 초나라의 재상으로 장의가 거지꼴로 돌아다니던 시절, 그를 문객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18] 굴개의 증언으로 웅괴가 어린시절부터 소양이 업어서 길러왔기 때문에 웅괴에게 있어서 소양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19] 때문에 웅괴가 친정을 할때도 그녀의 뜻을 꺽을수있는 사람은 오직 소양뿐이었다.[20] 굴원이 살아있을적 소양이 경리를 굴원과 비교하며 능력을 폄훼한탓에 경리는 소양에게 매우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경리 역시 강한의 중요성을 알고있었지만 이탓에 소양의 유언을 일부러 무시하였다.[21] 이때 소양을 말리지 않았으면 소어는 진짜 맞아죽었을 정도였다.[22] 주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도 믿게 할 기세로 철저히 뿌려진 기만정보에 대차게 당하고 말았다.[23] 초선왕 대의 초나라 귀족으로 주로 외정을 많이 다녔다.[24] 메타적으로 통솔이 100까지 상승했다. 원래는 한거와 마찬가지로 80대였다고 추정.[25] 다만 이탓에 웅괴의 분노를 사서 영윤자리와 상집규 작위를 내려놓게 되었다.[26] 숙련도가 딱 100, 최대치였다.[27] 이때 전투에서 다이스에게 말 그대로 사랑을 받으면서 이기자, 참치들이 리롤권을 소모하며 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조선의 크리 후 필승 보정이 사라진 상황에서 기어이 합종군의 승리 다이스가 뜨며 조선군까지 패퇴시킨다.[28] 이전에 빼앗긴 상집규작위도 이때 되찾았다.[29] 제나라가 조선의 공격에 두려워할때 이를 다그치고, 태산을 장악하여 방어선을 갖추고 자신이 수춘에 주둔하여 이를 돕겠다고 약속하자 제조정 모두가 안심하였다.[30] 이후 꿈에서 장자를 만나 서민의 검과 제후의검을 받았지만 마지막 천자의 검은 받아내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자신의 애검이 반토막 나있는것을 목격한다.[31] 이전 위장과의 싸움에서 위장의 꾀로 군사를 물린전이 있었지만, 전투에서 지지는 않았다.[32] 이 패전에서 예전에 받았던 상집규작위를 또다시 내려놓게 되었고, 경취는 자신은 상집규작과 인연이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33] 훗날의 오장원[34] 이때 사실상 경씨가 완전히 밀려나는 형국이 되었다.[35] 말년에 조정의 지원이 적다고 불평하는 남양유력자들을 달래고 있었다.[36] 맹자는 경취의 이 말을 전해듣고서는 전국시대에 군사를 이끌고 명성을 쌓아왔으면서 그런 말이나 하는 것을 보니 경취가 천도란걸 깨닫지 못한 것은 알겠다고 디스했다. 그러면서 "무릇 도라는 것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이 구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라 평하였다.[37] 경씨의 근신이 풀리기 까지 무려 5년이 걸렸다. 자중하지 않으면 처벌이 가중될 수도 있었으니 별 수 없었던 것. 같은 이유로 장교의 난 당시에는 근왕-초강경적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38] 말이 기벽이지 지역 유지의 입장에서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을 중앙의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간주해 없을 수도 있던 저항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선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제압되었을 때 분을 이기지 못해 죽은 것도 혼자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난자해 죽였다.[39] 당시 한나라는 대부 신차가 초의 첩자로 밝혀저 그 측근들까지 즉결처분 받은 이후 연종군의 전과가 좋아졌다는 것 때문에 이를 사실로 보고 있었으며 조선에 빚을 진 셈이 되었다. 때문에 능력이 입증되었다면 모를까 그마저도 아닌 가상적국 초의 명문 무가 출신을 영입하기에는 대외신뢰도에 대한 우려가 부각되었다.[40] 웅괴의 무리한 전쟁요구를 경취가 영윤자리 걸면서 막아서자 웅괴는 즉시 경취를 영윤에서 해임하고 그자리에 경리를 앉혔다.[41] 스스로 군사적으로 재능이 있다고 자평하였으나 이후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군사적 재능이 좋은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42] 원로중의 원로라 당시 삼대세가의 대표급인 소해휼도 아기취급한다.[43] 경취가 S급이라면 굴개는 A급내지 A+급[44] 6차 수춘전투[45] 그러나 도망친 송군 상당수가 수춘성에 들어가서 성을 취하지는 못하였다.[46] 삼려대부 자리를 본인이 원하였는데, 삼대세경가의 일은 반드시 삼려대부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47] 천문(天問) 그 중에서도 어찌하여 살찐 제사육을 바쳤는데 천제는 달가워하지 않았는가?라는 부분을 인용했다.[48] 굴개 본인부터 각오하고 저질렀기에, 영질을 벤 후 군말없이 무기를 버리고 경취에게 잡혔다.[49] 예외로 장의와는 절대로 사이가 좋아질수 없다고 본인이 단언하였다.[50] 훗날 그녀의 시 천문을 영질과 경취가 부르며 죽었다.[51] 겉으로는 굉장히 냉혹한 성향을 보이며 도적단을 운용했지만, 그것을 넘어설 정도로 정이 많은 성격이었고 이는 전략적으로 이미 짠 판을 반쯤 스스로 엎는 결점이자 인간적인 면이 되기도 하였다.[52] 라고는 해도 동초 전체가 2차례에 걸친 기존 봉기와 이후 방치이자 사실상의 일방적인 수탈과 동원이 이어지면서 해당 지역은 고작해야 3만여의 잡병과 수천의 관군이 동원력의 최대가 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유사시 인근 지역에서 준비한 진압병력도 1만 7천여가 다일 지경으로 초나라의 내부는 여력이 고갈 상태였다.[53] 이때 소어가 이끄는 초군은 와해직전이었으니 사실상 장교의 승리라 봐도 무방하다.[54] 남양의 난 진압을 위해서 동원한 한중군에서 사상자만 6천이고 경상까지 합하면 1만의 피해를 입었다.[55] 위의 소해휼과 마찬가지로 호가호위로 알려진 인물. 전국책에 따르면 무려 6번이나 소해휼을 참소한 적이 있다.[56] 설득은 설득인데 그게 초나라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57] 세운공이 많아서 경취가 높은 자리에 올려줄것을 요청했지만 외지인이란 이유로 번번히 반려되었다.[58] 남양의 난 당시 진압에 공훈이 가장 컸던 한중군의 지분을 강한 사람들과 중앙의 삼대세경가와 동등하게 맞추게 되었다. 자칫하면 당시의 일을 재조명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59] 당장 거양 반환건도 반란으로 인해 연종이 다시 미뤄진 데다 조선이 잦은 반란으로 초의 통제력을 의심하고 있고, 왕까지 유폐당한 상황이라 외교적으론 궁지에 몰린 거나 마찬가지고 내부적으로도 본인이 끝끝내 피하려고 했어도 결국 신하가 왕에게 칼을 들이대고 권력을 뺏은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찬탈 소리가 나오기 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60] 추정상 웅횡을 독살한것이 드러난것으로 보인다.[61] 가문이 희성이라 잘해봐야 군수가 끝이었기에 공을 세워 그 이상을 노리고 있다.[62] 주현의 군사까지 합하여 무려 4만이란 대군이었지만 오합지졸의 봉기군이었기에 장기전으로 모랄빵이 터져 와해되었다.[63] 장량이 범부라도 영수를 죽일수 있는 사냥이라고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