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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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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Gyumri_general_view_from_the_central_square.jpg
규므리 시청이 위치한 중심지 바르다난츠 광장(Վարդանանց հրապարակ)
규므리
Գյումրի
파일:Coat_of_arms_of_Gyumri.png
행정
국가 <colbgcolor=white,#1f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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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UTC+4
인문 환경
인구 122,000명(2011년)
인구 밀도 2,300명/km²
면적 54km²

1. 개요2. 역사3. 군사4. 관광5. 교통6. 여담

1. 개요

아르메니아어: Գյումրի (Gyumri, 규므리)
러시아어: Гюмри (귬리)
튀르키예어: Gümrü (귐뤼)

아르메니아 북서부에 있는 아르메니아의 제2의 도시이자 시라크주의 주도이다. 해발 1,500m에 위치한 고원도시로 연교차가 심하며, 냉대 습윤 기후(Dfb)에 속한다.[1]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함께한 도시로, 러시아 제국 시기 크게 발전하여 한때 수도 예레반보다 규모가 컸던 적도 있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제1차 세계 대전 등의 격동의 시기 이후 현 아르메니아 제2도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의 피해를 직격으로 맞아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지만 여전히 아르메니아에서 예레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로 기능하고 있다.

2. 역사

본래 이름은 쿠마이리(Կումայրի, Kumayri)였다. 현 명칭인 규므리는 이 쿠마이리가 변형된 명칭이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곳이었고, 기원전 8세기 우라르투 왕국의 비문 유적에도 이름이 남겨진 역사깊은 도시이다. 이후 수세기 동안 여러 아르메니아계 왕국이 차지하던 곳이었다. 6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침략으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으나, 9세기 경 압바스 왕조의 쇠퇴로 말미암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근처 바그라투니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아니 주변의 정착촌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0세기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 12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아니가 황폐화되면서 같이 몰락하였다.

이후 15세기 사파비 제국에 의해 동부 아르메니아 지역과 함께 점령되었으며, 이후 카자르 왕조 시기 에리반 칸국에 속하였다.

1804년 러시아 제국-페르시아 간 전쟁 당시 가장 먼저 탈취된 도시가 쿠마이리였고, 1814년 굴리스탄 조약으로 확고히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37년 니콜라이 1세가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2]의 이름을 따 쿠마이리를 알렉산드로폴(Александрополь, 아르메니아어 Ալեքսանդրապոլի)로 개칭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남캅카스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는 이 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1830년대 시기부터 계속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대비하여 규므리에는 러시아 군의 군사 기지가 건설되었다.[3] 또한 이 곳에 캅카스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카르스, 에리반 현(Эриванская губерния)의 중심도시 예레반을 연결하는 철도역이 1899년에 들어서면서 교통의 중추도시가 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피해 온 아르메니아인들이 몰리면서 도시 규모가 빠르게 성장하였다. 1897년 규므리의 인구는 3만명을 돌파하여 같은 시기 예레반 인구 2만9천명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또한 아제리인들의 비중이 높았던 예레반과 달리 아르메니아인의 비율이 70%를 웃돌며 예레반보다 더 큰 동부 아르메니아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제국이 10월 혁명으로 붕괴하면서 튀르키예 국경에 위치한 규므리는 격동의 시기를 맞았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규므리를 점령했던 오스만군이 세계대전 종전 이후 물러나면서 신생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이 이 도시를 차지했으나, 세브르 조약으로 말미암은 아르메니아의 태생적인 대외갈등 및 전쟁으로 불안한 정국 속에 있었다. 결국 1920년 11월 튀르키예군에 의해 점령되고 튀르키예-아르메니아 간 알렉산드로폴 조약으로 11개월간 튀르키예가 점거하였으나, 곧 소비에트 연방이 아르메니아 1공화국을 합병하면서, 1921년 10월 소련-튀르키예 간 조약인 카르스 조약의 결과로 소련 치하 아르메니아 SSR에 편입되었다. 1924년 알렉산드로폴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 레니나칸(Ленинакан, 아르메니아어 Լենինական)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 SSR의 중심 도시 기능을 예레반이 가져가긴 했으나, 여전히 소련의 대 튀르키예 교류의 최전선 도시로서 아르메니아 제2도시 위치를 확고히 유지하였다.

1984년 규므리의 인구는 22만명을 돌파하였으나,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소련 붕괴의 또 다른 계기를 제공한 이 지진으로 인해 규므리는 재건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파괴되었다. 현재도 규므리 시내 곳곳에 재건되지 못하고 파괴된 채로 남아있는 건물들이 남아있을 정도. 지진으로 인해 10만명의 인구가 증발하여 1989년에는 12만명의 인구만이 남았다. 소련 붕괴 이후 1992년 레니나칸은 현 명칭인 규므리로 환원되었다. 2001년 기준 인구가 15만명으로 소폭 증가하였으나 다시 인구가 감소하여 2011년 기준으로 121,976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3. 군사

규므리는 예로부터 러시아의 대 튀르키예 전진기지로서 성장한 도시로, 러시아 제국 시기부터 러시아군이 주둔하던 곳이었다. 아르메니아 독립 이후에도 러시아는 이 곳에 주둔하고 있고, 1995년부터 제102군사기지를 설치하여, 5000여 명의 러시아군 병력이 주둔하며 S-300MiG-29로 무장했다. 원래 25년 기한이었지만, 2010년에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아르메니아 방문 때 49년(만료기간 2044년)으로 연장했다.

4. 관광

러시아 제국 시기 발전했던 도시답게 19세기 러시아 제국 당시 지어진 건물이 시내 중심가 곳곳에 있다.

파일:Gyumri_Black_Fortress.jpg
세브 베르드(Սև բերդ), 검은 요새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Black Fortress이다.
러시아 제국이 지배를 확립한 후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을 대비해 1844년에 완공한 요새이다. 규므리 시내 서쪽 언덕에 위치하여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요새 외부에는 당시 포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는 한때 공연, 전시장으로도 사용되었고 현재에도 공연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파일:Mother_Armenia_Statue_of_Gyumri.jpg
세브 베르드 근처에 있는 어머니 아르메니아(Մայր Հայաստան)상. 1975년에 세워졌다. 기둥에는 제2차 세계대전 및 아르메니아 대학살 시기 희생된 아르메니아인들을 추모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예레반에도 어머니 아르메니아 상이 있는데, 큰 검을 들고 있는 예레반의 것과 달리 횃불을 들고 있다.

파일:Holy_Saviours'_Church_Gyumri.jpg

파일:Holy_Mother_of_God_Church_Gyumri.jpg
문서 처음에 있는 시내 중심지 바르다난츠 광장을 둘러싸고 두 개의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성당이 있다. 위에는 구세주 교회(Սուրբ Ամենափրկիչ Եկեղեցի, Holy Saviours' Church), 아래는 성모 교회(Սուրբ Աստվածածին Մայր Եկեղեցի, Holy Mother of God Church)이다. 두 성당 모두 시내 중심에 위치하여 규므리의 랜드마크였으나, 아르메니아 대지진으로 인해 크게 파괴되었다. 구세주 교회 앞에는 당시 파괴되었던 첨탑 조각과 추모비가 전시되어 있고, 성모 교회에는 떨어져나간 첨탑 십자가가 전시되어 있다. 성모 교회는 복구가 완료되었으나, 구세주 교회는 현재에도 복원 중이다.

파일:Abobyan_Street.jpg
이외에도 바르다난츠 광장 주변 아보뱐 거리(Աբովյան Փողոց)에 늘어선 러시아 제국 시기 검은 건물들이 늘어선 풍경이 인상적이다.

5. 교통

철도 교통의 요지로 성장했던 도시답게 수도 예레반, 조지아 트빌리시로 갈 수 있는 철도편이 존재한다. 튀르키예 방면으로는 철도가 놓여있긴 하지만 아르메니아-튀르키예 국경은 폐쇄되어 갈 수는 없다.

예레반, 서부 조지아 쪽으로 가는 마르슈르트카 버스 정류장도 있다.

규므리 시라크 국제공항이라는 공항도 있으나 국내선은 없고 러시아행 밖에 없다.

6. 여담

1996년에 방영된 영창피아노평화의 소리〉편이 규므리시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상기한 구세주 교회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사.

끝말잍기에서 시보귬 다음으로 할 수 있는 단어다. 이 다음으로 리튬


[1] 1월 평균 -8.2°C, 7월 평균 20.1°C이다. 북위 40도에 평균고도 1,500m 이상(저지대보다 평균 기온이 9~10°C는 낮다)의 고지대인데도 여름 기온이 상당히 높다.[2] 프로이센의 샤를로테.[3] 러시아 제국 시기 세워진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시가지 서쪽에 위치한 세브 베르드(Սև բերդ, 검은 요새라는 뜻)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