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 공방전 交州攻防戰 | ||
시기 | 263년 ~ 271년 | |
장소 | 교주(交州) 일대 | |
원인 | 오나라의 폭정으로 인한 여흥의 반란 및 위나라로의 투항 | |
교전 | 오(吳) | 위(魏) ↓ 서진(西晉) |
황제 | 오 황제 손휴 ↓ 오 황제 손호 | 위 황제 조환 ↓ 진 황제 사마염 |
지휘관 | 곽익(남중제독) 양직(교지태수)◎ 모경(울림태수)☠ 동원(구진태수)† | 유준(교주자사)† 수칙(전부독)† 고용(장군) 설후(위남장군, 대도독) 도황(창오태수) 우사(감군) 이욱(감군) 서존(독군) |
참전 장수 | 맹간(아문장)◎ 맹통(아문장) 이송(아문장)☠ 왕업(아문장) 찬능(아문장)☠ 왕소(구진태수) 해상(아문장) 해계(아문장)☠ | 수윤 |
지원군 | - | 양기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약 1만(부엄)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오나라의 교주 탈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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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흥이 반란을 일으킨 263년부터 오나라가 위나라, 진나라와 교주를 두고 싸운 전역. 중국에서는 교지의 난(交阯之亂)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2. 발단
2.1. 여흥의 반란과 곽익의 교주 정벌
263년 2월, 교주태수로 임명된 손서(孫諝)와 손휴가 파견한 등구(登邱)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폭정을 일삼자 백성들이 반란을 모의했는데, 교지군의 관리를 지내던 여흥(呂興)이 백성, 병사들을 선동하고 이민족들을 불러들여 교주는 혼란에 빠진다. 5월에 여흥이 반란을 일으켜 손서와 등구를 주살하고 여흥이 교지군에서 들고 일어나자, 교지군 이남에 있던 구진군, 일남군이 호응하여 같이 반기를 든다.이에 그치지 않고 여흥은 위나라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자를 보내 태수와 지원병을 요청했으며, 위나라는 여흥을 사지절, 도독교주제군사, 남중대장군으로 삼고, 안정현후의 작위를 하사하면서 곽익을 요령교주자사로 삼아 여흥을 도와 교지군, 구진군, 일남군을 평정하도록 한다. 그러나 위나라가 도착하기도 전에 여흥은 공조 이통에게 살해당하며, 이 때 위나라가 진나라로 교체되면서 사마염이 즉위하자 여흥의 후임으로 익주 건녕군 사람 찬곡(爨穀)을 태수로 삼았다.
찬곡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자 익주 파서군 사람 마융(馬融)을 태수로 임명하지만, 268년에 마융도 병으로 죽으면서 곽익은 익주 건위군 사람 양직(楊稷)을 교지태수로 삼는다.
3. 전개
3.1. 유준의 교주 탈환 시도
264년에 오나라에서는 여대가 226년에 제안한 교주, 광주의 분할 정책을 실시해 위나라에 항복한 교지군, 구진군, 일남군을 오나라의 영역인 합포군, 주애군과 합쳐 교주로 재편하고, 265년에 유준을 교주자사로 임명하여 위나라에 넘어간 3군을 탈환할 준비를 한다.268년 10월, 오나라의 교주자사 유준은 전부독 수칙, 장군 고용과 함께 3차례에 걸쳐 진나라 소속의 교지를 침공하지만, 양직이 침공을 모두 막아내면서 울림군과 구진군이 양직에게 귀부하며, 양직은 장군 모경(毛炅)과 동원(董元)을 합포로 보내 옛 성을 함락시킨다. 유준과 수칙이 전사하고 오나라 병사들은 격파되어 합포에 흩어지며, 양직은 모경과 동원의 공을 조정에 상표해 모경은 울림태수, 동원은 구진태수에 추천된다.
3.2. 설후의 교주 정벌
오나라에서는 269년 11월에 도황을 창오태수로 임명하고 설후에게는 위남장군에 대도독의 지위를 내려 도황, 우사와 함께 교주 정벌을 명한다. 설후가 이끄는 오군은 269년에 형주에서 출발해 건안군에서 출발한 이욱, 서존과 군세를 합쳐 교주로 나아갔고, 지난 전투에서 모경 등에게 전사한 전부독 수칙의 아들 수윤도 종군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로 한다.271년에 오군이 교주를 공격하자 양직은 이에 맞서 4월 여름에 오군을 격파되어 도황은 장수 둘을 잃었고, 도황이 이끄는 오군은 야습으로 동원을 공격해 보물을 빼앗았다. 설후가 도황에게 장수를 둘씩이나 잃었다고 책망했지만, 도황은 부하들이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 작전이 실패했다고 핑계를 대고, 자신이 노획한 동원의 보물을 내세워 처벌을 면한다.
도황은 설후로부터 전부독에 임명되어 합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구진을 공격하는 기습상륙작전을 벌여 성공했고, 구진태수 동원은 도황을 유인했지만, 도황이 이를 간파하고 진군을 격파한다. 패배한 동원이 성에 틀어박히자 도황은 진군을 분열시키기 위해 혜계의 동생이자 동원의 부장인 해상이 해계에게 편지를 주게 하고, 해상을 수레에 태워 진 앞에 내보내서 동원이 해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동원이 해계를 죽이면서 도황은 구진을 공격해 점령했고, 양직은 동원이 죽자 왕소를 구진태수로 보냈으나, 구진을 함락한 오군이 교지를 공격했다. 양직은 저항했지만 성 안의 양식이 떨어졌고 곽익은 이미 죽었기에 구원할 수 없어서 원군이 없었으며, 성이 함락되면서 모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양직은 건업으로 호송되는 중에 사망하고 도황이 모경의 용맹을 높이 사서 그를 살려두려 했으나, 모경이 끝까지 도황을 죽이려 하자 수윤에게 죽이도록 한다. 수윤은 모경을 산 채로 배를 가르고 간장을 잘라내면서 이래도 다시 모반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모경은 도리어 '너희들의 주군을 죽이지 못해 한이라면서 네 애비는 죽은 개만도 못하다'고 욕했다.
오나라가 교주를 탈환하는 것을 성공해 도황이 공을 세우자 설후는 이전에 책망한 것을 사과했으며, 교지를 점령하고 돌아가는 길에 사망한다.
4. 결과
4.1. 오나라의 교주 탈환
우사는 교지를 점령하자 부엄까지 토벌했고 교주자사에 임명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고, 도황이 교주자사에 임명되어 탈환한 교주를 안정시킨다. 도황은 구진의 공조인 이조가 진나라에 항복하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했고, 소수민족인 이료 등을 진압하며 교주목, 전장군 겸 교주목도독교주제군사에 임명되어 교주를 계속 다스렸다.후에 손호가 도황을 무창도독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교주의 백성들은 도황이 자신들을 계속 다스려 주길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주자사로 남겨뒀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도황은 성공적으로 교주를 안정시켰다고 볼 수 있다.
5. 평가
촉한이 멸망해 삼국이 사실상 깨진 시기인데다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변방인 교주에서의 사건이라서 인지도와 인기가 낮아서 다루는 작품도 거의 없고, 삼국지 후반부를 자세히 다루는 작품들조차도 지나가듯이 설명하는 수준으로 시공간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위/진나라 측의 구성으로는 남중에서 여러 차례 군사적인 실적을 쌓은 곽익이 이끌었고, 양직, 모경, 맹간, 맹통, 이송, 찬릉 등 남중의 대성으로 보이는 가문의 일원들로 진나라는 대개 해당 지역에서 세력이 큰 현지인들에게 일임하다시피 했다. 오나라 측은 설후, 우사 등 오나라에서 고관을 지낸 가문의 2세대 장수들이나 유망주들이다.
해당 전역은 여흥의 반란 시점인 263년부터 271년까지 무려 8년 가까이 이어졌으며, 오나라 측은 교주를 분할하고 세금을 거두는 등 교주를 중요하게 여겨 중앙의 장수들을 파견하기까지 했으나, 진나라 측은 변방 지역에 불과하고 익주를 평정한 직후라서 비교적 중요도를 낮게 여긴 것으로 보이며, 또 오나라와 대치한 형주 방면의 전투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