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봉기 廣州起義(广州起义) Guangzhou Uprising | |||
기간 | |||
1927년 12월 11일 ~ 13일 | |||
장소 | |||
중화민국 광둥성 광저우 | |||
원인 | |||
공산주의자들의 소비에트 지구 건립시도 | |||
교전 세력 | |||
중국공산당(반란군) | 중화민국(진압군) | ||
지휘관 | |||
장타이레이 예팅 예젠잉 쉬샹첸 | 장파쿠이 | ||
병력 | |||
공산군 20,000명 | 국민혁명군 15,000명[1] | ||
피해 | |||
5,000여명 사상 | 피해 규모 불명 | ||
결과 | |||
중화민국 정부의 진압 성공, 공산당의 패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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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저우 폭동은 1927년 12월 11일에 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 건립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중국 남부 광저우에서 일으킨 실패한 반란이다. 반란으로 인해 5,000여명의 직접적인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외에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반란후에 색출후 처형되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광저우 기의라는 표현을 쓴다.2. 배경
1927년 4월 우한 국민정부는 공산주의자인 장타이레이(张太雷)와 차이허썬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린다. 이후 같은 해인 1927년, 트로츠키는 중국에서의 공산당 패배를 지속적으로 언급하며 스탈린의 대중정책을 강하게 비판해왔다. 따라서 스탈린은 자신의 대중정책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게 중국 각지에서 도시 점령까지 염두에둔 봉기를 명령하게 된다. 하지만 난창 폭동, 9월에 있었던 후난, 광둥, 장시, 그리고 후베이 지역에서의 추수폭동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된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이에 그치지않고 더 큰 봉기를 준비하게 된다.3. 계획
코민테른은 난창 폭동에서 패배한후 남쪽으로 후퇴중이던 와중에 광저우를 점령하여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같은해 11월 10일에 루오밍은 코민테른을 대표해 상해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다. 이후 상해에서 열린 회의에서 루오밍과 참석자들은 광저우 폭동 계획을 당 내에서 공식화하고 광저우 내에 이를 실행하기 위한 은신처를 세우게된다.1927년 11월 18일, '중국공산당은 광동지역 지지기반 확보'를 포함한 11개안이 담긴 계획을 의결한다. 계획은 장타이레이에게 군사력을 동원한 광저우에서의 폭동과 정치 기반 확보 그리고 권력 확보에 대한 내용을 담고있었다.
12월초, 광저우에는 광저우 방어를 담당하던 장파쿠이와 황기상이 장황사변을 일으켜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 천밍수, 천지탕, 리지선, 황샤오훙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오주로 이동하면서 1,500 여명의 훈련병과 1,300여정의 총기외엔 유의미한 방어조치가 없어졌다. 봉기는 원래 12월 13일에 일어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봉기 정보가 새어나가면서 장파쿠이가 12월 10일, 광저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교도단과 경위대 해산을 명령하며 병력을 회군시키면서 12월 11일 새벽으로 앞당기게 되었다. 계획보다 일찍 봉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계획대로 공산당군을 지원해주려던 개인 공산주의자들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4. 전개
1927년 12월 11일, 오전 2시 장타이레이를 비롯한 반란군 지휘관들은 광저우 주변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오전 3시 30분에는 광둥성회 공안국[2]에 진입해 수감되어있던 정치범들을 풀어주었다. 동이 트기전에 2,000명남짓의 반란군은 이미 광저우 시내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강주변에 있던 포병 세력 대부분을 무력화 시켰다. 직후 시내 거리에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빨간 국기가 내걸렸으며 상황이 대부분 종료된 12일 오후에 장타이레이는 광저우공산정부 설립을 공식으로 선언한다.하지만 장타이레이가 공산주의정부를 선포한 같은날 원래 광저우를 방어하던 군세력의 사령관 장파쿠이는 전국각지에 지원요청을 보낸다. 이후 그가 지휘하던 군은 광저우에 위치한 관인산(현 웨슈산)을 다시 점령하게된다. 관인산 점령후에 장파쿠이가 지휘하던 부대들이 속속 광저우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장타이레이의 반란군을 압도한 중화민국군은 13일에 광저우를 다시 점령하게 된다. 패배한 공산군은 동쪽으로 후퇴했으며 반란군 지휘관들과 더불어 군사 자문등의 다양한 이유로 파견되었던 소련의 고문들도 체포되었다.
5. 결과
광저우 폭동으로 인해 양측에서 모두 20,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이중 5,700여명은 시민이였으며, 100여명의 조선인과 5명 소련인도 포함됐다. 사망자들은 현재 광저우의 빌딩숲에서 멀지 않은 동쪽지역에 묻혔다. 1927년 12월 14일에 중화민국 정부는 봉기의 배후로 소련을 지목하며 소련과 단교했다. 상하이와 창사 등지에 있던 소비에트 공관들은 폐쇄당했다.폭동 이전, 국민당 죄파와 동맹 관계였던 장파쿠이가 장황사변을 일으켜 광동이 국민당 좌파의 손에 들어간 상황이었다.[3] 그러나 1달도 안되어 좌파의 통제를 받는 광동에서 공산당의 폭동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비난이 심해지자 국민당 좌파의 거두 왕징웨이는 폭동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하야해서 외유를 떠났다. 천궁보, 간나이광, 구멍위 등 개조파도 용공혐의로 고발당해 이후 3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당적 영구 박탈 등의 가혹한 처분을 받았다. 공산당의 광저우 폭동 덕에 리지선은 복귀하여 다시 광동을 차지할 수 있었다.
6. 여담
독립운동가 김산, 오성륜, 최용건도 중국공산당원 시절 광저우 폭동에 참가했다.7. 관련 문서
7.1. 국민혁명
- 국민당의 1차 북벌
- 영왕운동(1926.5.25~1927.4.1)
- 천도논쟁(1926.10~1927.3)
- 상하이 폭동(1926.10.24~1927.3.22)
- 난창 군무선후회의(1927.1.1~1927.1.7)
- 난징사건(1927.3.24)
- 4.12 상하이 쿠데타(1927.4.12)
- 4.15 광저우 쿠데타(1927.4.15)
- 마일사변(1927.5.21)
- 1차 산동파병(1927.5.28)
- 국공결렬(1927.7.15)
- 영한합작(1927.9.15)
- 당계전쟁(1927.10.20~1928.1.25)
- 장제스-다나카 회담(1927.11.5)
- 장황사변(1927.11.17~1927.12.11)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
7.2. 1차 국공내전
8. 관련 유적지
중국 당국은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광저우기의열사능원(广州起义烈士陵园)을 광저우시 웨슈구에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또한 문화대혁명 당시 광저우 기이를 기념하여 광저우기의로(广州起义路)라는 도로명칭을 붙였는데 광저우시 해방기념탑이 있는 하이주광장(海珠广场) 북쪽에서 인민공원까지의 도로가 그곳이다. 현재는 이 도로 지하로 광저우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가며 주변에는 광저우시 공안국[4], 광저우시 사회주의학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