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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2:06:45

골덴바움 왕조/역사/말기의 상황



1. 개요2. 암군의 장기 재위
2.1. 재위 말기의 상황
2.1.1. 지배층의 분열과 체제의 위기2.1.2. 후계자 문제2.1.3. 잦은 군사원정
3. 문벌귀족의 전횡과 분권화4. 끝없는 궁중음모5. 지속적인 반란6. 군대의 역량 저하7. 전쟁의 여파8. 민심 이반9. 평가

1. 개요

루돌프로부터 500년 가까이 이어진 골덴바움 왕조는 결국 프리드리히 4세 재위 말엽으로 갈수록 국가적 말기 현상이 두드러지게 일어나며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드리안 루빈스키는 제국이 여러 소왕국들로 쪼개져 분열할 것이라고 보았고 실제로도 망상에 불과했으나 막시밀리안 폰 카스트로프카스트로프 동란에서 초반 승세를 타고 주위 지역을 병탄하여 '카스트로프 왕국'을 세우려고 했고 브라운슈바이크의 경우 코믹스 한정이지만 그가 거느린 영지가 유인행성 3개와 위성 27개, 소행성 18개, 인공천체 6개에 이르며 그 거주민만 수억 명에 달했다. 거기에 영지 내 사병 규모도 막대해서 자체 함대 규모만 수만 척에 달해 영지반란은 물론이요 동맹군과 전투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고 하니 '브라운슈바이크 왕국'이라고 해도 이상할게 없다.[1]

그리고 이런 불안한 상황을 반영하듯 OVA에서는 나레이션의 대사로 사람들 사이에서는 골덴바움 왕조가 망할 거라는 말이 돌았다는 언급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은 사실 건국 초나 중반부부터 그 전조가 보였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문벌귀족의 존재는 그 모든 문제점의 씨앗 중 하나고 프리드리히 4세 시기에 나라를 급속도로 망조로 이끌었다는데서 보듯 하나의 전제군주와 다수의 특권계층의 체제는 결국 태생적으로 문제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암군의 장기 재위[2]

제국 말기 문제점들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원흉이다. 원래 골덴바움 왕조에도 폭군이나 암군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명군이 재위해서 선제의 일을 수습하여 나라를 그런대로 유지했고 루돌프만 빼고는 일찍 축출된 편이었다.

문제는 프리드리히 4세는 암군일지언정 폭군은 아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애초에 통치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무능한 사람이지만 반대로 지기스문트 2세나 아우구스트 2세처럼 지배층이 보기에도 가만히 놔둬선 안되겠다 싶은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보니 결국 무능한 프리드리히 4세의 치세는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추가로 프리드리히 4세는 무슨 운이 따랐던 것인지 평균 재위기간이 13~14년 정도인 골덴바움의 황제들 중에서 31년이라는 유독 기나긴 재위기간을 자랑하는데 이런 암군의 재위가 30년씩이나 이어지다보니 전제군주제 국가인 골덴바움 왕조의 사정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프리드리히 4세가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여 써먹는다면 모를까. 프리드리히 4세 말엽의 제국재상대리인 리히텐라데를 보면 알겠지만 나라를 무난하게 이끌어갈 사람이지만 그 뿐이었다. 하다못해 나라에 아예 개혁세력이 없었다면 뭘 해도 안 되는 선택지였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 라인하르트는 국내의 개혁세력을 대거 등용하여 제국을 변화시켰으니 그런 변명도 불가능하다.

2.1. 재위 말기의 상황

2.1.1. 지배층의 분열과 체제의 위기

프리드리히 재위 말기의 제국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3]

문제는 이들 모두 골덴바움 왕조를 유지하는데에 결함이 있었다.

결국 종합해보면 체제유지에 가장 적극적인 문벌귀족들은 당장의 존속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장기적으로는 계속해서 나라를 썩게 만들 뿐이며 시대의 문제점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체제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 반면에 체제를 개혁하려는 이들은 체제유지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가졌다.

그런데다가 체제 유지파도 분열되어 문벌귀족과 리히텐라데는 결국 화합하지 못했고 문벌귀족은 일부가 자기만의 파벌을 만들어서 리히텐라데는 라인하르트를 끌어들여 대립했으나 그렇게 벌어진 권력싸움에서 문벌귀족은 자기네들끼리도 분열한 결과 문벌귀족과 리히텐라데 모두 몰락했고 그 순간 골덴바움 왕조는 실질적으로 멸망한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애초에 상층부의 분열 그 자체도 골덴바움 왕조 몰락의 서곡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불운도 따랐는데 하필이면 군재가 수백년에 한번 태어날 만한 천재 수준에 카리스마마저 끝내주는 사람이 이 시대에 태어난 것도 불운이었다. 앞서 군재는 있지만 신분이 낮아서 겉도는 장교들이 체제에 불만이 많았지만 이들은 라인하르트가 규합하기 전까지는 파편화된 개인이라서 라인하르트만 없었다면 내란에 대체적으로 정부군 측으로 참전해 큰 공을 세워 제국군에서의 영향력이 커졌을 수는 있어도 결코 권력의 중추에 다가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역시도 당시 앙시앵 레짐 체제의 프랑스를 흔히들 성직자(제1계급)+귀족(제2계급) VS 부르주아를 포함한 평민(제3계급)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은 여기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성직자라고 해도 내부에서는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가 대립하고 있었고 귀족도 고위 귀족과 하위 귀족이 대립하고 있었으며 왕족조차도 루이 16세와 그 직계와 방계 왕족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혁명 당시를 보면 고위 귀족[11]+고위 성직자[12]+직계 왕족 VS 하위 귀족[13]+하위 성직자[14]+평민+방계 왕족[15] 같은 식으로 나뉘었다고 보는게 더 합리적일 지경이다. 그 결과 하급 귀족 출신인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고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는 루이 16세의 재판에서 그가 사형 선고를 받게끔 손을 썼다는 의혹을 받는다.

위와 같은 사례를 보면 골덴바움 왕조 역시도 마찬가지다. 물론 골덴바움 왕조는 대체적으론 누가 권력을 잡든 권력을 잡은 쪽에 순응할 편이었기에 체제 수호파가 권력을 잡았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그 수호의지가 강한 쪽의 역량이 지나치게 모자랐고 후술할 후계자 문제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루트비히 황태자가 죽지 않았거나 프리드리히 4세가 제대로 된 후계자 지명만 했어도 브라운슈바이크건 리텐하임이건 리히텐라데건 라인하르트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2.1.2. 후계자 문제

프리드리히 4세로부터 태어났거나 태어날뻔한 자식은 30명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사산, 유산되거나 성인으로 자라지 못하고 죽어 어느정도 성장한 사람이 넷, 심지어 황태자였던 루트비히는 에르빈 요제프라는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었으며 살아남은 이는 아말리에 폰 브라운슈바이크크리스티네 폰 리텐하임 뿐이었는데 둘 다 딸이었고 또 두 사람이 낳은 자식도 모두 딸이었다. 거기다가 두 딸의 남편은 제국 최고의 대귀족이다보니 후계자 선정이 쉽지 않은건 덤.

물론 대귀족과 신흥 장성들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전제군주정 체제인 골덴바움 왕조에서는 황제에게 비할 바가 못된다. 만일 프리드리히 4세가 셋 중 하나를 명확히 지정하고 죽었다면 감히 황제의 결정과 그에게 인정받은 후계자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대규모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았을 테고, 운이 좋으면 골덴바움 체제도 조금이나마 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임종 직전까지 후계자를 확실하게 지명하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이로 인해 불안정한 황실 권력과 정통성만 남긴 채 문벌 귀족파와 라인하르트 파에게 주도권을 뺏기게 되었으며, 결국 골덴바움 체제는 시한부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2.1.3. 잦은 군사원정

프리드리히 4세는 30년 넘게 '무난하게' 재위했지만 '무난하게' 재위하다보니 특별한 실정이 없었지만 특별한 업적이 없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재위 말엽쯤 되면 하다못해 군사적 업적이라도 달아드려야 한다는 이유로 여러차례 군사원정을 벌이게 되었고 이 기회를 가장 많이 받아먹은 사람이 바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었다. 제국-동맹 전쟁의 거의 대부분의 구도가 제국(공)-동맹(수)라지만 년 단위로 대규모 출병을 벌이고 이 때마다 라인하르트가 공을 세운데다가 보이지 않는 프리드리히 4세의 총애까지 겹쳐 라인하르트는 단기간에 엄청난 출세를 하여 프리드리히 4세가 사망할 즈음이 되면 자기만의 원수부를 열고 그 안에 여러 인재들을 모아 일종의 '군벌화'까지 진행해 차기 권력을 노려볼 준비까지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대체적으로 군사적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것과는 별개로 얻은 이익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라인하르트가 오롯이 지휘권을 잡고한 전투도 아니다 보니 반플리트 성역 회전에서는 기지 사령관을 잡는 정도에 그쳤고 제3차 티아마트 회전에서는 함대 1개를 전멸시키는 정도에 그쳤고 그나마 라인하르트가 제대로 지휘권을 잡은 제4차 티아마트 회전아스타테 회전에서 큰 성과를 거뒀으나 그렇다고 제국이 대단한 이익을 본 것도 아니다.[16] 오히려 아스타테 회전 이후에 벌어진 제7차 이제르론 공방전에서 이제르론 요새를 상실하는 뼈아픈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만일 동맹이 제국령 침공작전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면 동맹은 건국이래 최초로 얻은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제국을 압박했을지도 모른다.[17]

그리고 이런 잦은 전투 때문에 많은 인명손실이 났고 아마 후술할 노부인이 저지른 사건 역시도 이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18]

3. 문벌귀족의 전횡과 분권화

문벌귀족의 역사는 루돌프 폰 골덴바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자신이 선별한 사람들에게 게르만식 성을 하사하며 귀족으로 삼았다. 이들이 문벌귀족의 시초로 이들은 루돌프 사후 벌어진 공화주의자들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며 제국을 성공적으로 유지시켜 자신들의 안위 또한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문벌귀족은 제국의 핵심 지배계급이 되었고 스스로를 '골덴바움 왕조를 수호할 신성한 사명을 선택받은 존재'라 칭하며 평민들과 격이 다르다고 여기며 온갖 부와 호사 그리고 특권과 혜택을 누려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심해도 너무 심했다. 일단 으레 지배계급이 다 그랬듯 세금을 내지 않았고 황실로부터 많은 재물과 영지를 하사받으며 그 부를 끝없이 늘려나갔으며 이런데도 혹시라도 이들이 경제적으로 망할까봐 고금리 채권까지 받는다. 그 결과 '평범한' 축에 속하는 큄멜 남작가의 경우 그 저택이 일반 주택 300채나 들어갈 정도로 거대하였고 브라운슈바이크 등 문벌귀족 중에서도 세가 큰 귀족들은 아얘 행성 단위로 영지를 가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들이 유능하다면 그저 부를 탐할 뿐 국가 자체는 꽤 안정적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겠지만 이들은 가진 부에 비해 능력은 형편없어서 군재의 경우 그나마 능력이 아주 없는건 아닌 축에 속한 사람이 브라운슈바이크이고 브라운슈바이크가 그나마 유능한 사람이니 그를 제외한 귀족들의 한심함은 말하지 않아도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사병까지 거느렸다는 것이다. 후일 립슈타트 귀족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이들에 정규군도 일부 들어갔다고는 하나 이들의 병력은 2560만명, 함선은 166,000척에 달하여 10만척이던 정부군보다 오히려 숫자는 더 컸다.

부와 군사력을 축척한 덕분에 이들은 최소 3개의 요새와 각지에 널린 영지들을 기반으로 본편 초반부부터 여러 차레 반란을 일으켰고, 심지어 귀족연합이 궁지에 몰려 가이에스부르크 요새에 고립된 순간에서도 물자 자체는 좀처럼 떨어지지는 않았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들은 다시 여러 문제점을 낳게 된다.

4. 끝없는 궁중음모

묘사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기 1세기 전부터 이미 황위를 둔 암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고 나온다. 문제는 이 짓거리를 이 때도 아니고 프리드리히 4세 치세까지 그러니까 수백년간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수백년동안 지배층들이 권력싸움만 해왔다는 얘기. 이렇게 되다보니 지배층들은 권력싸움만 몰두하게 된다. 최상류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암투라면 모를까 다른 분야에서는 대체로 무능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되는데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4세는 엄청나게 여색을 밝혔기에 당연히 자식도 많았을 것 같지만 대부분 사산, 유산되고 무사히 태어난 아이들도 대부분 일찍 죽어서 그나마 무사히 자란 사람이 넷이고 그나마도 한 명은 자식 없이 죽고 루트비히 황태자는 아들을 얻었지만 젊은 나이에 죽었고 결국 남은 자식은 아말리에와 크리스티네라는 딸 뿐이었다.

이는 굉장히 기형적인 생존률인데 은하영웅전설의 무대는 전근대가 아니라 37세기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은하영웅전설에서는 성능이 조금 나쁘지만[19] 그래도 현 시점의 의수와 비교하면 제법 그럴듯한 의수까지 나올 정도로 기술력이 나쁘지 않게 묘사된다. 그런데도 여러 자식들 중에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이 2명 뿐인 것은 이해가 안 된다.

물론 골덴바움 왕조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유산, 사산, 요절은 물론 기형아의 출생도 많았다고 하니 유전적 문제가 있었을수도 있고 실제로 시조인 루돌프 폰 골덴바움도 백치로 태어난 아들이 있었을 정도니 그런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37세기가 무대인걸 감안하면 생존률이 낮아도 너무 낮다. 심지어 이 사람들 황족이다.

그런데 단서를 얻을 수 있는 구석이 하나 있는데 프리드리히 4세의 애첩이었던 주산나 폰 베네뮌데는 네 번 임신했지만 3번은 유산하고 1번은 사산하여 결과적으로 단 1명의 자식도 낳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서 황제가 아이를 가지는 것이 못마땅했던 사람들의 음모이며 그 범인은 브라운슈바이크나 리텐하임[20]일 것이라는 말이 돌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술력 수준의 발전에도 이토록 무탈하게 성장한 사람이 적은 이유가 이해된다. 하다못해 정력왕이던 오토프리트 4세도 자식이 624명인데 그 중에 성인으로 자란 사람은 겨우 388명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면 가능하다.

5. 지속적인 반란

부, 권력, 군사력까지 갖춘 귀족들은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반란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상은 사실 이상할것도 없는 것이 골덴바움 왕조는 최소한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기 1세기 전부터 황위를 두고 암투가 벌어졌다고 할만큼 정치투쟁이 잦았고 그 과정에서의 반대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아도 너무 많았고 시도때도 없었다. 이런 행위가 극단적으로 많았던 '검붉은 6년' 같은 시기가 있었을 뿐이지 이런 행위는 계속 없어지지도 않고 일어났기에 반란 또한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물론 이러한 반란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예외적으로 황제가 너무 막장이라 누가 반란 한번 일으켜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린더호프 후작의 반란은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만한 명분도 아니었고 일단 일개 귀족이 국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규모 차이가 났기에 반란은 늘 진압당했다.

6. 군대의 역량 저하

은하제국은 건국시조부터가 군인이었던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었기에 군에 대한 입지가 매우 높았고 군인 신분으로서 내각 자리를 차지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문벌귀족들도 으레 정규군 계급을 다는 일이 많았고 아무리 낮아도 장성급은 쉽게 땄다.

흥미롭게도 적국인 동맹은 부유층들이 적극적으로 군대에 가는 것을 회피하는 문제가 벌어졌다면 제국은 부유층들이 군대에 가려고는 했다. 실제로 브라운슈바이크도 엄연히 군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이들이 제국군에 도움이 된 것은 아니기에 결과적으로 양국 모두 부유층의 병역 문제에 관련없이 문제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능력을 전혀 검증받지 않은 채 계급을 쉽게 땄고 그나마 그레고르 폰 뮈켄베르거는 사관학교 수석졸업이라는 경력 덕인지 무능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유능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이런 뮈켄베르거는 그래도 기본적인 용병은 할 줄 알고 사람 보는 눈은 있는 사람이었지만 브라운슈바이크나 플레겔 같은 이들은 같은 장성급이 맞냐고 싶을 정도로 무능에 정점을 달린다.

그나마 그냥 무능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아랫사람들만 조금 고생하고 말텐데 그것도 아닌게 문제. 모두가 봐도 알만큼 무능하지만 정작 자기자신들은 몰라서 되먹지도 않게 개입했다가 어떤 일이든지 망쳐버린다. 예를 들어 클롭슈톡 사건의 경우 일개 지방 대귀족의 급조한 반란에 불과한데도 지휘관인 브라운슈바이크조차 무능한데 그 아랫사람들은 더 무능해서 진압에만 한 달씩이나 소모했다. 비슷한 지방 반란이지만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는 진압에 겨우 10일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나마도 오가는데 6일, 뒷수습에 2일 걸려서 반란 자체는 2일만에 진압했다. 그런데 그 반란은 주동자인 막시밀리안 폰 카스트로프가 의의의 군재를 가진탓에 앞서 벌어진 2차례의 토벌전이 실패해서 반년이나 이어진 반란이었다. 이정도니 만일 문벌귀족들이 진압에 나섰다면 필패했을 것이다.

이후에 벌어지는 립슈타트 전역에서는 더 가관인데 알테너 회전, 키포이저 성역 회전, 제1차 가이에스부르크 요새 공방전, 제2차 가이에스부르크 요새 공방전 등을 보면 알겠지만 서로 엇비슷한 숫자의 병력으로 싸우는데도 귀족연합은 참패만 거듭한다. 그나마 이긴 샨타우 성역 회전도 지휘관인 메르카츠가 그나마 제대로 된 지휘를 할 수 있었고[21] 그나마도 상대 지휘관인 로이엔탈이 숫적 열세에 상대가 메르카츠라는 부담감 그리고 샨타우 지역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고 여겼고 메르카츠도 청년 귀족들이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은 탓에 무리하게 로이엔탈을 상대하기보다는 목표인 샨타우 지역만 손에 넣자고 여겼기에 문벌귀족은 승리했지만 그렇다고 로이엔탈에게 참패를 안겨주거나 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이지만 문벌귀족들은 끝까지 자기들이 무능하다는 자각이 없었고 그에 반비례하게 쓸데없이 오기만 많았다. 그 때문에 아랫사람들 입장에서는 상관은 무능한데다 자기 멋대로 일을 벌이데 같은 배를 탄 신세라 상관이 자폭하면 자기도 자폭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립슈타트 전역이 거의 정부군의 승리로 귀결되자 그동안 억눌려 있던 아랫사람들의 반발심리가 폭발해 온갖 일들이 벌어진다.[22]

당연하지만 이런 상황은 자유행성동맹과의 전쟁에서도 악재로 작용했다. 그래도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는 유능한 지휘관들도 있었지만 이들이 죄다 전사한 영향 탓인지 전선에 내보내지는 이들은 적어도 플레겔 같은 노답이 아닌데도[23] 자유행성동맹과의 전투들은 애매한 결과만 낳았다.

한편으로 군대의 역량 저하는 라인하르트의 찬탈을 쉽게 만들었다. 군 지휘관들의 능력치가 모두 고르게 좋다면 라인하르트로서도 힘든 싸움이었겠지만 제국군에서 가장 역량있는 장성들은 거의 다 라인하르트 밑에 보였고 이렇다 보니 립슈타트 전역이 터지자 라인하르트는 무능한 귀족군을 너무나도 쉽게 격파했다.[24] 귀족군 패망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있긴 했지만 귀족군 지휘관들의 능력이 보편적으로 잘하는 수준이라면 그렇게까지 털리다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25]

여담으로 이 문제는 제2차 티아마트 회전이 원인이 아니냔 말이 있다. 작품 시작 시점으로 이미 50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지만 이 때 제국군은 장성급만 60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고위장교의 피해가 극심했고 이를 양적으로 채우는데도 1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모양새를 갖추는데도 10년이나 걸렸다면 질적으로는 그 이상일 것이다. 즉 질적으로 허들이 낮아진 시대에 들어온 부적격자들이 남아있었고 또 그들이 귀족이라면 그 인맥으로 또다른 부적격자들이 들어왔다면 질적 문제가 게속 이어진건 납득할 수 있다. 실제로 플레겔처럼 라인하르트와 비슷한 나이에 장성이지만 실력은 엉망인 청년 귀족이 있기도 하고.

7. 전쟁의 여파

자유행성동맹과의 전쟁도 사정을 안 좋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묘사가 많지 않으나 페잔이 동맹 뿐 아니라 제국에도 경제적 영향력을 넓혔다는 묘사를 보면 제국 역시도 전쟁 때문에 사정이 나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나 재정 문제는 제국도 심했는데 프리드리히 4세의 사치 문제도 있었겠지만 특권계급인 문벌귀족들에게 과세가 지워지지 않은 것이나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돈을 써야 했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8. 민심 이반

황족들은 황위 다툼, 귀족들은 권력쟁취에만 몰두하는데 전쟁은 장기화되지 툭하면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민심이 좋다면 그게 이상하다. 이와 관련되어 울리히 케슬러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케슬러가 막 헌병본부로 연수 왔을때에 한 사건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사건은 이러하다. 자유행성동맹과의 전쟁터에서 아들 셋을 모두 잃은[26] 노부인이 분노해 루돌프 폰 골덴바움과 프리드리히 4세의 초상화를 짓밟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고 밀고하였고 노부인은 잡혀오게 되었다.

헌병부총감은 케슬러에게 노부인을 비난하며 은근히 엄벌에 처하게[27] 하라고 했지만 케슬러는 그것을 무시하고 밀고자는 '감히 폐하의 초상화가 밟혀지는것을 보고도 방관했으니 공범자나 다름없다'는 논리로 체포해 조사와 징벌을 내렸고 밀고자는 치료비로 포상금을 날렸다. 반면 노부인은 구금과 심문은 했으나 고문은 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헌병부총감의 힐책에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감히 초상화를 짓밟을 리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노부인을 지켜주었다.[28]

이 부분에서 보듯 전쟁 때문에 민심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었고 서술에 따라서는 밀고자가 아작이 난 것에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하기도 하기에[29] 확실히 민심이 나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립슈타트 전역이 터지며 더욱 극명해지는데 립슈타트 전역 말엽 귀족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귀족들은 자기 영지를 착취하였고 그 결과 영지민들의 불만이 증가하여 끝내 브라운슈바이크의 영지인 베스터란트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대리하여 통치하던 샤이트 남작을 죽여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러한 사건은 끝내 베스터란트 사건으로 이어졌다.

베스터란트 사건의 가장 큰 의의는 민중이 골덴바움 왕조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거뒀다는 것에 있다. 귀족에 의해 인류의 금기[30]마저 범해진 사건 앞에 귀족들, 그리고 그 귀족들이 수호하고자 하는 골덴바움 체제를 완전히 버린 것이었다.[31]

그 결과는 은하제국 정통정부의 대폭망이었다. 정통정부를 세운 문벌귀족 잔당은 황제만 있다면 민중들은 우리를 지지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라인하르트의 통치는 역대 골덴바움 왕조의 황제들보다도 훌륭한 편이었고 특히 민중들에게 많은 권리를 주었기에 민중들은 라인하르트를 규탄하는게 아니라 문벌귀족 잔당과 그에 결탁한 자유행성동맹을 규탄하며 자발적인 입대를 통해 자신들이 겨우 얻은 권리를 지키고자 했다.[32]

9. 평가

골덴바움 왕조 말기의 상황은 전형적인 전근대 국가의 국가적 말기 현상에 가깝다. 상층부의 부패와 권력다툼, 특권계급의 특권에 따른 부와 권력의 극대화, 그리고 이 상황에 휘둘리며 피해만 입는 민중들의 양상은 어느 전근대 국가나 다 볼법한 현상이며 현재에도 계급제가 있건 없건 일어나는 현상이다.[33]

그러나 문제는 골덴바움 왕조는 500년이나 이어졌기에 그 문제가 너무 극단화되었고 자유행성동맹과의 1세기 반에 걸친 전쟁은 그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여기다가 지배층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착취, 탄압 등으로 인해서 결국 양극단에 있던 자유행성동맹과는 달리 극소수 지배층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골덴바움 왕조의 멸망을 슬퍼하지 않았다. 이는 극소수 지배층은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대다수 민중들은 나라를 잃은 것을 슬퍼한 자유행성동맹과는 다르다. 물론 둘은 멸망의 형태가 달랐지만.[34]
[1] 이런 점을 우려한 것이 루빈스키가 동맹의 제국령 침공 계획을 제국에 넘긴 이유로 보인다. 라인하르트의 능력과 동맹의 무능이 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루빈스키 입장에서는 이 상황에서 제국이 동맹의 공세를 오래 버티지 못 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2] 이전에 늙은 암군이라고 칭하였고 실제로 프리드리히 4세의 외모는 늙었긴 했지만 승하할 때 당시 나이가 겨우 63세라 은영전이 쓰여진 80년대라면 모를까 현 20년대에서는 노인조차 아니다.[3] 아래의 리스트를 쭉 훑어보면 진보파를 제외하면 전부 루돌프가 양성한 귀족, 관료, 군부의 삼위일체가 각기 쪼개진 것임을 알 수 있다.[4] 이전까지 골덴바움 왕조에서 여제는 등장하지 않았다.[5] 라인하르트가 없거나 그의 직급이 낮거나 아니면 립슈타트 전역이 안 터진다면[6] 문벌귀족들도 그를 아니꼽게 생각했지만 별 말도 안하던 이유는 어차피 황제 사후에 자연스레 물러날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7] 라인하르트+리히테라데 지지[8] 여러 이유로 불참[9] 최소한 라인하르트, 키르히아이스, 로이엔탈, 오베르슈타인은 그렇다.[10] 40년 가까이 골덴바움 왕조를 위해 싸워왔기에 립슈타트 전역 후 라인하르트에게 항복하면 중용될 것이 뻔하고 본인도 알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후일을 기약한다는 명분으로 동맹에 망명했다.[11] 이들도 부계로부터 이어지는 뼈대있는 대검 귀족과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 귀족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귀족의 특권 앞에서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12] 고위 귀족 출신이다.[13] 고위 귀족의 위세에 눌려있었고 귀족으로서의 특권은 허울뿐이라 오히려 혁명을 통해 판을 엎어버리는게 유리했다.[14] 대게 낮은 계급 출신이라서 평민, 하급 귀족 등의 의견에 공감하기 쉬웠다.[15] 당연하지만 혁명으로 판을 엎어버린 뒤 자기가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 단 루이 18세나 샤를 10세 같은 경우에는 혁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16] 거기다가 여기서도 손실이 없는건 아니라서 아스타테 회전에서는 에를라흐가 라인하르트의 말을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하다가 전사했다.[17] 시드니 시톨레, 양 웬리 같은 동맹군 내 양식있는 인사들도 이런 군사적 우위를 통해 부담감을 얻은 제국이 동맹과 평화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제7차 이제르론 공방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이들인데 이 역시도 이런 희망을 가지고 추진한 것이다.[18] 사건 자체야 자식 전부가 전사한 것에 대한 분풀이라지만 그 전투들이 단순히 정치적인 목적에서 행한 것이고 그것도 모자라 제대로 된 성과도 없었다면 그냥 개죽음이다.[19] 고장이 나서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도 있다.[20] 두 사람은 황제의 사위이면서 동시에 대귀족이었기에 이들의 자식들은 황위 계승 순서가 매우 높았다. 즉 두 사람으로서는 경쟁자가 많아지는 것이 누구보다도 싫은 사람들이다.[21]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점이 없지는 않아서 여전히 쓸데없이 혈기만 넘쳤다고 한다. 그나마 다른 점은 이런 상황임에도 적어도 정교하게 제어되어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 뿐인데 다른 전투들은 대부분 이런 쓸데없는 혈기에 휩쓸려 패배했다.[22] 부하를 학대했던 함장이 핵융합로에 처넣어지고 병사들의 미움을 산 고급장교 둘이서 한쪽이 죽을 때까지 맨손싸움을 벌였으며 산 쪽은 우주공간으로 내던져졌다. 함장의 스파이가 되어 동료를 밀고한 병사는 목에 밧줄이 감긴 채 함내에서 끌려다니다가 사살당했다. 이런 보복 열기가 어찌나 심했던지 보복에 너무 신경쓰느라 항복을 못해서 죽은사례도 있었다.[23] 브라운슈바이크 같은 경우 원수지만 예비역이었고 골덴바움 왕조에서 그나마 제국군은 비교적 공정한 편이었다고 한다. 후일 로엔그람 왕조의 개국공신이 되는 라인하르트 원수부의 상층부들이 죄다 청년 평민 장성들인 것도 이들은 그만한 재능이 있었고 또 그걸 인정받았기 때문이다.[24] 얼마나 쉽게 격파되었냐면 라인하르트와 오베르슈타인은 1년은 버틸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귀족군은 단 7개월만에 패망했다. 하다못해 오베르슈타인 말마따마 베스터란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고작 3개월이 연장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전략적 식견이나 대국을 보는 안목이 좋은 편인 두 사람도 귀족군이 아무리 무능해도 1년은 버틸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예상을 나쁜 의미로 깨버린 것이다.[25] 적어도 이정도로 잘 한다면 지휘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거나 아는데 일부러 공명심에 달려들어도 각자 알아서 평타는 할테니 전술적 승리를 한두번 정도는 챙기거나 패배하더라도 어느정도의 성과는 거두며 패배했을 것이다.[26] 두 명은 전사 한 명은 병사[27] 사실상 고문치사[28] 물론 노부인은 단단히 찍혀 있었기에 결국 변경의 유배지로 보내져 거기서 식사가 끊겨 쇠약사했다.[29] 출처는 불명[30] 13일 전쟁으로 인해 문명이 완전히 초토화되고 100년 가까이 벌어진 대혼란으로 인해 유인행성에 핵공격을 가하는 것은 금기화되었다.[31] 해당 사건은 귀족, 그것도 브라운슈바이크와 같은 편이던 립슈타트 귀족연합에 가담한 연합파 귀족들도 경악한 일로서 베스터란트 사건이 벌어지자 희망이 없다 여기고 전향 및 자살하는 귀족들이 늘었다고 언급된다.[32] 설사 라인하르트의 통치가 훌륭하지 않았더라도 중박은 치거나 적어도 프리트리히 4세보다는 잘했다면 그래도 민중은 라인하르트 편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라인하르트는 '직접' 민중을 학살하지는 않았다.[33] 현대로 치면 양극화와 정치극단주의, 무전유죄 유전무죄 등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34] 골덴바움 왕조는 단순한 나라 내의 왕조교체이며 똑같은 전제군주제기에 제국민들 입장에서는 지배자만 바뀐 것이지만 민주공화제 동맹은 전제군주제인 제국에게 점령당한 것이기에 동맹 시민들 입장에서는 분노할만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