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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2:36:28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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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통일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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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4234><colcolor=#fff> 제3대 폴란드 통일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Władysław Gomułk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ladyslaw_Gomulka_na_trybunie.jpg
출생 1905년 2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크로스노 비아워브제기 프란치슈칸스키에[1]
사망 1982년 9월 1일 (향년 77세)
폴란드 PR 바르샤바주 바르샤바시 콘스탄친예지오르나[2]
재임기간 제3대 폴란드 통일노동당 중앙의원회 제1서기
1956년 10월 12일 ~ 1970년 12월 20일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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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zas przejść do codziennej pracy, ożywionej wiarą i świadomością, że partia zespolona z klasą robotniczą i narodem poprowadzi Polskę po nowej drodze do socjalizmu”.
"노동 계급과 민족이 힘을 합친 당이 폴란드를 사회주의의 새로운 길로 인도하리라는 믿음과 의식으로 활기찬 매일의 과업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1956년 10월 24일, 바르샤바 집회 연설. 전문. 녹음본.

폴란드 인민 공화국 통일 노동당(공산당)서기장. 가명은 비에스와프(Wiesław), 루드비크(Ludwik), 펠릭스 두니아크(Feliks Duniak).

2. 생애

1905년 2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로스노(Krosno) 외곽의 비아워브제기 프란치슈칸스키에(Białobrzegi Franciszkańskie)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가 폴란드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라서 어려서부터 좌파 성향을 띄고 있었다. 1930년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사나치아(Sanacja) 독재정권에 대항하다가 1932년 파업을 주도하던 와중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년 후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탈옥한 이후로 소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폴란드에서 그는 반나치 빨치산에 참여, 폴란드 노동당 서기장에 선출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소련측에게 의심을 사기 시작했다. 폴란드나치 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에 공산화에 공을 세웠지만 공산화 이후에 비에루트의 강제적인 집단농장화에 반대하고 코민포름 결성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반 스탈린주의파로 낙인찍혀서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고무우카가 감옥에 수감된 것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나중에 지도자 자리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재판 도중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는 바람에 1956년 당시 폴란드 수반이었던 볼레스와프 비에루트의 사망과 함께 포즈난 항쟁 이후에 친소파의 입지가 급속히 약해진 틈을 타 인민들의 지지를 업고 서기장 자리에 올랐으며 집권 초기에 자유화 정책을 펼쳤다. 강제적인 집단농장화를 중단했으며, 급속한 탈스탈린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옆 나라 헝가리에서 반소 시민봉기로 들어선 너지 임레 혁명정부가 중립화,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일당제 폐지를 발표하자 소련군이 침공해서 강제로 정권을 뒤엎고 시민봉기를 진압하는 헝가리 혁명이 터졌다. 반소노선에 대한 소련의 초강경 대응을 본 고무우카는 즉각 바르샤바 조약기구 잔류와 확고한 친소 노선을 천명해서 소련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내부적으론 탈스탈린화 정책을 계속 펼쳤다.[3]

잘만 했으면 폴란드의 너지 임레 또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알렉산데르 둡체크라는 평을 들을 수 있었던 인물.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 권위주의적 성향으로 변질했으며 자유화 정책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때는 소련에 순응하여 아예 체코슬로바키아에 군대를 내보내기까지 해서 노동자들로부터의 지지율도 하락일로를 달렸다.

1970년에 빌리 브란트와 협상을 해서 서독측으로부터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받는 공적을 세우기는 했지만 경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건국 시점에서 2400만이었던 폴란드 인구는 1970년에는 3300만으로 폭증하였고 이는 엄청난 잉여 노동력을 양산하여 폴란드의 인건비를 하락시키고 실업률을 증가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고무우카는 여러 경제개혁을 고려해보았으나 당내 보수파들은 당의 통제를 파괴하려는 부르주아 사상이라고 격렬히 반발하여 개혁도 좌초되었다. 경제상황이 급격히 악화됨에도 고무우카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1970년 12월 13일, 기습적으로 생필품 가격을 무려 30%나 인상하는 조치와 더불어 임금 시스템 개혁을 발표하였다. 격노한 그단스크, 그디니아 등 발트해 연안의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왜 하필 발트해가 터졌는고 하니 바로 바다 건너서 스칸디나비아 등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 심지어 같은 공산주의 국가지만 폴란드보단 상대적으로 훨씬 나았던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헝가리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체감하고 있던 이들의 분노가 가장 먼저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12월 14일에 시작된 폭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폴란드는 내전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고무우카는 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권을 사수하라고 무력진압을 지시하는 한편 브레즈네프에게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국을 자극할 것을 우려한 브레즈네프는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면서 개입을 거부했다. 결국 폭동은 군의 진압으로 겨우 진정되었고, 공식적으로 45명이 사망하고 1,165명이 부상당했다. 폭동을 달래기 위해 고무우카는 임금 개혁을 철회하고 각지에서 구성된 노동위원회와 노동규찰대의 존재를 용인하였다.

이 사건으로 입지가 크게 약해진 고무우카는 12월 18일 정치국 회의에서 무력진압의 정당성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던 중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졌다. 목숨은 건졌으나 고무우카는 시력을 완전히 잃고 병원에 실려갔다. 12월 19일, 7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정치국의 고무우카 지지자들은 모두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를 지지하기로 결정, 고무우카에게 제1서기에서 사임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무우카가 오랫동안 당과 국가에 바친 봉사를 고려하여 그를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는 유지시키로 결정하였다. 고무우카는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12월 20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였다. 후임 제1서기로는 에드바르트 기에레크가 선출되었다.

이후로 재향군인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가 1982년 9월 1일 바르샤바 근교 콘스탄친예지오르나(Konstancin-Jeziorna)에서 으로 사망했다.

3. 평가

현재 폴란드에서 전반적인 평가는 많은 이들의 환호속에서 등장해서 나름 유연한 행보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마지막에는 권위적이고 무능하고 부패한 모습만을 보여줘서 결국 실망을 안겨준 지도자.

그나마 후임인 기에레크와 민주화 이후에 대통령에 당선된 전설적인 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도 결국에는 고무우카와 비슷한 길을 걸어[4] 서기장직과 대통령직에서 쓸쓸하게 물러났기 때문에 아주 나쁜 평을 듣는 수준까지는 아니다.

4. 여담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본 인물의 이름을 '블라디슬라브 고물카'로 표기했다. 1992년에 제정된 국립국어원폴란드어 표기법에 의해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로 정정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 2000년대 초반까지도 서적에선 고무우카가 아닌 고물카라고 언급됐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고물카로 표기됐다. 고물차[5] 그러다보니 그 이름만큼은 확실하게 각인될 정도였다. 표기에 관한 내용은 Ł 참조.


[1]폴란드 포트카르파츠키에주 크로스노[2]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주 피아세치노군 콘스탄친예지오르나[3] 이 때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통보도 없이 갑자기 폴란드를 방문하는 바람에 혹시 싫은 소리를 할까봐 고무우카는 긴장했지만 막상 흐루쇼프는 오히려 고무우카를 격려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탈스탈린화와 개혁은 흐루쇼프도 공감하는 정책인데다가 폴란드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잔류의사를 표명했기에 딱히 싫은 소리를 할 이유가 없었던 것. 흐루쇼프는 동맹국들이 탈스탈린화를 핑계로 탈소련화를 추진하는걸 경계했을 뿐이다. 탈스탈린화를 추진하면서도 소련 중시 외교정책을 고수한다면 흐루쇼프의 입장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파트너였다고 볼 수 있었다.[4] 기에레크는 집권 초기에 폴란드가 매년 9%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기에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이 경제성장이 외채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70년대 후반들어서 경제파탄 상태에 몰렸고, 레흐 바웬사는 대통령 당선 이후에 1000%의 초인플레이션과 10%대의 고 실업률 등 체제전환 과정에서 터진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점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바람에 재선에 실패하며 물러나게 되었다.[5] 1990년에 발간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서도 고물카에 대한 뉴스를 내보내다가, 이름과 당시 폴란드의 삐걱거리는 경제상황이 더해져 영락없이 '고물차'가 연상되는 바람에 방송 중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는 내용이 있다.